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인간 관계의 저하, 시대의 바보들

웃음과 예의로 인해 오히려 어긋난 관계

1. 관계의 단절: 우리는 왜 서로에게 화가 날까?


요즘 따라 관계란 전화를 하다가 “어 미안한데 내가 작업하는데 못 하겠어서 전화 끊을 수 있을까?”라고 말해야만 하는 상황과 같습니다. 상대방의 페르소나에 대한 공간이나 존중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절대적인 화를 만들게 되는 것이죠.


관계가 끊어지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친하게 지내자"는 말 뒤에 숨어 있습니다. 겉으로는 친밀함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관계에 대한 답을 미리 정해두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도였든 무엇이었든 말입니다. 우리는 '아픔'과 같은 특정 키워드로만 타인을 이해하려 하며, 상향적인 자극만을 구합니다. 결국 상대를 차별하거나 나만의 틀에 가두어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생깁니다.

관계의 갈등은 상대의 고유한 영역(페르소나)을 존중하지 않고, 내가 개인만이 정한 답과 질서에 상대방을 끼워맞추려 할 때 발생합니다. 상대방은 가벼운 대화만을 생각했는데, 당황스럽겠지요.



2. 엇갈린 목적지: 상담사 A와 일반인 B의 사례

여기 두 명의 인물이 존재하는 배경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A (상담사): B를 좋아하는 여자로 생각합니다. "필요할 때 언제든 전화해"라고 호의를 베풉니다.

B (열정 있는 일반인): A를 같이 공부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지적인 동료로 생각합니다.


이 두 사람이 만나면 결과는 좋을 수 없습니다.


A는 연락을 주고받은 뒤 "왜 먼저 연락 안 하냐"며 서운해하고,

정작 B가 전화를 걸어 힘든 이야기를 하면 "나는 힘든 게 없는데 너는 왜 그러냐"며 핑계를 대고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서로의 필요와 질서가 맞지 않은거죠.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페르소나가 있고, 상대가 그 페르소나에 공감해주길 원합니다. 또 누군가는 심지어 망가진 페르소나로 인해 상대의 인정을 갈구하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목적에 따라, 삶이라는 경주에서 잠시동안 2인 1각의 경주에서 함께 서로의 목적하에 달리게 되는거죠.


서로의 필요와 목적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나의 욕구로만 상대를 채우려 할 때 '오해의 사고'가 일어납니다.


3. 역사와 문화로 본 '친밀함'의 환상

우리는 왜 자꾸 선을 넘게 될까요? 너무 많은 사람을 사적으로 가까이 두려는 것은 일종의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대중적인 기능을 수행할 때는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정말 깊은 관계는 확실한 역할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1800년대 사진을 보면 사람들은 웃지 않습니다. 당시 공동체 생활은 필수였지만, 사진 속 무표정은 '남'이라는 객관적 존재에 대한 인정과 사명에 대한 이해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심으로 웃는 것은 오히려 일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지요.


하지만 현대는 웃음과 예의가 만연합니다. 누가 되었던 항상 웃으며 대하지요.

저는 이것이 사실 방랑하는 에너지이자, 가벼운 무질서의 관계가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현대의 드라마나 영화는 재앙 속에서 갑자기 가까워지는 영웅적 친밀감을 묘사하며 환상을 심어줍니다.

사람들은 이유 없이 '왕'이 되고 싶어 하고, 즉각적인 도파민을 주는 ‘상향식 사고’에 매몰됩니다.

상향식 사고란, 사고를 깊게 하지 않고, 노력을 하지 않는 도파민 주도형의 사고를 뜻하는 뇌과학적 용어입니다. 심어도 자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심지어 뇌과학마저, 성장하지 못한다라고 경고합니다.


왜 근대의 관계에서는 성장이 지연될까요 ?



1. '왕'이 되고 싶은 욕구: 생존을 위한 본능적 '서열 에너지'

인간의 뇌 깊숙한 곳(뇌간과 변연계)은 진화적으로 사회적 서열이 높을수록 생존과 번식에 유리함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로토닌과 서열: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 뇌 내 세로토닌 수치가 상승하며 자신감과 안정감을 느낍니다. 반대로 서열이 낮아지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급증합니다.

현대의 오류: 과거에는 '왕'이 되기 위해 실제적인 무력이나 지혜(노력)가 필요했지만, 현대의 디지털 환경은 실제 능력 없이도 '관심'과 '좋아요'만으로 뇌가 "나는 지금 서열이 높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이유 없는 왕'이 되고자 하는 심리의 생물학적 근거입니다.




2. 도파민 주도형 '상향적 사고'의 과학적 실체

뇌과학에서는 이를 '하향식 조절(Top-Down)'의 실패와 '상향식 활성화(Bottom-Up)'의 과잉으로 설명합니다.

① 하향식(Top-Down) vs 상향식(Bottom-Up)

하향식(전두엽 주도): 목표를 설정하고, 고통을 인내하며, 깊게 사고하여 행동을 제어하는 방식입니다. 에너지가 많이 소모됩니다.


상향식(도파민/자극 주도): 외부 자극(스마트폰, 칭찬, 쾌락)에 즉각 반응하는 방식입니다. 사용자님께서 말씀하신 '상향적 사고'는 바로 이 자극 중심의 본능적 회로를 의미합니다.


② 도파민의 '예측 오류'와 노력의 실종

도파민은 '보상' 자체보다 '보상에 대한 기대'가 있을 때 더 강력하게 분출됩니다.

깊은 사고와 노력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 도파민 분출이 지연됩니다.


반면, "나는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망상이나 즉각적인 자극은 노력 없이도 도파민 회로를 지름길(Short-cut)로 활성화합니다. 뇌는 점점 더 적은 에너지로 많은 도파민을 얻으려 하며, 결국 깊은 사고(전두엽 기능)를 포기하게 됩니다.


3. "심어도 자라지 않는다": 신경 가소성의 법칙

사용자님께서 말씀하신 "심어도 자라지 않는 것과 같다"는 비유는 장기 강화(LTP, Long-Term Potentiation)의 원리로 증명됩니다.

진정한 성장: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이 뇌에 자리 잡으려면 전두엽의 집중력을 통해 신경 세포 간의 연결이 물리적으로 강화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은 반드시 시간과 반복적인 고통(에너지 소모)을 필요로 합니다.


도파민 매몰의 결과: 즉각적인 도파민만 쫓는 '상향적 사고' 상태에서는 신경 연결이 단단해질 시간이 없습니다. 뇌는 자극에 반응만 할 뿐, 구조적인 변화(학습과 성장)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겉보기엔 화려한 씨앗(정보)을 뿌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뇌라는 토양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4. 요약 및 뇌과학적 진단


구분 상향적 사고 (도파민 주도) 하향적 사고 (실질적 노력)


주도 부위


상향: 변연계, 측좌핵 (본능)


하향: 전전두엽 (이성)




에너지 소모


상향:매우 낮음 (효율적 착각)


하향: 매우 높음 (실질적 변화)




결과


상향:일시적 쾌락, 허영심, 공허함


하향: 장기적 성장, 실질적 지위 획득




비유


상향:뿌리 없는 조화 (심어도 안 자람)


하향: 단단히 뿌리 내린 거목




결론적으로, 현대인은 뇌의 에너지 보존 법칙과 디지털 환경이 결합하여 가장 적은 노력으로 '왕의 기분'을 내려는 생물학적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이 함정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의도적으로 불편함을 선택하고, 전두엽을 사용하는 '하향식 조절' 기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지금 있는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책임지지 않는 가벼움에서 진정성이라는게 나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시도와 사고를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자유의 표현의 대명사인 미국의 예시로 보면 그게 건강하지 않은 관계라는 것을 볼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식 개인주의와 한국의 관계망:

저는 미국의 개인주의를 흥미롭게 봅니다. 한국의 경직된 문화보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 전제는 "언제든 떠날 수 있다(Run)"는 것입니다. 모두와 함께 있지만 사실은 홀로 있는 것이죠. 미국의 문화에서 질서가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섹드립이나 가벼운 드립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하지만 그런곳에서는 진지한 역할이나 이야기는 걸림돌로 취급됩니다. 아메리칸 드림, 그 '무한한 자유'의 드림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들은 당신 곁에 흥미를 가지고 모일 것이지만 다음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때 ‘자유’와 ‘방림’이라는 것의 환상에 빠져있었습니다.

그것이 좋아보였습니다. 그 솔직함이 진리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그리고 제 스스로는 우울해졌습니다.


4. 안식은 '일'에서 온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는 법

내 스스로가 왕이 되고,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일하지 않아도 된다, 등과 같은 것은


정말 우울한 판타지입니다.


대학교 기말고사가 끝나고 모든 과제에서 해방되었을 때, 저는 오히려 미칠 듯한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사우나를 가고 카페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예배를 드려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운동을 해도 사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나는 자유한 혼자가 된 느낌이었지만, 동시에 일을 멈춘 나는

독안에 빠져있는 쥐와 같다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6일 일하고 하루 안식하라.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


일을 하지 않는 자유주의는 오히려 독이 됩니다.


자신의 역할과 은사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스스로를 '작가'라고 칭하며 가볍게 깡총깡총 뛰는 것은 한때의 유행은 될지언정 남들이 소비하는 콘텐츠가 되지는 못합니다. 즉, 남을 위한 헌신을 속일수는 없습니다. 위인은 항상 자신의 직업(Job)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해왔습니다.


위대해지고 싶으면서 아무 일도 안 하겠다는 것만큼 큰 모순은 없습니다.


나는 남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하지만 나는 홀로 위대하다.

이것은 공주 이야기와 같은 우화에서 주는 모티브입니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영화에는 갈등과 그것을 해소하는 장면을 늘상 그립니다.

그리고 관중은 그 모습을 보며 주인공과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는 아마 그 주인공은 또 다른 과제를 찾아서 해결해나가는 일생을 살아낼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5. 결론: 질서 있는 관계와 페르소나의 완성


그렇습니다. 일,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자 필수입니다.


하지만 아무개의 제자 혹은 선생이 되는 것은 일종의

자신의 만족을 위한 자기 위안일수 있습니다.


그런즉,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상대방을 위한 '거리'와 '질서'가 필요합니다.


자리 파악하기: 지금 이 자리가 가르치는 자리인지, 나누는 자리인지, 상담인지, 농담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부적절한 페르소나 경계: 자격도 없는 자리에서 타인을 제자 삼으려는 '상담사'의 자세를 취하는 사람을 멀리하세요. 그것에 빠져들게 되면 관계는 파괴됩니다.


기능을 통한 증명: 질서 없이 모두가 선생이 되려 하면 말싸움만 남습니다. 적합한 영역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질서가 중요합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 관계입니다.


저는 작곡가로서 저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분과 진중한 고민을 나누고 싶습니다. (밤에는 눈 맞을까 봐 카메라는 안 켜는 게 좋겠지만요.) 이런 계기를 만들려면 단순히 '친해지자'가 아니라, 모임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유효한 정보를 제공하는 '설득력'과 '기능'이 필요합니다.

모두의 인생은 소중하고,

그들의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이보그가 인간이 되어가는 게임이 있었습니다. 그 게임에서 인간이 되어가는 현상으로서 가장 부각을 시킨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제는 내가 결정하고 싶다' 라는 것이 가장 유효한 표현이었습니다.


그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는 처음에 당황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렇습니다. 인간은 꿈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설득력과 기능은 즉 ‘Job’일의 형태로 고착이 됩니다.

결국 상대방이 나에게 바라는 욕구와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질서가 맞닿을 때, 비로소 존중이 이루어지고 관계는 기분 나쁘지 않게 완성됩니다. 페르소나를 연단하고 완성해 나가는 것, 그것이 곧 우리가 일을 하고 관계를 맺는 본질입니다.


공주는 공주를 구하려는 일하는 ‘용사’에게 반하지,

방종하는 이는 그 자신에 대해 설득하지 못합니다.

늘 도울수 있는 ‘대상’이라는 ‘장치’를 통해 자신이 설득됩니다.

일하지 않는 여유를 자신의 flex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늘도 돈 벌 필요 없지만,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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