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무게

by Roda with RED

Chapter 3 – 시선의 무게

늘 그랬던 것처럼 차가운 공기, 늘 그랬던 것처럼 조용한 훈련소. 그런데 오늘은, 아무 일도 없는데도 가슴 안쪽이 묘하게 울렸다. 에일런은 아직 풀리지 않은 눈으로 군화를 끌어 신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텐트 안에는 벌써 몇몇 동기들이 정리된 군장을 옆에 두고 출발 준비를 마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말은 없었고, 아침 공기엔 기묘한 긴장감이 떠돌았다. 무릎 아래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 있는 묵직한 통증이 있었다. 어제의 훈련은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감각이 오늘을 지배하고 있었다. 리온 백부장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간결하고 냉정했다.

“오늘은 성 밖으로 나간다. 무장은 하지 않는다. 장검도, 방패도 없다. 걷는 훈련이다. 하지만 단지 걸어가는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오늘부터는 땅이 너희에게 말을 걸 것이다. 귀를 열고 들어라. 그리고 걷는 법부터, 다시 배워라.”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온의 말은 각자의 내면 어딘가에 작은 파장을 남긴 듯했다. 출발 전 정렬을 마친 대열엔, 말 없는 긴장이 흘렀다. 에일런은 고개를 들고 회색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훈련이 시작된 지 벌써 몇 주째였다. 처음에는 몸이 버티지 못해 비틀거리던 훈련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러나 그 익숙함은 그에게 위안이 되지 않았다. 오늘 아침의 준비는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걷고, 정렬하고, 기다리는 일. 하지만 에일런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같은 훈련인데, 어째서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변화는 지시에 있지 않았다. 감각보다 먼저 마음이 낯설었다. 리온이 마지막 점검을 마친 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 무표정 속엔, 그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의 침묵이 고여 있었다. 출발은 곧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였다. 에일런은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리온의 시선은 멀리 어딘가를 향해 있었고, 에일런 가까이에 선 가빈은 아무 말 없었지만, 눈빛에선 무언가 단단한 게 느껴졌다. 대열 뒤편에서 한 병사는 헬멧 끈을 조정하며 어깨를 굽혔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이 순간과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다. 에일런은 문득 자신이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단지 훈련장이 아닌, 더 먼 곳을 향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날, 칼던의 새벽은 고요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고요함이 오늘만은 조금 다르게 들렸다. 성문을 향해 걷는 발소리가 돌바닥에 낮게 깔렸다. 병사들은 두 줄로 정렬된 채, 훈련장의 외곽을 따라 조용히 이동하고 있었다. 말을 거는 이는 없었고, 발걸음조차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그 침묵은 마치, 이들이 누구의 말도 듣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성 내부는 아직 어스름했다. 회랑의 벽을 따라 걸을 때마다 낮게 깔린 햇살이 방어탑의 돌기둥을 비추었고, 그 그림자가 병사들의 어깨에 따라붙었다. 에일런은 맨 앞줄에서 조금 뒤에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지도, 똑바로 들지도 않았다. 그저 걸었다. 리듬에 맞춰, 바닥의 결을 느끼며. 익숙한 행군이었다. 무장은 없었고, 길도, 정렬도 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늘의 걸음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배어 있었다. 에일런은 그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걸음이 어색해질 것 같아 입을 닫았다. 그저 생각을 비우듯 걸었다. 길은 돌계단으로 이어졌고, 병사들의 발밑에서 낮은 마찰음이 번져 나갔다. 머리 위 높은 누각에서는 병사들이 교대 근무 중이었지만,

그들조차 이 행군을 지켜보지는 않았다. 성 전체가 이 대열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에일런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건 훈련인가, 이동인가.’

몸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어딘가에 멈춰 서 있는 듯했다. 그는 그 느낌을 오래 붙들고 있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오며, 정렬된 병사들의 움직임에 다시 스스로를 맞췄다. 지금은 걸을 시간이었다. 곧, 성문이 보일 것이다. 성문이 열렸다. 회색 돌로 덮인 지면 위로, 훈련병들의 발걸음이 조용히 이어졌다. 두 줄로 정렬된 대열은 무장 없이 걷고 있었고, 리온은 말없이 가장 앞에서 걸음을 이끌고 있었다. 병사들은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 훈련장의 구령도, 긴장된 호흡도 없었다. 다만 걷는 발걸음과 발굽처럼 반복되는 침묵이 있었다.햇빛은 아직 높지 않았다. 성문 바깥으로 이어지는 광장은 넓었고, 햇살이 바닥 돌틈에 낮게 스며들고 있었다. 돌길 너머, 광장 한쪽에는 짐마차와 나무상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장인 몇몇이 정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풍경은 무심했다. 전쟁이 아닌, 그저 하루의 일이 시작되는 풍경처럼 보였다. 에일런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들었다. 무엇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주변을 흘긋 둘러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다—그는 멈칫했다. 광장 가장자리, 아직 내려치지 못한 망치를 쥔 채 한 남자가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회색빛 옷자락, 굵은 손목, 그리고—그 얼굴. 그는 그 남자를 보았다. 어린 시절, 불꽃 사이에서 몇 번이고 올려다봤던 그 얼굴.

아니—그가 먼저 에일런을 보고 있었다. 에일런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대열의 리듬 안에서 걷고 있었고, 그 시선 안에서만 잠시 멈췄다. 이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망치를 쥔 팔에서 힘은 서서히 빠졌지만, 그의 시선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눈빛엔, 말보다 선명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을 들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았다 — 닿을 수 없는 자리에서, 닿을 수는 있었던 시간만큼. 그리고 에일런은 다시 걸었다. 대열은 성문을 지나, 외곽의 흙길로 접어들었다. 그제야 이안은 고개를 아주 조금 떨군 뒤, 손에 쥔 망치를 다시 들어올렸다. 철판 위에 부딪히는 망치 소리가 다시 광장에 퍼지기 시작했다. 에일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장면을 되새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쪽 어딘가에, 그 눈빛이 가느다란 서늘함처럼 남아 있었다. 대열에 섞여 걷고 있었지만, 에일런은 여전히 등 뒤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맴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시선은 몸에서 떠난 듯했으나, 기억 속에선 아직 물러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손짓도 없었지만—단 하나의 깊은 응시가 가슴 어딘가를 통과해, 걷는 내내 서늘한 잔상처럼 머물렀다. 대열은 두 번째 성문을 지나, 도시의 울타리 밖으로 나왔다. 칼던은 겹겹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군부대가 있는 내성벽을 지나 도심을 관통해, 이제 그들은 외성문을 벗어나 진짜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발밑은 돌에서 흙으로, 그리고 흙에서 풀잎의 냄새로 바뀌었다. 도시의 경계는 완만한 언덕 너머로 멀어졌고, 그들이 서 있던 곳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집도, 일상의 소리도 닿지 않는 자리였다.

바람이 불었다.

도시 안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조금 더 높고 깊은 바람. 햇살은 성벽 안에서보다 훨씬 넓게 펼쳐졌고,

흙냄새와 나뭇잎이 비추는 빛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풀숲 어딘가에서 작은 동물 하나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고, 저 멀리 언덕 너머에선 이름 모를 새들이 울었다. 그 울음은 바람에 실려왔고, 풀잎들은 서로를 스치며 속삭이듯 흔들렸다. 빛, 냄새, 소리, 온기. 에일런은 오래 잊고 있던 감각들에 천천히 잠식당하고 있었다. 앞줄에서 걷던 백부장 리온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언덕 너머의 능선을 훑더니, 다시 조용히 앞으로 향했다.

“속도 유지. 지형이 바뀌면 위치 조정한다.”

짧은 지시는 간결했고, 누구도 되묻지 않았다. 그는 침묵으로 대열을 이끄는 사람이었다. 대열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다시 시작된 걷는 소리는 바람보다 낮고, 돌보다 무거웠다. 에일런도 고개를 끄덕이며 걷기 시작했다. 표정엔 아무 변화도 없었고, 발걸음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뭔가 미세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곧장 앞만 보며 걸었지만, 어딘가에서 여전히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감각이 뒷덜미에 서늘하게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이 아버지라는 건,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무언가를 전하려 했다는 것도. 에일런은 알고 있었다. 그는 원래 그런 식으로 말하던 사람이었다. 말보다, 손보다, 그저 묵묵히 무언가를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에일런은 이해했다. 그 침묵 안에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다는 걸.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말로 붙잡히지 않았다. 걱정일까. 인사였을까. 아니면… 그냥 그 자신이었을까. 그 시선은 따뜻했고, 서늘했고,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그 속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하지만 동시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마치 이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덮으려는 듯 찬란했다. 하늘은 놀라울 만큼 맑았고, 멀리 이어진 숲과 언덕, 바람결 따라 흔들리는 풀잎은 그의 가슴속과는 전혀 다른 언어로 말을 걸고 있었다. 걷던 대열은 빛이 가장 환한 언덕 경사면에 도달했다. 숲과 풀밭이 맞닿는 경계는, 이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듯했다. 그들은 이제, 도시의 이중 성을 지나고 흔들리는 햇살과 긴 바람 끝에서 말이 침묵으로 바뀌는 풍경에 다다르고 있었다. 방어벽도 없고, 막사도 없었다. 그 대신 간이 천막 몇 개가 바람에 눌려 있었고, 백부장 리온은 조용히 말했다.

“정찰 전 위치 고정. 장비는 그대로. 관측만 한다.”

병사들은 숙련된 듯 천막을 펼쳤고, 몇몇은 위치를 나눠 주변 경계에 섰다. 에일런은 천막 너머, 잡초가 엉킨 작은 풀숲 근처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곳에는 나뭇잎 사이로 떨어진 빗물이 고인, 작고 얕은 물웅덩이가 있었다. 그는 조용히 앉아, 잔물결 이는 웅덩이 위를 바라보았다. 그 표면 위에 떠오른 얼굴—이마는 분명 익숙했지만, 그 아래의 눈은 어딘지 낯설었다. 그 낯선 선을 보며 에일런은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물 위로 번진 그 시선은 다시 에일런의 눈을 향해 돌아왔다. 방금 전 마주쳤던 묵직한 눈빛이 그 낯선 얼굴 위로 겹쳐 흐르는 것만 같았다. 에일런은 손을 들어, 조심스레 물 위에 갖다 댔다. 물결이 퍼지며 얼굴이 흔들렸다.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고, 그 감촉은 이상하게 무겁게 남았다. 그는 손을 거둬들이며,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마치 무엇인가를 쥐고 있는 듯한 무게. 바람이 숲가를 스치며 지나갔다. 풀잎이 흔들렸고, 저 멀리선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를 튕기며 날아올랐다. 그는 다시 물웅덩이를 바라보았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아직 훈련은 시작되지 않았지만—그 순간, 그는 무언가를 느꼈고, 그 감각은 묘하게 손끝에 남아 있었다. 말은 없었다. 손짓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눈빛은 말보다 오래 남았다. 닿지 않는 거리에서, 닿지 않는 채로 전해졌다는 건— 오히려 더 많은 걸 품고 있다는 뜻이었다. 천막 안은 조용했고, 바깥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마치 아직도 그 시선 안에 있는 듯, 미동도 없이 그대로 있었다. 그날, 나는 누군가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 안에 머물러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걸로 충분했어야 했는데— 아직도 마음 어딘가에, 그 짧은 시선의 무게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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