이름의 떨림

by Roda with RED

Chapter 2 – 이름의 떨림

로스벤 마을의 새벽은 조용하고 맑았다. 눈은 오지 않았고, 바람은 살짝 찼지만 아직 날이 완전히 트지 않은 시간의 고요함 속엔 잔잔한 따뜻함이 감돌았다. 땅은 차가웠지만, 굴뚝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들 사이로 하루가 천천히 깨어나고 있었다. 브레이트 가문의 집은 마을 서편, 언덕 아래 자리하고 있었다. 낮은 돌담과 잘 다듬어진 나무문, 그리고 언제나 불이 꺼지지 않는 대장간이 그들의 삶을 말해주었다. 이안 브레이트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 일찍 일어났다. 손은 거칠었고, 손등의 오래된 상처는 여전히 붉게 도드라져 있었지만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연장을 점검했다. 망치, 집게, 숫돌이 정돈된 자리에 놓였다. 그의 아내, 리사 브레이트는 부엌에서 국을 데우며 창문 너머 대장간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의 시작. 그의 동작은 어제와 같았고, 그녀는 그 익숙함에 안심하며 잔잔히 웃었다. 말없이 건네는 수건, 익숙한 손길. 그들의 일상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엄마, 아침이에요.”

다락에서 루크 브레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손에는 두꺼운 마법 이론서가 들려 있었다. 책갈피에는 조심스럽게 접힌 종이꽃이 꽂혀 있었다.

“오늘은 엘레멘트 조합 실습을 해보려고요. 어제는 기초 반응이 안 맞았거든요.”

리사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다.

“이젠 책 좀 내려놓고 밖도 좀 보렴. 네 손도 꽤 말라 있잖니.”

루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형도 없고, 아버지는 늘 바쁘시니까요. 저라도 준비하고 있어야죠.”

리사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열심히 하려는 아들의 다짐쯤으로 들렸다. 이안은 그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멈추었고, 불을 다듬던 손이 아주 조금 멈췄다.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조용히 마음속으로 그 ‘가능성’을 꺼내본 적이 있었다.

“오늘은 대장간 일, 나도 도울 수 있어요.”

루크가 말했다. 그 말에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손에 물집 잡힌다.”

“괜찮아요. 그건 마법책에도 안 나오는 일이니까요.”

작은 웃음이 부엌을 감돌았다. 잠시 후, 이안은 망치를 들고 대장간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루크가 조심스럽게 따랐다. 리사는 문가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아침상을 준비했다. 겉보기엔 아무 일도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아주 작고 조용한 ‘가능성’이, 이른 새벽 공기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해가 언덕 너머로 천천히 고개를 들 무렵, 로스벤 마을은 하루를 맞을 준비에 분주해졌다. 아직 바람은 차가웠지만 하늘은 맑았고, 시장 골목을 따라 이른 발걸음들이 오가고 있었다. 광장 입구에는 채소 바구니를 든 이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굴뚝마다 연기가 오르며 집집마다 아침 준비가 한창이었다. 빵을 굽는 화덕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퍼졌고, 들판으로 향하는 농부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논두렁을 살폈다. 우물가에서는 아이들이 심부름을 다투듯 오가며 웃음소리를 흩뿌렸다.

마을 외곽 숲 언저리에서는 사냥꾼 셋이 작은 짐승의 흔적을 따라 조용히 걷고 있었다. 어깨에 활을 멘 한 남자가 낮게 말했다.

“요즘은 멧돼지도 깊은 데서만 움직여. 무슨 기운이라도 느끼는 걸까.”

다른 이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짐승이 먼저 변화를 안다잖아. 우리보다 먼저. 이 조용한 마을에도 뭔가... 스며들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 말에 누구도 덧붙이지 않았다. 숲을 흔드는 바람 소리만이 그 뒤를 이었다.

광장 가까이, 브레이트 가문의 대장간 굴뚝에서는 일찍부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웃들은 그 굴뚝을 하나의 시계처럼 삼았다. 이안 브레이트가 대장간 불을 지피면, 그제야 하루가 시작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웃 몇 명이 대장간 앞에 모였다. 리사 브레이트는 마당에 작은 찻상을 펴고 따뜻한 차를 따라 나누었다. 농부 제라드는 벌써 고장난 낫을 들고 와 있었다.

“이안 덕에 내 봄 농사가 산다니까.”

리사는 웃으며 찻잔을 건넸다.

“올해도 좋은 수확 기대할게요, 제라드 아저씨.”

그 곁에서 루크 브레이트는 마법책을 끌어안고 이웃 아이들에게 간단한 마법문장을 보여주며 자랑하듯 설명하고 있었다.

“이건 불꽃을 만드는 기본 원리야. 실제로는 아직 위험해서 연습만 해.”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그의 손짓을 바라보았다.

“루크는 우리 마을 첫 번째 마법사가 될 거라니까!”

“진짜로 마법 쓰게 되면, 우리 놀러가도 돼?”

아이들의 환호에 루크는 수줍게 웃었다. 그렇게 브레이트 가족은 이웃들과 따뜻한 인사를 나누며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광장 중앙에서 쇳덩이를 두드리는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쨍그랑, 쨍그랑— 금속의 충돌음이 세 번, 천천히 이어졌다.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빵을 굽던 화덕도, 우물가의 양동이도, 농부들의 손길도 잠시 멈췄다.

“무슨 일이지?”

“왕실 소식인가...?”

걱정과 궁금함이 뒤섞인 눈빛들이 광장 쪽으로 향했다.

먼지 낀 외투를 입은 병사 한 명과 말을 탄 관리가 광장 중앙으로 들어섰다. 관리의 등에 달린 가죽통에는 왕실 인장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병사가 말을 멈추고 가죽통을 풀자, 관리가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그는 광장을 둘러본 뒤,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왕국 북부 군사령부의 명을 전달한다! 각지 장인들의 긴급 소집 명령이다!”

광장에 정적이 흘렀다.

“전선의 군수 물자 부족으로 인해, 숙련된 장인의 차출이 필요하다. 명단에 따라 다음 인물들은 오늘부로 칼던으로 출발할 것이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관리가 첫 번째 이름을 읽었다.

“로스벤 마을 — 제라드 밀러, 가죽 장인.”

저편에서 누군가 고개를 떨궜다.

“로스벤 마을 — 토마스 그레인, 목수.”

또 다른 이가 모자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리가 또렷이 외쳤다.

“로스벤 마을 — 이안 브레이트, 대장장이.”

광장은 숨을 삼켰다. 리사는 마당에 놓인 찻잔을 쥔 채 손을 떨었고, 루크는 마법책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이안은 잠시 대장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연장을 내려놓고 광장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모자 벗은 이웃들 사이로, 이안 브레이트의 뒷모습이 묵직하게 지나갔다. 그날 로스벤의 아침은, 더 이상 평범한 아침이 아니었다. 광장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관리가 두루마리를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소집된 장인들에게는 즉시 전달 사항이 있다. 지금부터 주의 깊게 듣도록.”

그의 목소리는 광장 가장자리까지 또렷하게 퍼졌다.

“첫째, 각자는 기본 도구를 소지하고 이동한다. 작업에 꼭 필요한 장비는 본인이 챙겨야 한다. 둘째, 칼던 도착 후에는 일부 물자는 지급될 것이다. 다만, 기본 보급품 외에는 각자의 숙련도에 따라 요청이 제한될 수 있다.”

장인들 사이에서 작은 웅성임이 일었다.

“셋째, 보상은 왕국 기준에 따른 급료가 지급된다. 임무 성과에 따라 별도 인센티브가 주어질 수 있으며, 정식 문서는 도착 후 전달될 것이다.”

병사 하나가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일당이 얼마나 될까...”

“넷째, 모든 장인은 오늘 기준으로 **일주일 이내**에 칼던에 도착해야 한다. 로스벤 마을에서 칼던까지는 산길을 포함해 도보로 5일 정도 소요된다. 이동 및 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고려한 조치다. 지연 시 별도 소환조사가 이뤄질 수 있다.”

몇몇 장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일부는 속삭이며 동행 여부를 확인했다.

“다섯째, 도착 후 성문 외 북쪽 접수소에서 안내를 받을 것이다. 신원 확인과 임무 배정은 그곳에서 이뤄진다.”

관리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이상이다. 모두 준비에 착수하라.”

사람들이 흩어졌다. 목수 토마스는 무거운 얼굴로 모자를 눌러쓰고, 무두장 제라드는 망설이다 이안에게 말을 걸었다.

“이안, 당신도 가게 되었군.”

“그렇소.”

“괜찮겠소?”

이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지.”

그날 저녁, 브레이트 집안의 식탁에는 조용한 따뜻함이 번지고 있었다. 리사는 수프를 덜고, 빵을 나누며 말했다.

“짐은... 내가 좀 챙겨봤어. 옷가지랑 약초 가루랑, 예전에 당신이 아꼈던 망치도 넣었어.”

“고맙소.”

루크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칼던까지, 정말 멀겠네요. 괜찮으시겠어요?”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그 단호한 말에 리사는 웃으려다 말고 잠시 머뭇거렸다. 이안은 수저를 내려두고 루크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시선엔 드문 무게가 담겨 있었다.

“루크야. 네가 무얼 하든...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루크는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전... 형도 없고, 아버지도 가시고, 남은 사람으로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리사가 손을 얹었다.

“루크야. 네가 뭘 하든, 네 마음이 지치지 않게 해야 해. 무리하지 마. 그리고 당신도요. 너무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돌아올 거라 믿고 있을게요.”

이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깊었다. 이안은 가방을 열고 연장을 조심스럽게 정리했다. 오래된 가죽 장갑, 숫돌, 작은 망치. 손에 쥘 때마다 익숙한 감촉이 피어났다. 리사는 그 옆에 앉아 외투를 고르고 있었다.

“예전에... 당신이 이 외투 입고 돌아왔을 때 생각나네요. 첫 전장에 갔던 해.”

이안은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땐 나도 무서웠지.”

리사는 손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은요?”

“지금은... 더 무섭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때는 나 혼자였지만, 지금은... 너희 둘을 두고 가야 하니까.”

리사는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린 잘 있을게요. 당신도... 꼭 다치지 말고.”

그 시각, 루크는 방 안에서 마법서를 펼쳐놓은 채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없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해.”

창밖에는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고, 촛불이 흔들리는 가운데 루크는 펜을 들어 마법문장을 하나씩 다시 써내려갔다. 그날 밤, 그는 늦도록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새벽. 마을 어귀, 싸늘한 공기 속에 장인 셋이 모였다. 이안은 짐을 메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제라드와 토마스도 말이 없었다.

“가시죠.”

누군가 조용히 말했다. 세 사람은 안개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광장 너머, 브레이트 대장간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여전히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섯 밤의 여정 끝에, 칼던 성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안개가 옅어지고, 거대한 성벽이 시야를 가로막을 때—이안 브레이트는 말없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손에는 여전히 묵직한 도구가방이 들려 있었고, 어깨엔 피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산길을 따라 며칠을 걸어온 흔적은 옷깃에 먼지를 남기고 있었지만, 그의 걸음은 여전했다.

칼던 북문 앞은 이른 아침부터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넓은 입구 앞에는 간이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너머로 각지에서 모여든 장인들과 그들을 뒤따르는 짐수레, 가축, 상인들의 마차, 그리고 구걸을 시도하는 거지들이 혼재한 채 얽혀 있었다. 해는 높이 뜨지 않았지만, 열기는 사람들의 어깨와 어깨 사이를 밀어내며 피어올랐다.

“이쪽! 성 안으로 들어갈 사람만 줄을 세워!”

병사의 외침이 울타리 너머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질서를 유지하려는 병사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지만, 그들조차도 얼굴은 굳어 있었고 이따금 신경질적인 동작을 보이기도 했다.

“신분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만 앞으로! 동행자는 뒤로 물러나시오!”

“아, 저기요! 나는 형이 장인이에요! 같이 가야 한다니까요!”

“병사님! 이건 내 마지막 가죽이에요. 성 안에서 팔면 안 됩니까! 부탁이오!”

구걸을 시도하는 노인은 바닥에 엎드려 병사의 다리에 매달렸다. 병사는 그를 걷어내려다 말고, 이내 차가운 시선으로 시야를 돌렸다. 군용 문서 앞에는 병사 셋이 쉴 새 없이 이름과 마을을 대조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몇 번을 되물었고, 누군가는 불려진 이름에 안도하며 천천히 안쪽으로 향했다. 소리는 분명 시끄러웠다. 그러나 사람들의 얼굴에는 왁자지껄한 흥겨움이 없었다. 눈빛은 대부분 불안했고, 말소리는 짧고 급했다. 상인들은 웃음을 흘리며 손짓했지만, 그들의 눈 아래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소란스러운 풍경 가운데, 이안 브레이트가 줄 안쪽으로 걸어 들어섰다. 목수 토마스는 말없이 그의 옆에 섰고, 무두장 제라드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안은 아무 말 없이 성벽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돌 위로 새겨진 왕국의 문양.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지 않는, 앞으로의 시간. 성문은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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