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

<인생>_위화

by 피킨무무


인생은 아름다워?

<인생>_위화




“소는 밭을 갈아야 하고, 개는 집을 지켜야 하며, 중은 탁발을 해야하고, 닭은 새벽을 알려야 하며, 여자라면 베를 짜야 하는 법. 그런데 너는 어째서 소 주제에 밭을 안 갈겠다는 거야? 이건 예부터 전해온 도리라고.” p.19


작품은 시골에 가서 민요를 수집하는 한가한 직업을 얻은 내가 우연히 푸구이라는 노인을 만나 오후 한나절 동안 들은 그의 기구한 인생 이야기를 담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노인의 인생담은 중국의 현대사와 맞물려가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과 문화 대혁명에 이르기까지의 당시 민중들의 모습과 사회 모습을 자연스럽고 세밀하게 묘사한다.


주인공 푸구이는 젊은 시절 지체 있는 집안의 도련님으로, 항시 제 발로 걸어 다니지 않고 남의 등에 업혀 이동할 만큼 구제 불능의 한량으로 살다 급기야 도박에 빠지게 된다. 아이를 임신한 채 도박을 그만두게 하려 자신을 설득할 요량으로 찾아온 아내를 구타하여 내쫓을 정도의 망나니였던 그는 결국 모든 가산을 한순간에 날린다. 그 충격으로 인해 그의 아버지는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고 화가 난 장인으로 인해 아내 자전마저 그의 곁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아들 유칭을 낳고 다시 푸구이의 곁으로 돌아온 자전, 천진한 딸 펑샤와 함께 “사람은 즐겁게 살 수만 있다면 가난도 두렵지 않은 법”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열심히 삶을 살아가 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였을 뿐, 되지도 않는 싸움을 하다 국민당군에 끌려가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된 푸구이는 국민당군과 해방군 사이의 전쟁에서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하여 2년 만에 귀향한다. 그의 부재 동안 열병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농아가 된 펑샤와 어머니의 죽음 이후 홀로 두 아이를 부양하며 힘겹게 살아온 자전과 재회한 푸구이는 공산당의 토지개혁 아래 농민으로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어이없는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고 시집간 딸 펑샤도 아이를 낳다 죽었으며, 아내 자전 또한 평생 고생만 하다 병으로 세상을 뜬다. 그뿐인가, 사위 얼시와 손자 쿠건도 차례대로 잃게 된 푸구이는 자신과 닮은 늙은 소를 사다 자신의 이름을 붙여주며 홀로 밭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엔 빈둥거리며 놀고,

중년에는 숨어 살려고만 하더니,

노년에는 중이 되었네.” p.283


그는 인생의 고통을 감내하고 황혼에 이르러 운명에 달관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살아남는 것이 예부터 전해오는 도리리라 생각하면서.


이야기의 끝부분에 이르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이 오버랩되는데 이는 격동의 역사 속 과거를 회상하는 늙은 스티븐스의 모습이 왠지 푸구이 노인과 닮아 보여서다. 물론 <남아있는 나날>은 무지한 개인이 어떤 식으로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가를 보여주고, <인생>은 반대로 역사가 어떤 식으로 개인에게 고통을 주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결이 좀 다르긴 하지만, 스티븐스의 자기기만 및 합리화와 푸구이의 운명에의 받아들임이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는 거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지나온 시간을 참회하거나 분노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나, 그저 남은 황혼의 인생을 그대로 살아갈 뿐.


생각해 보건대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가 아름답거나 숭고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푸구이의 인생역정이 상당 부분 그가 자초한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가 "살아낸" 인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차라리 자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면 어땠을까? 혼란한 역사와 전쟁 속에서 최약자는 어린이와 여성들이다. 그러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라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면 주인공을 바꾸는 것이 좋은 방법 아니었을까. 물론 이야기의 엔딩도 바뀌길 바란다. 가령 내내 묵묵하게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온 자전이 엔딩에서 한바탕 칼춤을 추길 소망한다. 물론 그렇다고 바뀌는 것은 없겠지만 그저 순응하는 것만이 인생의 미덕은 아니라고, 무용한 칼춤도 때로는 유의미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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