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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킨무무 Jan 05. 2024

위선으로 얼룩진 인간의 숙명

<휴먼 스테인>_필립 로스





"우리는 오점을 남긴다. 우리는 자취를 남기고, 우리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불순함, 잔인함, 학대, 실수, 배설물, 정액-달리 이 세상에 존재할 방법이 없다. 불복종과는 상관없다. 은총이나 구원 혹은 속죄와도 상관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 존재한다. 내재되어 있다. 타고난 것이다."p.69_2권


이 작품은 마치 패이스트리 파이처럼 여러 겹의 겉이야기와 속이야기로 나누어져 있다. 우선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로는 일흔 한 살의 존경받는 노교수이자 성공한 대학장인 콜먼 실크와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서른 넷의 대학 내 청소부 포니아라는 여자와의 염문을 다룬다. 이 역시 또 한 번 겉층과 속층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는데, 화자인 네이선이 보는 콜먼의 속이야기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진 소년같은 그의 모습으로, 절망 끝에 되찾은 삶의 희망처럼 보이지만 겉으로 보기엔 노망난 노인과 문맹의 백인여성의 '부적절한 관계'일 뿐이다, 마치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관계처럼.


어이없는 이유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불명예의 나락으로 떨어진 콜먼의 절망적 노년에 다시 한 번 정열의 불빛을 당겨 올린 것 같았던 그의 연애가 위기에 처한 것은 그의 추문을 고발하는 익명의 편지로부터 시작된다. 동시에 독자는 콜먼의 숨겨진 또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바로 이야기의 첫 부분에 유대계 백인으로 설정되어 있던 콜먼의 정체성이 사실 피부색이 엷은 흑인이었다는 반전이다. 활자로 상상하며 구성해왔던 캐릭터가 송두리째 재조립되는 순간이다. 그는 자신이 흑인임을 철저히 숨기고자 가족과의 관계마저 끊고 백인이 되어 원하던 사회적 성공을 거머쥔다. 이 시점에서 그가 받았던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해는 오해가 아니게 되는 아이러니가 일어난다.


본인이 흑인이면서도 흑인을 차별하는 용어를 썼다는 이 우스운 상황에서, 그럼에도 정체를 밝힐 수 없기에 오해를 풀 수 없게 만드는 그가 선택한 인생의 굴레. 또한 흑인의 정체를 버리고 완벽한 백인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그야말로 급진적인 백인우월주의자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여기까지만이라면 미국사회가 가진, 인종에 따른 차별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노라고 자위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거짓이 또다른 거짓을 낳는 것처럼 한 번 시작된 기만은 멈출 수 없다. 아내 아이리스에게는 속죄의 기회가 있었으나 그녀가 죽을 때까지 평생 거짓말로 기만한 것이며, 그의 아이들에게는 백인으로 태어나냐, 흑인으로 태어나냐의 확률적 도박을 건 셈이지 않은가. 완벽한 백인으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환희하면서 그의 인생도 완벽해지는 것 같았으나 결코 내면의 얼룩을 고백할 수 없었고 종래에는 그것으로 인해 파멸하고 만다.


그뿐인가, 콜먼의 연애상대였던 포니아와 그의 전남편 레스터, 콜먼을 고발하는 루 교수 역시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와 감춰진 속이야기가 매우 다른 반전의 인물들이다. 남성중심의 사회 속 희생자로 보였던 포니아의 인생은 거짓말로 점철되어 있으며 폭력적인 난봉꾼 레스터는 심각한 외상증후군에 시달리는 베트남전 참전용사이다. 애초에 페미니스트라 생각하여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생각한 루 교수의 실체 또한 처음 생각했던 인물과는 전혀 다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유구한 속담이 말해주듯이, 사람은 애초에 오점과 얼룩 투성이의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살 수 밖에는 없나보다. 그것이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스캔들처럼 우연히 겉으로 드러나느냐 혹은 드러나지 않느냐의 문제 일 뿐.


작품의 마지막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고요하게 얼어붙은 호수에서 얼음낚시를 하고 있는 고독하고 평화로운 레스터. 하지만 얼음 밑의 물은 끊임없이 뒤집어지고 그의 속마음은 불같은 분노로 가득하다. 이처럼 보이는 이야기와 실제 이야기의 간극은 인간의 생이라는 소설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숙명같은 것이려나. 그러나 그 간극의 넓이란 콜먼의 삶이 보여주듯 가진 위선과 욕망에 비례하는 것이니 지금이 바로 그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진짜 우리의 이야기에 귀기울여보아야 할 때다. 완벽한 삶? 애초에 그런 것은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사람이 인생을 통제한다해도 그 정도인 거죠.""p.212_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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