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한때 찢어버리고 싶었던 청년이 쓰는 글
예배라는 그것은 목적을 수반하기에, 목적을 닮고자 하는 인격이 그것을 위해서 하는 학생으로서 나의 이름과 나의 값을 주고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성도가 보는 교회의 목적
또 교회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
교회가 지쳤던 이유
교회가 구식인 이유와 구식이어야 하는 이유
하지만 그럼에도 갈 수 있는 희망에 대해서 다뤄볼 것이다.
교회의 불편함은 결국 페르소나다. 페르소나, 칼융이 말한 페르소나는 역할이다.
그것에 대한 인지가 잘 안 되니까 불편한 곳이다.
결국 교회에서의 불편함이란 이와 같은 것이다. 예배에서 듣게 되는 페르소나, 그리고 설교자,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당해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설교자이다. (강사, 목자와 같이) 즉 대표로서 있는 것처럼 있는 것이다. 김창옥과 같은 강연자와 유사한 것이다. 페르소나에 대한 분리가 되지 않는 것, 역할에 대한 분리가 되지 않는 것이 어려운 점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 그리고 페르소나가 즉 자신이라고 생각을 한다.
(예 : 나는 어머니다!!! )
특히 사람들은 페르소나의 팽창과 영향력에 대한 생각만을 하느라 자신의 삶이 이 자리에서의 역할 그리고 페르소나 등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만다. 페르소나의 팽창 그리고 자아의 팽창은 이미 이루어져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을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형제와 자매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자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나의 아름다움, 즉 나의 페르소나라는 것을 크게 여기고 자신이 예를 들어서 이 자리에서 쓰임을 받는 자신의 모습과 페르소나를 통해서 소통을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내가 설교도 하고, 설교를 할 생각을 가지고, 서고자 하는 것도 정하는 등과 같이 말이다. 사람들에게 친숙함이라는 마케팅, 즉 자신의 얼굴과 친숙함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자신이 마땅한 질서를 갖추지 않은 상태로 그러한 예배와 같은 것을 드리고자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페르소나에 대한 비대가 과해져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아는 형, 그리고 대단한 사람, 그리고 대단한 페르소나를 즉 자신이라고 말을 하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있는 듯한 사람을 보게 될 때의 문제와 모순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나도 그와 같이 마냥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나도 콘서트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세상에 커 보이는 이들로 인해서 말이다.
이 시대의 문제점 중에 하나는 바로 일상인들도 연예인 같아야 하고, 유명해져야 된다는 일종의 전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유명이란 기능에 대한 달성에 대한 부분이 컸었다. 아니면 축제의 제사장, 종교 지도자라던지.
하지만 근대에 와서는 외적 아름다움, 세련됨 하나만으로 누군가가 스팟라이트에 올라와 그것이 상품화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근육질 흑인 요리사? 오케이! 한국에서 홍보해.
드립치는 흑인인데 한국말 잘하고 친근해? 오케이! 그걸로 프로그램 만들어!
유명가수 춤을 만들었던 아티스트? 그리고 한국말 잘해? 오케이! 콘텐츠 만들어!
콘텐츠에서 강조하는 부분은 노는 모습,
놀면서 먹는 모습, 즉 즉각적 요소에 대한 부분이 강조가 되기에 그것에 대한 궁금증 등으로 말미암아 뇌는 환상에 빠지고 편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더! 더! 를 외치게 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조회수, 즉 사람들이 들락날락한 횟수가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 교회나 일반 사람들의 시선에 있는 영향력에 대한 방향이다.
슬프게도 모두가 아무것도 안하면서(?) 나름 멋있어지기를 원한다. 여전히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상을 우러러본다. 우리 목사님, 우리 교회가 세상의 뉴스에 나오면, 세상의 '유 퀴즈'에 나오면... 세상에서 욕구에 따라서 춤을 추고 욕구에 따라서 유명한 것들, 그리고 성적 충동을 끌게 되는 것을 보게 될 때 그것을 자극받아 그러한 무대에 자신이 서기를 원한다.
그러면 그곳에서 자신을 생각하고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받은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인간의 뇌가 감당할 수 있는 진정한 관계는 단 5명뿐입니다. 던바와 하버드 연구가 증명하듯,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힘은 수만 명의 박수가 아닌 ‘나’ 자체를 수용하는 소수의 밀도에서 나온다.
하지만 현대인은 SNS의 ‘좋아요’가 만드는 사회적 환각에 속아, 타인의 일시적인 관심을 관계라 착각합니다. 유명세란 필요에 따른 ‘소비’일 뿐, 위기의 순간 당신을 지켜줄 진짜 세력이 아니다. 허상의 숫자를 쫓으며 곁의 소중함을 잊는 것은 진화의 오류이자 스스로를 정서적 영양실조로 모는 일이다.
하지만 세상은 영향력과 쓰임, 그리고 스포트라이트라는 그런 이상한 것에 중독되어 있다. 자꾸 유명한 사람은 세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미친 소리를 한다.
세상에 영향이 뭐 중요한가, 그 영향이 좋은 영향이 아니라면.
하지만 여전히 사람은
돈을 숭배하고
교육을 숭배하고
지식을 숭배하고 그 안에서 평안을 찾기를 구하는 것이다.
영향력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목적이자 질서, 즉 합당한 페르소나이다.
페르소나는 표현의 수단이자 언어, 즉 껍데기이자 도로(나를 표현하는, 차들이 지나가는)에 불구하다.
그 도로와 곧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것은 바로 나는 가지, 그리고 그(그리스도)는 포도나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나는 소유를 통해 소속감 혹은 존재감을 확인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교회 목사는 정치적으로도 뛰어나고.. 등등 이런 것이 바로 페르소나의 팽창이다. 당신과의 관계가 아니다. 다만 뇌는 관계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
연예인이 사용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하는 직업(음악)을 넘어서서 인지도와 유명세를 이용해, 광고부터 시작해서 예능 그리고 먹방까지. 이것이 바로 페르소나의 팽창, 자아의 팽창이다. 목사도 정치계에 뛰어들 수 있다. 다만 그에 대한 확실한 전제는, 그것은 그저 역할에 불구하다라고 분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을 보는 성도들은,
우리 목사님 대단해! 가 아니라.
000이라는 형제는 지금 사회적으로 이런 역할을 잘 감당하고 계셔. 나는 내 역할과 사명을 해야지. 와 같은 방식으로 사고를 하는 것이 칼융에 의하면 바람직하다.
그렇기에 자신의 높임, 권위와 권력에 대한 핑계로 자신이라는 자아를 마케팅해서, 우상과 연예인을 만드는 것이 교회 안에서 진행이 된다면, 그러한 영향력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고,
만일 그러한 숙고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것을 시청하는 사람들은 곧 나의 마음에 우상을 품으며 자신의 삶을 비천하게 여기는 사고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클릭)
나는 나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몸의 일부다. 그것도 머리가 그리스도인 몸의 일부 말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가치이다.
그 안에서 나의 목적과 쓰임은 추후에 따라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가짜 속눈썹이 쓰임이자 능력, 영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없던 것, 우리 몸에 속하지 않은 것 같은 새로움 말이다.
유명하든 안 유명하든 유행이라는 것은 지나간다. 하지만 목적을 다하고 있는 사람은 이 세계와 몸으로서 일을 한다. 사실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등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자꾸 로마 콜로세움의 용사가 되기를 원한다.
나 자신의 페르소나와 그리고 자신은 로마, 그리고 콜로세움 안에서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러한 역할을, 역할에 대한 우상화를 위해서 자신의 언변과 설득력만을 갖추기를 원했지만, 진정으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부분을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다.
나는 진정으로 누구인가? 그 화려한 무대에서 나는 누구인가?
예수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었는가, 질문해 보게 된다.
한 번은 교회 모임이었다. 그곳에서 냄새나는 사람이 있다고 모두 미워하고 피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교회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와 대화를 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그게 교회라는 곳의 기능이자 역할이기 때문이다.
교회 모임의 주목적은 섹시함과 탱탱함이 아니다. 교회의 목적은 바로 구원이자 죄사함이다. 야식과 땡땡이가 교회 모임의 목적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어땠는가. 사도바울과 많은 사도들은 콜로세움에 용사로서 선 것이 아니라 사자의 밥으로서, 즉 소금으로서 선 것이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 맞다. 다윗은 고백한다. 그는 왕이 되는 것보다 문지기가 낫다고 생각을 한다. 그는 그 스스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자신의 존귀함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페르소나이자 자신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 그리고 그것 자체가 한 영혼의 고백이라는 것이다.
그런즉 나의 페르소나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대부분의 공동체에서는 개인적 친목을 조장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적 친목에서는 페르소나와 방향성을 고려하고 관계를 기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모임과 만남에 있어서 보고를 하고 만나는 것이고, 보고되지 않은 만남 혹은 연애가 허락되지 않는 이유 또한 같은 이유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질문한다. 나의 페르소나는 무엇인가?
그렇기에 교회에 가서 내가 배우고자 하는 것은 그룹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소속되기 위해서 그러한 말과 그러한 기준을 위해서 열심히 학원을 다니는 것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속해있는가와 같은 생각을 할 때 그것을 위해서는 바로 그곳으로 속하고 그곳으로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자리에 나는 한 명으로서 존재하고 참여하고 하나의 몸이 되며,
소금이자, 말씀을 나누기도 하지만, 받기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숙명인 것이다.
그 대단한 사도바울, 그 유명한 사도바울마저,
그는 형제자매에게 격려를 받았다고 말을 하고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줄 때도 있지만, 받고 깨우침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왜 학원에서 취업이라는 기준을 위해서 선생에게 배우고 유익한 부분을 서로 나누고 궁금해하면서,
그리스도의 경주를 위해서 왜 주변에 묻고, 배우고 혹은 누군가에게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꺼려지는가?
뒤에서 말을 할 것이지만, 교회가 꺼려지는 이유는 바로 페르소나의 희석에 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
마찬가지다. 나의 삶 가운데 내가 경험한 3D 취업계만이 아니라 그것을 나누기 위해서 커뮤니티가 존재하는 것과 같이, 내가 스스로 내가 무언가를 한다고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가? "저기 가도 괜찮은가" 등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것은, 마치 내가 취업을 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3D를 배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기술을 배우는 것의 이유는 바로 사용하기 위한 것에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은혜를 나누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는 것의 일부이자 그 목적 중에 하나는 바로 내가 하나님 앞에 나누는 것, 그리고 교회에 가야 하는 것, 그러한 소통이다. 실제적으로 나누고 실제적 영향이 중요하다.
콘텐츠가 개발이 되어서, 누군가 나누는 모습과 회복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감정적 치유이자, 내가 무언가를 한 것처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행한 것이 아니다. 배웠다면 행해야 한다. 마치 회사에서 튜토리얼을 통해 기술을 배웠다면, 그 기술을 사용해서 회사를 발전시켜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콘텐츠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곳은 곧 자신의 불만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역할 혹은 자신이 있어야 하는 자리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목적이 없이 서로 친하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특히 청년 때 있는 커다란 생각 중에 하나는 영향을 가져서 친하게 지내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 또한 하게 된다. 그렇기에 목적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그저 친해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상 자신에게 있는 목적이라는 것이 있으면 친해지고 서로 대화를 하는 행동이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나누기 시작할 때 "나와 친해지고 가까이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아서라고 한 것과 같이 말이다. 친해지는 것. 실제로 가까이해야 하는 사람은 몇이나 있는가? 대중 미디어의 폐해로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다. 대형교회의 폐해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이 사람과의 개인적인 친밀감 혹은 실천에 대해서 잊는다.
그것이 바로 외부 혹은 거대한 누군가의 자아로 인해서, 나의 책임과 내가 소금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나의 삶이, 외부 자아의 팽창으로 인해 다른 빛나는 것에 자신의 자아와 존재감을 놓는 것을 뜻한다.
나로 예를 들자면,
나의 글을 30만 명이 읽었다고 치자.
그러면 더 이상 스스로를 최-0-0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30만 독자 최-0-0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브랜드에 대한 명사이지, 결코 개인의 정체성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자 칼융은 집단적 부적이라고 말을 한다.
집단적 부적(Collective Amulet)의 구매라고 부르고 싶군요. 내면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 외부의 권위를 빌려오는 것입니다.
내면이 빈곤한 개인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강력한 집단이나 인물에게 소속되려 합니다. 이때 그들은 집단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착각하는 자아 팽창을 경험하지요. 자네가 말한 부적은 스스로 빛날 수 없는 자들이 남의 빛을 빌려 쓰기 위해 지불하는 정신적 월세와 같습니다. 하지만 빌려온 권위는 결코 내면의 공허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먼저 인지해야 할 것은 나의 삶에 얼마나
그러한 ‘영향력’ 등에 대한 말로 인해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몸이 되는 것 그 자체만으로 멋지고 대단한 일인지.
또 나의 삶에 여러 페르소나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또 살아내기 위한 도구에 불구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글 또한 마찬가지다. 이는 나의 거울이지, 빛이 아니다.
율법은 거울이다. 옳은 것을 아는 것, 아니면 세상의 견문을 넓히는 것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또 그 구원을 나누고 서로 혈액이 공급되고 서로 엉겨 붙는 곳을 바로 교회- 다른 말로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더 대단한 사명,
혹은 내가 있어야 할 다른 구원의 제단 및 영향력은 없다.
내가 어느 곳에 가서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페르소나에 맞는, 그리고 그러한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저 역할극이자 가면극에 불구하다.
이 세계는 개인을 속여왔다.
‘Be Like Me’
나와 같이 되어라라고 늘 외치고,
광고하고,
그것을 본 이들은 세뇌가 되어,
이 잠시 뿐의 문화에 불구한 것임에도
눈 돌아가서 그것에 속하려고 한다.
그것은 나의 소설 ‘무지갯빛 개구리’에서 표현했다.
황금빛 무대를 이제 그만 동경해야 한다.
특별함, 대중성이 정의이자 빛이라고 말하는 거짓말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곳에서 나눌 것에 대한 목적이라는 것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의 영이 고백을 하고, 그리고 그 은혜에 대해서 서로의 죄인 됨과 하나님이 주인 됨에 대해서 나누는 것이 바로 교회의 목적이다. 그렇기에 교회는 목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교회의 공간은 함께 우리가 나누고, 그리고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정보를 나눔으로써 그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에 있다.
앞서 말했듯이 페르소나는 필요하다. 그리고 페르소나의 적절한 활성화와 사회와 공동체의 기여를 위해서는 그를 기반으로 한 질서라는 것이 필요하다. 그 자유의 땅 미국도 나름대로 예배 순서는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을 하던 마땅한 질서라는 것은 필요한 것이다.
학원에서도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 강사님 말을 듣는 질서를 따르면서,
질서는 필요 없다! 자유하자!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말자! 쾌락을 즐기자!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그러한 질서에 대한 범함이라는 것이 다가오기 때문에 가장 큰 문제가 오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회와 질서에 대한 역겨운 거부반응은 바로 질서의 침범, 페르소나의 팽창등으로부터 찾아오는 불편함이다.
그렇기에 교회에서도 질서라는 것이 망가지는 이유도 그러한 것이다. 질서에 대한 부분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할 때 관계라는 측면과 그리고 권력과 가르침이라는 부분을 동시에 하기 때문에 그것은 침범이라는 것이 되는 것이다.
결국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진정으로 가족을 위해서 보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기도하는 어머니 생각하면 저런 사람이 그 기능에 대해서, 기능을 위해서 위치를 조절하고 그리고 법칙과 질서를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페르소나 바깥으로 나아가서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것을 음욕(또는 오용)이라고 부른다. 사적으로 보자고 하다던지, 밀접하게 갑자기 운동을 하자고 하자던지 말이다. 그런즉 나는 나의 페르소나를 잘 단련하기 위해 나의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만일 나 자신이 교회의 대표로서 살아가는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면, 바로 자신은 배우고자 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가치에 대해서 나누고 선포하고자 하는 것은 곧 나의 특별함을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의 몸으로서 이 자리에 오는 것이고, 역할이라는 것, 그리고 직분과 용도란 곧 나의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예수님을 담는 그릇이자 가지이자 주님의 교회로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물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등에 대해서 생각을 할 때, 다른 사람의 페르소나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같은 인격으로서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 고로 나의 모든 행동, 심지어 질서 혹은 페르소나 바깥의 사적인 행동도 특별하니 잘 받아먹어라.
이렇게 생각하다 망한 유명인들이 한둘인가.
목사가 되는 것은 그러한 부르심과 전공을 선택하는 길과 같은 것이다. 목사는 전공이자 페르소나이며 역할이다. 전공에 대한 것은 결국 그러하다.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 어려울까 목사가 되는 게 어려울까. 수치상으로 봤을 땐 일단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목사가 될 사람은 많은데 국가대표가 되는 게 더 어렵다.
레위인은 특별한가? 그렇다. 거룩하고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역할은 역할이다. 결국 온몸이 중요하다.
목사의 권위의 추락을 막기 위해서 애쓸 필요 없다.
학원에서 강사의 말을 듣지 뭐 어떻게 하겠는가.
하지만 질서에 대한 존중 속에서 인정할 것은 이것이다.
나도 성도이고, 당신은 목사이다. 그리고 나는 질서와 목사의 역할을 존중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학원에서 학생을 존중이라도 하는데,
목사는 성도를 과연 존중하는가? 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학원은 학생의 잘됨을 위해서 개인 시간에 놀자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목사가 성도 개인을 자신이 부르면 언제든지 와야 하는 대상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러한 페르소나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것이다.
회사는 직원을 위한 복지가 있고, 직원의 안전을 위해 국가에서 안전을 책임지고 절차라는 것이 있다.
근데 교회와 목사가 그러한 복지 혹은 성도의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다?라고 한다면,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은 페르소나와 역할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강사는 신이 아니다.
목사도 신이 아니다.
강사는 역할과 책임이 있다.
목사도 역할과 책임이 있다.
이와 같이, 올바른 질서 속에서 어우러지고 빛이 나는 것이 목사라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질서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안타깝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 또 목사 혹은 강사의 권한과 책임, 또 그들의 연구와 성장, 배울 점 등을 알고 질서를 지키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말을 한다.
교회가 불편한 이유는 바로 그러한 책임과 역할, 권한에 대한 뚜렷한 경계를 누군가 훼손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교회 안에서 모두가 형제다. 하지만 각자의 역할에 의한 뚜렷한 질서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의 역할은 바로 공동체원 전부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목사도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질서와 up down은 일처리를 위해서 존재한다. 하지만 일이 없는데 여전히 up down을 강조할 이유가 없다. 그런즉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강사이자 교회의 방향을 지도하는 리더로서 그 품격 및 페르소나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의 개인적 삶, 가정 또한 지켜야 한다.
성도는 목사를 친구처럼 대해서, 그 페르소나와 기능을 무너뜨리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강사와 학생은 친구가 아니다. 강사에게는 현실적이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목사라는 역할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성경 속 사도바울 또한 사도라는 직분에 책임이 담긴 것이지, 스스로 원하는 데로 룰루랄라 한 것이 아니다.
교회의 질서에 대한 불만은 바로 내가 나 스스로의 페르소나를 확정하고 선을 긋지 못한 나의 잘못과 무의식의 모른다는 어리석음이 첫 번째이다. 먼저 내가 알았어야 한다. 교회는 놀러 오는 곳이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공동체이다.
학원에도 놀러 가지 않는데,
교회에 내가 말하고 싶고, 내가 사귀고 싶은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간다?
그것은 불편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서로 나누기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교회를 너무 쉽게 물로 보지 않았는가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목사를 이렇게 생각을 했다 ( 이 글에서 목사님을 목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비신자도 글을 읽기 때문이다. 나는 스님도 스라고 했을 것이다 ) 목사 = 형제 그러니까 편하게 지내자.
그렇게 생각하면 나만 상처받는다.
학교 선생님이랑 친구 먹으려고 하면 손해 보고 무례한 쪽은 나다.
목사는 형제이다. 하지만 목적과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수행관이다.
그렇기에 만남, 혹은 상담을 신청하는 것에 있어서도 절차를 따라서 합리적 목적에 따라서 상담을 받는 것이 옳은 것이다.
내가 이렇게 딱딱하게 이야기를 하지만, 목사님들은 실제로 처음 온 사람들을 반겨주신다. 하지만 이 글은 조금 더 자신의 생각이 깨어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는 글이기에 단어도 목사 그리고 역할의 관점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역할은 중요하다.
나는 존재 자체로 빛나기에 질서는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예수님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뭐 하러 예루살렘에만 질서를 지켜서 만났는가.
예수님은 뭐 하러 자신이 보내심을 받은 이에게 보내심을 받은 방법으로 이야기를 하는가.
그는 뭐 하러, 사람들이
‘예수님, 예수님도 유행하고 유명한 곳에 가서 기적을 행하세요! 인풀루언서가 되셔야죠!’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아직 내 때가 아니다’라고 말을 했겠는가.
왜 구원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질서를 따랐겠는가?
그래서 이 글은 말하는 것이다.
제발 질서를 생각하자.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너는 입을 다물고 홀로 죽어라’라고 들릴 것이다.
그래. 나는 안다. 2-3년간 죽고 싶다고 자살하고 싶다고 교회에서 몇 번이나 터져라 외쳐도 ‘질서’라는 핑계로 누구도, 단 한 명도 나를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홀로 죽어갔다. 나의 피 묻은 머리는 화장실 바닥에서 홀로 있었음을. 그 죽음과 지옥은 지금도 내 안에 새겨져 있다.
그래 나는 공감한다. 이 글의 저자는 진심으로 공감한다.
교회를 찢어버리고 싶은 그 마음을.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병원을 찾으라고 말을 하고 싶다.
학원에서 내 고민 상담해 봤자, 학원은 가르치는 곳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교회는 다 각양각색이다.
어딘가는 병원 형식, 강의장 형식, 다 목적과 형태가 다르다.
근데 어쩌면 당신은 강의장에서 ‘왜 나의 힘듦을 무시합니까!’라고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맞는 교회를 찾아서, 필요한 것을 질서에 맞게 보충을 받아라.
물론 그 영광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해 자신이 낮아지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이후에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가 등에 대한 생각. 서로 사랑하고 시간을, 그리고 마음을 나누는 것들에 대해서 말을 하는가 아니면 역할에 대한 것인가 등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기관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내가 교회에 나가는 목적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영향력이라는 키워드로 인해서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면 사람을 주는 것이다 등을 생각하지 말고, 자신은 자신의 페르소나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되, 나는 그곳에서 나 스스로 형제로서 존재해 주는 것만이 목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페르소나 혹은 목적을 손뼉 치며 그것을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기피하고, 그러한 교회에서는 기피해야 할 목적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예배를 통해서 나의 삶 가운데 다가가는 것, 그리고 은혜를 나누는 것 등 여러 가지 은혜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 때 각자마다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건강하지 않고 결국 외면받게 되는 교회는 바로 현실과 현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부분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페르소나와 그리고 나의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자기 가지이자 내가 그 안에 있는 것은 그 두 가지에 대해서 그것들은 별개라고 분명히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세상에 연예인 혹은 성자란 없다. 세상에는 역할이 필요한 것에 불과했고, 예수님은 존재이자 그리스도라는 페르소나, 즉 역할을 이행하려 하였다. 그는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순종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것과 같이, 나의 삶에서의 나 또한 나의 일을 하고 또 준비하고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뜻이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을 하고 마치고 싶다.
더이상의 자아팽창은 그만두어라. 우상을 버려라.
그리고 오직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로서 만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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