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금, 보험 등. 나는 모든 것을 다 챙기니 난 잘난 외로움쟁이야.
이 글을 읽는다면,
나의 연약함을 알려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득이 될 것이다.
연약함을 알리라고?
이것보다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고 현대사회에 생각이 들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가면, 명함 뒤에 자신의 조그마한 오차라도 숨기고,
자존심이라는 목도리를 매고, 자신이 껍질을 전부로서 여기며 살아간다.
즉 자아의 팽창이다.
하지만,
인간은 소통하고 상호작용하는 존재이다.
상호작용, 즉 인간관계의 전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주거니 받거니' 이다.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보살핌만 필요한 삐약이가 되고 싶지 않아 한다.
영향을 주기를 원한다.
누구나 성장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전문성을 자신의 위치에서 잘 길렀다면,
나 또한 다른 사람의 전문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 말은 즉, 누군가 그리고 나 자신도, 나의 필요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알려야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남을 돕는 것처럼,
남들에게도 도움을 받을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각자의 개성과 잘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대 의인의 모순은,
주기만 하고, 받을 필요가 없는 완벽한 의인을 꿈꾼다는 것에 있다.
더 이상의 조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 로마의 네로 황제와 같게 되기를 원한다.
도움받지 않아도 되는 그런 완벽주의 말이다.
심리학자 칼융은 영웅상은 페르소나 그리고 자아의 팽창이라고 말을 한다.
그 말은 즉, 자신 내면에 있는 자신이 영웅이 되고 의인이 되어 그 행위를 통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재 세상에는 '영웅상'에 대해서 격려가 되는 상황이다.
작은 잘못도 없지만, 능력 있는 것이 곧 성공이라고 말을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셀프로 뭐라도 해볼라고 노력을 한다.
남의 실력 혹은 헌신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기에, 요리부터 시작해서, 다 스스로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결과, 삶은 외롭고도,
자신의 시간과 재능도 관리되지 못한채 꽉꽉 차버린 느낌이다.
돈, 외모 등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영웅'이라고 특권을 주는 의식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사람들은 슬며시 마음속에 생각한다.
'완벽한 사람이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질병이 될 위험이 크다.
크리스천의 병 중에 하나는 바로 서로를 통해서 배울 점이 없다는 것이다. 자존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옳다는 방식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에게도 질문해 보게된다.
내가 특정 계층 혹은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이들과 소통할 필요조차 없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건 아닐까?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나눌 생각을 하지 않고 내 스스로에게, 언젠가 완벽해진다면 도우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고립되어 있는게 아닐까?
그런 선생과 같은 자는 이러한 모습을 보인다.
같은 공동체에 있더라도 누군가의 의견을 극도로 배제하려고 한다.
팔짱을 끼고 콧소리를 내면서 의견을 듣는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한다.
특정 계층의 사람 혹은 일반인의 의견은 비천한 것이라고 여기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렇기에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부인하고, 모든 것을 그림자로 여긴다.
자신의 실수, 혹은 어린 자아의 표현하고 싶은 예술성 등까지,
모두 효율과 완벽이라는 선생 앞에 무릎 꿇린다.
그렇게 나의 마음이자, 나의 일부이자,
나의 존재는 끊임없이 사회의 집단적 페르소나에,
또 스스로의 재단 앞에서 마구 연단질을 당하며 비판을 당한다.
그래서 누가 자신에게 조언을 준 이유만으로 상처를 받기도 한다.
자존심 상해 한다.
'나는 조언 받을 사람이 아니야!'
사람은 학원에서 상처받지 않는다. 누가 나를 가르치거나 잔소리를 했다고 슬퍼하지 않는다.
애초에 배우러 간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학원에서 개인적이게 되면 왠지 모를 그림자가 나를 따라다니게 된다. 나의 사적인 영역까지 침범하는 순간부터 불쾌해진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어쨌든,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이와 같다.
사람이 자신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나,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만큼 상대방도 같은 입장이라는 것이다.
나는 10년 이상을 선생의 자세로서 살아갔다.
말을 잘하고 영향을 잘 끼치는 사람말이다. 하지만 인간관계 속에서 서서히 친구들은 끊어져 내렸다. 사람들은 영웅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아 한다. 영웅은 필요할 때만 부르는 존재다. 어차피 영웅은 자신의 힘든 것도 보여주지도 않는데 말이다. 친해질 이유가 없다.
나는 그동안 영웅이었다. 그래서 혼자였다.
나는 서서히 병들어갔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홀로 영웅이 되어,
혼자만의 우상을 세우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시대에는 닮고자 하는 위인 혹은 선생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바로 자신도 구성원이라는 것이다. (클릭) 자꾸 자신은 구성원이 아니라고 여기니까 그것을 '꼰대'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도 부족한 한 명의 사람이다.
사진과 같이 갑옷은 곧 자신의 존재 자체가 되어서, 오직 자신의 실력만으로 상대방을 대한다. 현실은 진단을 내려주는 의사 선생은 필요할 때만 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반복되면 자연스레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
압도하는 심장과 같은 것은 역할에 불과하다. 그 역할을 마치고 나면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역할 놀이와 심취극에 빠져서는 안 된다.
크리스천의 병은 바로 내가 의로워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즉 압도의 상태에 대한 것이다. 학원 선생은 학원 취업 관련된 부분 외에는 모른다.
스스로를 고결한 사람으로서 여기는 것 말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실제 업무에서 배울 부분등 모르는 게 투성이다. 그렇기에 도움을 구하고,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
즉
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이기에 도움 따위 구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자긍심을 내려놓고
듣게 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내가 전문 분야를 깊게 판 것처럼,
상대방의 전문 분야는 뭘까?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들을 수 있는 자세가 없다면, 곧 삶이 당신의 뺨을 치게 될 것이다.
남들만 볼수 있는 시야를 자신은 보지 못했기에,
그것을 무시한 댓가는 내가 치르게 될 것이다.
후배만 볼수 있는 업무 환경을 듣지 않았기에,
선배말 볼수 있는 업무 환경을 듣지 않았기에 말이다.
그런즉 인간은 늘 배워야 하는 존재이며,
질서는 늘 지켜야 하는 존재이다.
질서 속에서 배움을 얻고,
질서 바깥에서 거슬려서는 안 된다.
질서와 직분은 자신의 트로피가 아니다.
남을 배려하고 도움을 잘 주기 위한 안전 자격증이자,
나로 하여금 겸손히, 상대방이 원하는 도움을 얻기 위해서 두는 거리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이 반대가 되어있다.
질서 속에서도 바깥에서도 거들먹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은 위대한 즉 조언을 들어도 인정한 티 하나 내지도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다.
난 대단해. 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지. 어딜 감히 나한테 조언을 줘?
그렇게 위대한 크리스천 은 하나둘씩 늘 서로를 향해 부족한 부분만 보게 된다.
자기 간증만 자랑스럽게 한다.
자기 간증이 가장 반짝한다고 믿고,
남의 이야기는 깍아내린다.
‘어 너는 부족해.’
‘어 너는 우리 기관에서 훈련 좀 받아야겠어’
등의 이야기를 하며 자신은 자부하고, 상대편은 어리석다고 생각을 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닫힌 마음의 전제이자 마음은 사실 이것이다.
‘...ㅋㅋㅋ 나는 그래도 저 놈보다는 훨씬 나은 상태네. 저 놈한테 해줘야 될 말이 많겠군.’
그렇기에 부족한 부분 혹은 앞으로의 나의 힘든 ‘과거’가 될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중립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라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를 진단하는 사람을 보면 참 한심하다.
그렇게 나를 평가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며 그러한 '태도'는 너무 애초롭다.
아무리 좋은 말이자 내용이더라도, 그런 방식의 닫힌,
자신이 정답에 속해있다는 식의 상호작용하지 않는 태도는,
상대방을 벼랑 끝에 세우는 것과 같다.
상대방의 전공과 삶이 뭐가 되었던지 간에,
어어~ 너 말 그래그래.
근데 너의 경험보다 내 경험이 너를 압도해.
이런 말, 그리고 이딴 쓰레기 같은 말과 태도.
그 사람 주변에는 늘 다툼이 가득하다.
그런 언어 표현이자 마음은 불편하고, 변태스럽다.
그 사람은 자신의 몸을 스윽 훑은 다음에 내 몸을 구석 구석 만지는 사람과 같다.
그리고 말한다.
어~ 다음에 나한테 또 오게 ~ (안 오면 넌 교만한거야)
그러면서 스스로 감사해한다.
'오늘도 나는 누구에게 선한 영향, 가르침을 준 선한 의인입니다.
휴~ 난 멋져. 난 고귀해.'
하지만 그런 사람의 인간관계는 다 끊기는 법이다. 애초에 인간관계는 그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나중에 갈라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한 문장에 담겨있다.
상대방을 자라나는 사람이자 독립적 성인으로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세계에 가두려고 하는 것 말이다.
불쾌한 일이다.
서로 도움을 받을수 있어야 한다.
항상 경직된 질서와 도움을 주어야겠다! 라고 집착만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관계는 쌍방향, 서로이며,
함께여야 한다.
나만의 우물이 아닌, 모두의 흐르는 호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보다 잘했다라는 집착 혹은 복수와 의.
어떤 분야에 있는 전문성을 평범한 관계에 끌고와서 그것을 강요 및 강조하는 행태 또한 주의해야 한다는 말
을 하고 싶다.
(예: 너는 내 전문분야를 모른다고?
(내심: 이 사람은 멍청하고, 내가 고귀하구만! 어떻게 해야 내 영역으로 저 사람을 끌어들이지) )
반드시 분별 및 구별, 그리고 상대가 잘하는 부분에 대한 인정을 하는 것이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볼수 있다.
‘나는 남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야’는 자랑할게 못된다.
저는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가 아니라
저는 여전히 대화하며 배워가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낮은 자세가 중요하다.
대부분의 인정받는 선생의 자세는 이러한 것을 충분히 경험하고 봐왔을 것이다.
자신의 독립성과 짠맛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자신의 고귀성을 입증하고,
상대방의 시선이 나를 판단하는 것을 두려워할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진정한 소금이라면 나는 존재할수 있는 힘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즉, 자신의 그 에너지를 밖으로 내보내며, 동시에 섞이기 위해서는 내가 도움이 필요한 자라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움직이는 조각상이 있다면, 그 조각상을 디자인하는 겉모습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조각상 안에 있는 움직이는 기계를 디자인하는 기술자 또한 겉보다 중요한 것이다.
아트와 디자인, 서로 배울수 있고,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전공을 가지고 자신의 자리에서 존재해야 한다.
서로의 존재와 취향, 방향 비전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이다.
다만 ‘나에게 좋은 친구가 나에게 조력자가 되어주고 있어.’
라는 말을 할수 있다면, 그것만큼이나 아름답고
스스로의 인격의 성숙에 대해서 증명하는 것은 없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즉 마음에 따라해보자.
‘나는 좋은 아빠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나의 부족함을 알고 다른 이들에게 구하는 사람이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
'나만 할수 있는 것이 있어서 다행이다.
베풀어야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