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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킨무무 Jul 26. 2024

의식의 흐름 기법을 차용한 근본없는 독후 주절거림

<싯다르타>_헤르만 헤세, 문예출판사






"실로 세상에서 이 자아만큼 내가 생각에 몰두하게 만든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살고 있다는 이 수수께끼, 나는 모든 다른 사람들과 유리되어 구별되는 한 개체라는 수수께끼, 나는 싯다르타라는 수수께끼처럼 나의 생각을 사로잡은 물건은 없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나 싯다르타에 대해서만큼 나 자신이 거의 알지 못한 물건도 없다!"p.55


자아탐구를 작품의 목표로 걸었던 헤세에게 범신론적 세계관에 가까운 동양철학은 깨나 매력적인 학문이었음이 틀림없다.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신을 따르고 사랑하면 되는 기독교와 달리 불교는 각자의 내면에 신이 이미 앉아있다고 믿으며 그을 찾기 위해 홀로 수행을 한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해탈이란 그러한 수행을 통하여 마침내 자아를 깨치고 자신과 타자의 통합을 이루며 나아가 세상 모든 것과 단일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차이가 유독 헤세의 많은 작품들 중에 서양독자들이 <싯다르타>를 최고로 꼽는 까닭이지 않을까. 자신들의 사고체계와 전혀 다른 동양철학의 신비로움으로.


""스스로 삶을 살고, 스스로 업보를 짊어지고, 스스로 쓰디쓴 잔을 마시고, 스스로 자기의 길을 찾으려는 것을, 어떤 아버지가, 어떤 스승이 막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당신은 그 누군들 이 길을 걷지 않고 살아갈 자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친구여, 혹시나 당신의 어린 아들만은 당신이 사랑한다고 해서, 당신이 그 애의 번민과 아픔과 실망을 덜어주고 싶다고 해서 그것이 가능한 줄 아십니까? 비록 그 애를 위해 열 번씩 죽는다 한들, 그것으로 당신이 그 애의 운명을 손톱만치라도 덜어줄 수는 없습니다.""p.153


그러나 검댕을 얼굴에 묻혀 보아야 소셋물의 소중함을 알 수 있고, 똥인지 된장인지도 직접 찍먹해봐야 깨달을 수 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이 불교의 대표적 꽃인 것처럼, 고통과 슬픔 역시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하다. (<인사이드아웃>에서 슬픔이가 최애! 그녀가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엉망이 되어버린다구!) 사랑하는 이에게 기쁨만을 주고 싶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이의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을 뺏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각자는 각자만의 길을 가야한다.


"이 돌은 돌이요, 이 돌은 또한 동물이요, 또한 신이요. 부처라고. 내가 이 돌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언젠가 이 돌이 이런 또는 저런 물건이 될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돌은 태초부터 영구히 그 모든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돌은 돌이며 이 날 이 시간 돌로서 내 눈에 비친다는 것,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돌을 사랑하네."p.182


사실 동양인의 입장에서 <싯다르타>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는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따라서 딱히 새로운 감흥이 일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다 아는 사람들이구먼' 이명박 짤을 붙여주고 싶다.) 그러나 어떤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는 너를 사랑한다는 구절은 뭔가 뭉클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돌 이야기가 나왔으니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허무주의에 빠진 딸이 다중 우주 속에 절대빌런이 되어 자신을 포함하여 세계를 파괴하려 하고 엄마가 그것을 막고자 하는 내용이다. 여러 가능성의 세계 중에 돌멩이 세계관도 존재하는데 영화 내내 가장 정적이면서 가장 압도적이다. 영화 속에서 엄마와 딸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러했듯, 어떤 시공간 속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만나든 그 모든 존재는 우리 자신이었고 우리자신이며, 또 우리 자신일 것이다. 그러니 역시 지금, 내 우주에 있는 당신을 나는 이유 없이, 그리고 하릴없이 사랑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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