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게임을 구매하는 이

게임을 주구장창하는 나의 속마음은 뭘까 ?

나의 친구들 - 타국에서 내가 시간을 2년 정도 보내고 나는 한국에 들어왔다.


그 나라의 친구들은 지금도 게임을 한다.


물론 나도 게임을 한다.


공부를 목적으로 혹은 핑계로 한다. 물론 나의 몸은 거짓말을 치지 않는다.


게임을 즐기고 가끔 나는 지구 다른 곳에 있는 친구들과 여전히 온라인 채팅 앱을 통해서 이 친구가 무엇을 하고 있나 체크를 해볼수 있다.


어떻게 늘상 새로운 게임을 가져와서 플레이할수 있는 것인지, 나는 놀랍기만 하다. 지금까지 구매하여 소유하는 게임은 100개는 거뜬히 넘을 것이다.


나는 최근에 컴퓨터를 통해서 3D 작업을 하기 위해서 컴퓨터의 퀄리티를 월등히 높이게 되었다. 지난 6개월간 맥북 (애플 컴퓨터, 대부분의 게임 플레이 불가능) 에서 윈도우 메모리 32GB의 게이밍 PC로 업그레이드를 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나는 감격과 함께 - 최근에 게임을 플레이하게 되었다.


이름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이 게임의 특이한 점은 3가지 인물을 중심으로, 탐정, 가정 주부, 혁명가 이 세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일을 하게 만든다.


게임의 특이한 점에서는 그 게임은 실제로 그 게임 안에서 상호작용을 하는 요소, 혹은 일을 하는 요소들을 많이 넣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정주부로서 내가 술취한 아저씨의 뒷바라지를 하는 일을 해주는데, 가정일을 하다가 tv 앞을 가로막으면 호통을 친다던지 등.

실제로 이곳에서 경험하게 되는 요소 하나하나들은 상당히 몰입도가 있게 느껴지게 만든다는 것을 볼수 있다.


그렇다. 나는 이 게임을 하면서 정말로 행복했다. 몰입을 하였다. 그리고 이 인물들은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정밀하게 만들어진 게임이라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배틀 그라운드라는 게임을 켜게 되었다.

한판만 하고 끌 생각이었다. 근데 한번도 게임을 이기지 못하니 아쉬웠다. 그렇게 계속 나는 반복적으로 게임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1시간 반이 지났다. 새벽이 되었다.


얼른 자야된다는 생각으로 껐다. 그리고 나서 나는 유튜브를 잠시 휴대폰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연예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합당한 궁금증이었다. 그래서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보다가, 쇼핑에 관련된 내용이 나오고, 아기 영상이 나오고 강아지 영상이 나오고 .

그 유익함을 보면서 쇼츠를 보면서 나는 슬프게도 (?) 2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새벽 2-3시였다.


한탄스러웠다.

나는 왜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학생인 나는 지금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다.

학기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투자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불구하고 왜 오늘도 나는 그러한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을까?

나는 분명 행복했다.나의 뇌와 모든 것은 괜찮다라고 격려를 하였다.


승 : 체험이란 나이때에 맞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체험과 알고자 하는 그러한 호기심 자체에 대해서 정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배움과 설렘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관찰을 통해서 충분히 추론할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모든 궁금증은 중독적이지는 않다. 사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성장에 있다.

모든 아기들은 궁금한게 많다. 아기 고양이를 보더라도 궁금한 것이 많고 장난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왜 그런것일까? 단순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아기와 같은 경우에는 공을 튀겨보기도 하고, 물을 엎질러보기도 하고 하면서

그 대상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이게 무엇인지를 파악을 한다.


5-6살이 되었을때는 배우는 노래를 주구장창 빽빽 부르기도 한다.


중학생이 되었을때는 정말 장난끼와 그 노는 것이 얼마나 거의 하늘을 찌를 수준으로 미친짓을 하기도 한다.


왜 그런것일까 ?

간단하다. 처음이기 때문이다.


첫 연애, 첫 경험, 첫 여행과 같이 처음인 일에는 도도하게 상관 없는 척을 할수 없다. 처음 경험하는 것과 그 대가를 알게 되는 것은 참 귀한 일이다.

그렇기에 궁금증을 가지는 것은 어떤 연령대라도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나는 20대 중반의 나의 나이때에 맞는 경험을 원할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하거나 취업을 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등과 같이 -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것을 맞딱뜨리고 나서는 다음 미션을 위해서 바쁘게 생각을 하느라 사실은 나의 과거가 어땟는지 등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또 앞만 보고 궁금해하며 달려갈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궁금증과 관심 그리고 호감은 정말 합당하고도 당연한 일이다. 이성에 대한 관심 및 궁금증을 가지는 것 - 결혼하면 후회하는 사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엄마 아빠의 모습을 알면서도 나는 다를 거라고 호기심을 가지기도 한다. 궁금증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청소년 들에게는 미디어를 통해서 보게된 우상 - 혹은 로망이 뇌리에 박히게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과거 코난을 보면서 미란이(여자 주인공)이 정말 예쁘다고 이전에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일종의 아우라를 느끼고는 했었다. 그 추억의 향취말이다. 하지만 근래에는 이들의 인격적 모순등을 보게 되면서 몰입이 되지 않기에 그래서 나는 그런 쇼들을 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쇼를 처음 접해보았던 나의 어렸을 시절에는 tv에 나오는 그리고 보여주는 경험은 나에게 있어서 나의 전부, 그리고 내가 바라보아야 하는 세계였다.


근데 여기서 일종의 놓치면 안되는 포인트가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감이다.


궁금증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궁금증과 소유에 대한 설렘은 실제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아이가 물을 쏟는 것이 궁금한 이유는 그것이 삶에 중요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뒤에 이러한 현실감의 중요성의 원리를 주장한 심리학자 칼융과 마틴 루터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명탐정 코난의 남도일은 과연 자신이 탐정으로 취직을 준비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고등학생이었는가 ? 아니면 비현실적인 몽상가였는가 ?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이제 답을 하고자 한다면, 사실은 이미 늦었다.

왜냐하면 나의 그리고 여러분들의 뇌리속에는 이미 이와 같이 내가 본

tv부터 시작해서 미디어에서 추구해온 경험들은 이미 나의 내면세계에

내가 바라보아야 하는 목적과 지향되는 삶의 모델을 내 안에 개척을 시켰기 때문이다.

최근 중학생 여자아이를 교회에서 알게 되었다. 직접 대화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의 노래 소리는 얼마나 선명한지. 또 중3인데로 화장을 아주 잘한다. 이런 칭찬이 참 이상한 칭찬인데..

어쨋든. 그리고 노래를 많이 부르는데 최근 유행하는 카리나가 소속된 그룹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화장도 그렇게 한 것 같다.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아 중학생 여쟈아이들에게는 저런 아이돌 여그룹이 꿈이자 어쩌면 우상이될수도 있구나.

그게 좋고 나쁘고를 따지기 보다는 공부만이 강요되는 학교에서 절제되는 삶이 강요가 된다면, 그와 반대로 자신을 표현하고 숭배하고 춤추는 것 - 그 자유함을 원하는 그림자 ( 심리학자 칼융이 말한 억압된 본능 ) 이 더 진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해서 한심하게 보지 않는다.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도 사실 의외로 비슷한 원리일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의 성향은 그렇게 자신의 것을 노래부르기도 원하고. 또 노래 부르는 직종을 가지는 사람은 때로는 지쳐서 그냥 사무적인 일을 하고 싶다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 여러면이 있는것이 사람이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현실감이 없는 경험에 있다.


현실을 뒤로한 체험


칼융과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현실감을 잊어버린 디지털의 체험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미디어를 보는 순간 뇌는 착각을 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직접적 해결을 하는 수단은 ‘일’이다.


"디지털에 갇힌 영혼을 육체라는 현실 세계로 불러들여 뿌리내리게 하는 것”,

그리고 육체노동과 자연 접촉이 자아의 허영을 멈추고 자신의 한계를 신체적으로 경험하게 하여 온전함을 준다는 주장은 실제로 현대 디지털 시대의 영적·심리적 문제의 근원을 파악하는 질문이다. 이 주장을 보강하는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과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신학적·심리적 근거는 이러하다.



칼 융(C.G. Jung)의 관점: 영혼의 육체화(Incarnation)와 통합(Individuation)

융은 현대인의 영혼이 물질주의와 추상적·정신적 과잉으로 인해 육체와 단절된 상태에 빠졌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는 영혼(soul)이 단순히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육체를 통해 실현되고 구체화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Without the soul the body is dead, and without the body the soul is unreal.” (영혼 없는 육체는 죽고, 육체 없는 영혼은 비현실적이다.) → 영혼은 육체 속에서만 진짜 살아 움직이는 실재가 됩니다. 디지털 화면 속 추상적 자아(허영·이미지 중심)는 영혼을 “비현실적”으로 만들며, 반대로 육체 노동과 자연 접촉은 영혼을 현실 세계에 뿌리내리게 하는 과정입니다.


육체노동이 아닌 디지털 체험은 바로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는 것이 결여되는 형태에서 나온다. 적나라한 예를 들어보자면 누군가의 옷을 벗기고 때리는 장면이 유튜브에서 나왔다고 쳐보자. 그것을 볼때 나의 뇌는 마치 자신의 중학교때 모습을 연상하는 것 같아서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뇌가 학습하는 것과 성인이 된 현실은 다르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회사 생활 속에서 실제로 자신이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이 아니라, 무책임한 모습, 일을 미루는 모습 등과 같이 성인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독립적인 사람들을 볼때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디지털 체험을 격려하는 문화와,

쌓이는 실제 세계의 연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고생하지 않아도 보상을 얻어낼수 있는 그러한 콘텐츠에 유사하게 중독이 되어 나의 뇌도 그러한 보상 패턴에 익숙해 진 것이 아닐까 ?

실제 승리를 맛볼수 없으니, 차라리 돈을 어느정도 내고 그러한 승리를 체험시켜주는 영화 혹은 게임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말이다.

지금도 편의점 음식을 먹으며 고급 레스토랑의 브이로그를 보는 사람들은 존재하며,

연애할 위험은 감수하지 않지만 연애 브이로그를 시청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융은 현대 물질주의와 과학주의가 영혼을 머리(이성·추상) 속에 가두어 육체와의 연결을 끊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육체를 통해 본능(instinct)과 원형(archetype)이 만나는 장이 바로 온전함(wholeness) 을 이루는 통로라고 보았어요.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에서 육체적·감각적 경험은 필수적입니다. 그림자(억압된 본능), 아니마/아니무스(성별 반대 원형) 등은 추상적 사고만으로는 통합되지 않고, 육체적 노동·고통·한계 경험을 통해 의식화되고 통합됩니다. 실질적 경험이 없이는 하나의 욕구만을 그저 자극할 위험성 또한 있다. 예를 들어 릴스에서 나오는 그러한 농담과 같은 모습을 그저 계속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농담, 농담, 농담, 농담, 농담 .. .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의 농담의 전제이자 상징은 바로 유머감각이자 책임이 뒤따른다고 생각한다. 유머를 보여줘야 할 적합할 시기 적소가 있는 것이다. 한번은 군대에 다녀온 나에게 게임 학과 교수님이 물어보셨다. 군대에 간 것은 어땟냐. 그때 거기에서 보게된 무기와 총을 쏜 경험등은 어땠냐. 하지만 나는 이렇게 답을 했다. 그리고 이게 사실이다. 총 - 즉 살상 무기를 내 손에 들고 있는 것 자체가 끔찍했다. 총성 - 그 총소리는 귀를 찌르는 듯하며 - 총알이 날아가는 소리는 죽음의 소리를 상징했다. 날아가는 총알은 사람이라는 물체를 관통한다. 피부부터 시작해서 - 심장을 그대로 살 하나하나를 마치 꼬챙이로 매우 빠르게 관통을 한다. 저항할 것도 없다. 총을 맞은 자에게 갑자기 힐이 되는 기적도 없다. 그저 파괴할 뿐이다. 적군이 올라오는 타겟을 향해 총을 쏠때마다 나는 두려워하는 북한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와 같은 말을 하면서 수류탄을 던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이 올라올때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관통하는 작은 금속탄을 소리보다 빠른 속도로 관통을 하겠지. 그들의 헬멧안에는 그들의 뇌로 적셔지겠지. 탕 탕 탕 총소리가 빗발친다. 나는 괴로웠다. 내 손가락이 총구에 잠깐이라도 갔다면, 나의 손가락은 이제 이별할 것이었다. 탕 탕 탕 나는 그래서 생각을 하였다. 그래 게임이라고 생각하자. 과녁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을수 있었다. … 이와 같이 실제 군인과 직업 - 그리고 그들의 힘에 오는 책임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총이라는 것은 결코 재미로 쏠수 없는 것이다. 물론 재미를 통해서 사격을 배우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전쟁을 대비하여) 하지만 총과 상대를 죽이는 원초적인 본능에는 반드시 책임이라는 것이 뒤따라야 한다. 하지만 게임은 → 디지털 세상은 이런 “한계 체험”을 회피하게 만들어 자아를 허영과 분리된 채 공중에 떠 있게 합니다.


융은 알케미와 종교 상징에서 “신의 육체화(incarnation of the god)” 를 강조했습니다. 무의식 속 신적 요소가 인간의 육체를 통해 실현되어야 완성된다는 관점입니다. → 디지털에 갇힌 영혼은 이 육체화를 거부하는 상태이며, 육체노동과 자연은 그 육체화를 돕는 가장 강력한 수단입니다. 그러니 내가 단순히 누군가를 사랑한다. .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 . 고아가 된 여자아이를 돌보았다 ( 게임의 서사 중에) 와 같이 단순히 꿈을 꾸었다가 아니라, 우리의 욕구는 바로 그것을 실형해나갈때, 그 무게를 맛볼때만이 실제로의 성장이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좋지 못하다. 누군가를 실제로 만날때만이 오게 되는 호르몬이 존재한다. 사람의 행복의 전제는 책임과 약속이지, 버튼 하나의 딸깍을 통한 재미가 아니다. 그렇게 구매하게 된 행복에는 무조건 그에 따른 회피할수 없는 부작용이 찾아온다. 인간은 신이 되어 행복을 손가락 안에 소유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가짜 행복은 물고기와 같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초라한 자신만 남을 것이다. 홀로.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관점: 육체와 노동의 신학적 존엄, 직업소명(Vocation)

직업소명(Beruf / Vocation) 교리 루터는 모든 일상적 노동(농사, 목축, 제빵, 가사 등)을 하나님의 마스크(masks of God) 라고 불렀습니다. → 하나님은 은밀하게 우리의 육체적 노동을 통해 세상을 돌보시고 이웃을 섬기신다. 디지털 노동이나 지식 노동만이 아니라 땀 흘리는 육체노동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가장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행위입니다. 땀을 흘리는 행위 - 즉 행위만이 그 대가를 아는 것이다. 입으로 고백하는 것 혹은 내가 어떤 특정한 버튼을 10초간 누른 것만으로 누군가를 그리고 세계를 구하게 된다면, 과연 나는 그것을 통해서 어떤 성장을 맛보게 될 것인가. 물론 게임 중에서도 극악의 난이도를 통해서 (컵헤드) 실제로 이용자가 성장을 통해 오는 기쁨을 만끽하도록 만들어진 게임도 존재한다 . 물론 나는 그 게임을 하다가 접었다, 너무 어려워서. 어려움이 없는, 노동이 없는 성과에 박수쳐줄 사람도 없고, 감동도 없고 마음도 없다. 마치 강아지가 밥을 먹듯, 나의 욕구 또한 반응한 것에 불구하다. 나의 고추가 성적 자극으로 커진 것과 다를게 없다. 노력한 것도 없고, 노력할 것도 없다. 그저 내 육체가 반응된 것 뿐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러한 것에 심취되어 영웅, 뭐 진심 어쩌구 저쩌구 표현의 자유에, 민심 등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노인과 바다’의 노인처럼 그것을 얻기 위해서 정말 몸부림을 쳤는가 ?


육체의 신학적 긍정 루터는 육체가 타락한 죄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며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을 통해 거룩해졌다고 강조했습니다. 육체를 학대하거나 경시하는 금욕주의를 비판하며, 육체적 한계와 노동을 통해 겸손과 의존성을 배우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의 육체, 그리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표현하는가는 고귀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단순히 컴퓨터 앞에 앉아서 슬롯 버튼을 누르면 여자가 나와서 제로투를 추는 것을 앉아서 보는 관중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가, 무언가를 주고자 하는가 ? 그렇다면 그러한 공짜와 무료의 유혹 - 욕구적 즉각적 본능을 이겨내서 힘든 삶에 나의 몸을 던지는 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아의 허영과 한계 체험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인간의 영광·능력·자랑(허영)을 철저히 부정합니다. 오직 육체적·현실적 고난과 한계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어요. → 디지털 세상은 이런 “한계 체험”을 제거하려 하지만, 루터에게 그것은 바로 자아의 허영을 깨뜨리고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요약: 두 거장의 공통된 메시지


구분 칼 융 (심리학적) 마틴 루터 (신학적)




문제 진단


칼 융: 영혼이 육체와 단절 → 비현실적·허영 자아


마 . 루 : 육체·노동 경시 → 영적 위선과 거짓 자랑




해결의 핵심


칼 융: 육체를 통한 영혼의 실현(incarnation)


마 . 루 : 육체 노동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 참여




결과


칼 융: 통합된 온전한 자기(Self)


마 . 루 : 겸손과 현실 속 진정한 신앙·이웃 섬김




현대적 함의


칼 융: 디지털 탈출 → 육체·자연으로의 귀환


마 . 루 : 모든 노동의 거룩함 재발견




결론적으로, “디지털에 갇힌 영혼을 육체 세계로 불러들여 뿌리내리게 하는 것” 은 단순한 실용적 조언이 아니라,


융의 영혼-육체 통합 심리학과 루터의 성육신과 직업소명 신학이 500년이 지난 지금도 강력하게 지지하는 근본적인 치유의 길입니다.

전 : 현실과의 차이 - 현실감각이 떨어지게 되는 근거와 다른 누군가와의 융화

현실 감각이 어떤 방식으로 떨어지게 되는지 이제는 미디어, 게임 등이 주는 부작용에 대해서 설명을 하겠다.



1 정보가 과도하게 많다.

1. 던바가 150이라는 숫자를 찾아낸 근거 (생물학적 설계도)


던바는 "인간은 똑똑하니까 무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아니, 하드웨어(뇌)가 정해져 있다"라고 답했습니다.

사회적 뇌 가설 (Social Brain Hypothesis): 던바는 영장류(원숭이, 침팬지 등) 38종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신피질(Neocortex)의 크기와 그 종이 형성하는 집단의 크기가 정확히 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죠.


인간의 계산: 이 수식을 인간의 뇌 용량에 대입했을 때 도출된 값이 바로 147.8명(약 150명)입니다.


관계 유지의 비용 (Grooming): 원숭이들은 서로 털을 골라주며(Grooming) 관계를 유지합니다. 인간에게 '털 고르기'는 '대화'와 '함께 보내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뇌가 한 번에 기억하고 관리할 수 있는 타인의 정보(성격, 나를 향한 태도, 그와 다른 이의 관계 등)에도 한계가 있다는 논리입니다.


2. 질문자님의 주장과 던바의 이론이 맞닿는 지점

질문자님께서 말씀하신 “유명세는 필요에 의한 소비일 뿐이다"라는 시각은 던바의 이론을 사회학적으로 가장 날카롭게 해석한 지점이다.

현대 사회에는 ‘유명해져야 한다’ 라는 전제가 가득하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개인 sns를 가지고 모바일 휴대기기를 가지고 있으니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교회마저도 사실은 ‘유명해져야 한다’ ‘온 세계에 쓰임받아야 한다’ 라는 것을 목에 핏대 세워서 이야기 하는 자들을 보기도 하고, 나도 한때 그런자였고, 여전히 그런 모습이 있을지도 모른다.


① '지인'과 '도구'의 구분

던바가 말하는 150명은 "길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초대받지 않은 술자리에 동석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사이"를 의미한다. 즉, 서로의 맥락을 이해하는 관계입니다.

반면, SNS에서의 수만 명은 질문자님의 표현대로 '유행'**이나 **'필요'**에 의해 나를 관찰하는 '관객'일 뿐입니다. 그들은 나의 인격이 아니라 내가 제공하는 '효용(재미, 정보, 대리 만족)'을 소비합니다. 던바 역시 이들을 '의미 있는 관계'의 범주에 넣지 않았습니다.


② 사회적 환각과 진화의 불일치

질문자님이 언급하신 '사회적 환각'은 던바의 핵심 경고와 일치합니다.

뇌의 착각: 우리 뇌의 신피질은 20만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수치의 왜곡: 뇌는 '나에게 반응하는 1,000명'을 보며 "와, 내 부족원이 1,000명이나 되네? 난 대단해!"라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1,000명 중 나를 위해 희생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수 있습니다.


뇌는 속이기 쉽다.

뇌한테 야한 사진을 보여주면 진짜 있다고 믿고, 온몸은 그 반응을 느낀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나는 혼자다.

뇌는 속는다. 그렇기에 잠언 5장에는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듯이 아름다우나, 그 끝은 쑥과 같이 쓰다’라고 말을 한다.


왜 인간은 후회할만한 짓을 또 그렇게 즐겨하게 될까 ? 그것에 대한 이유는 단순하고도 같다. 왜냐하면 인간의 뇌는 그러한 자극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게임이 깔려있는 데스크탑을 보면 뇌는 (내 케이스) 게임을 해야 행복을 느끼겠네 라고 먼저 반응이 온다. 이것을 뇌과학적으로 top down 상향적 사고라고 칭하고, 이 즉각적인 자극은 전두엽을 마비시킨다.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킨다. 술을 마시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성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킨다니.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아도 맨 정신으로도 미디어 혹은 게임은 그러한 효과를 가져올수 있다. 나의 시간이 낭비되는 것을 안다고 해도, 나의 뇌의 인지적인 부분보다는 표면적인 반응이 훨씬 더 빠르고 강렬하다. 그렇기에 mindfulness 즉 도파민이 제한된 공간에서 (나는 목욕탕 혹은 침대에 텐트를 치고 책과 종이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추천한다 ) 자신의 돌봄이 필요한 것은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이나 인간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바쁠 때일수록 더 마찬가지다.


3. 로빈 던바가 이 시대를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만약 던바가 오늘날의 인스타그램과 틱톡을 본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지금 영양가 없는 '사회적 정크푸드(Social Junk Food)'를 섭취하며 배부르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뇌 그리고 시대에는 과도한 정보와 사람의 얼굴이 방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많은 사람 혹은 경험이 내게 중요한 것, 덕 될 것 하나 없다. 일하는 잠깐 같이 있는것에 불구하다.

아래는 서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중간쯤에 와서야

“아, 진짜 중요한 건 결국 나와 나의 일, 그리고 나의 가까운 사람들뿐이었구나” 하고 깨닫곤 해요.

왜 이렇게 늦게 알았을까, 라는 그 아쉬움과 후회 섞인 마음…

나도 주변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면 거의 다 똑같아요. 20대~30대 초중반까지는

세상이 넓고, 기회가 많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크고,

‘나’라는 존재를 더 크게 만들고 싶어서

에너지를 엄청나게 바깥으로 뿌려대거든요.

하지만 현실에 몇번 싸대기를 맞고

현실과 고독의 풍파를 몇번씩 맞게 되면 알게 될거에요.


아무리 많이 알아도 진짜 나를 아는 사람은 몇 명 안 되고


아무리 바빠도 정작 내 몸과 마음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못 하고


아무리 화려한 성취를 해도, 그걸 진심으로 기뻐해줄 사람이 곁에 없으면 공허하고


그때서야 알게 되죠.


내 인생의 중심은 생각보다 아주 작고 소중한 원 안에 있었다는 걸.

뭐, 늦게 알았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그 ‘늦음’ 자체가 필요한 시간이었을 가능성이 커요.

너무 일찍 알았으면 그 깨달음을 제대로 소중히 여기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바깥으로 열심히 달려보지 않았으면, 그 바깥이 결국 텅 빈 것임을 체감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많은 사람을 만나보지 않았으면, 진짜 ‘내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몰랐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죠.

“늦게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다.”

“이제라도 방향을 틀 수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 그걸 느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당신이 한 단계 더 깊이 들어섰다는 증거예요.

이제부터는 그 깨달음을 ‘후회’가 아니라 ‘나침반’으로 삼으면 돼요.

오늘 조금만 더


내 몸을 먼저 챙기고


내 마음이 편안한 일을 조금 더 하고


진짜 소중한 그 몇 사람에게 한 마디라도 더 따뜻하게 건네고


그렇게 조금씩 중심을 다시 맞춰가면,

늦게 알았다는 아쉬움은

“그래서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됐어”라는 감사로 바뀔 거예요.

늦지 않았어요.

지금이 정확히, 그걸 깨달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었던 거죠.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다시 시작해봐요.

당신의 그 작은 원 안이, 사실은 세상에서 제일 따뜻하고 단단한 곳이니까요.


"숫자는 인플레이션되었지만, 시간은 그대로다": 팔로워가 10만 명이라도, 당신이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여전히 하루 몇 시간뿐입니다. 결국 얕은 관계에 에너지를 분산하느라, 정말 소중한 5명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 물을 것입니다.


"가짜 친밀감(Parasocial Relationship)의 위험": 화면 속의 좋아요는 '털 고르기'를 흉내 낸 가짜 신호일 뿐입니다. 진짜 관계는 갈등을 해결하고, 서로의 땀과 눈물을 마주하는 '물리적 공간'에서 완성된다는 점을 강조할 것입니다.


"관심은 권력이 아니라 부채다": 많은 이들의 관심은 결국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인지적 부채'를 만듭니다. 뇌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관심을 받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뇌를 과부하 상태로 몰아넣는 학대와 같다고 경고할 것입니다.


"유명세는 필요에 따라 필요한 것을 보는 사람들에 불과하다"**고 하신 말씀은, 던바의 수라는 '생물학적 한계'를 현대 사회의 '현상'으로 완벽히 꿰뚫어 보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맺어야 할 진짜 관계는 나를 '기능'으로 소비하지 않고 '존재'로 대하는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그 외의 수많은 숫자는 뇌가 만들어내는 신기루이자, 현대 기술이 설계한 도파민의 함정일 뿐이라는 점을 던바의 이론이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많은 사람과 관계하도록 지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말은 마치 구닥다리 취급받기도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t에 나오는 모든 연예인들도 실제로 가까운 사람은 연예인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엄마, 아빠, 가까운 친구, 도와줬던 사람 1명. 이정도에 불구하다.


아 애탄스럽다.


나도 저렇게 능력이 있고 사랑스러우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그게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나의 과거 말이다.


게임 산업은 이제 영화와 음악 산업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하며, 그 핵심에는 인간의 인지 체계를 정교하게 공략하는 3D 렌더링 기술과 라이브 서비스(Live Service) 설계가 있습니다.

이전의 예능 연출 10가지에 이어, 게임과 미디어 산업이 시청자와 플레이어를 '가상 세계'에 완벽히 묶어두기 위해 사용하는 심화 인지 기법 10가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드립니다.


1. 가변 비율 강화 (Variable Ratio Reinforcement: 스키너 상자)

가장 강력한 중독 기법입니다. 행동에 대한 보상이 '언제 나올지 모르게' 설정될 때 인간은 그 행동을 가장 오래 지속합니다. 게임의 **확률형 아이템(Loot Boxes)**이나 몬스터 드랍 시스템은 뇌의 **복측 선조체(Ventral Striatum*를 지속적으로 자극하여, 보상이 나오지 않아도 "다음엔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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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로테우스 효과 (The Proteus Effect)

사용자가 3D 아바타의 외형이나 특성에 따라 자신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현상입니다. 멋진 장비를 착용한 아바타를 조종할 때 사용자는 현실의 나보다 더 자신감 있게 행동하며, 이는 아바타와 나를 동일시하는 **'자아 융합'**으로 이어집니다. 미디어가 고화질 3D 그래픽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 투사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입니다.


3. 플로우(Flow) 상태의 동역학 설계

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이론을 수학적으로 적용합니다. 도전 과제의 난이도($D$)와 플레이어의 숙련도($S$)가 완벽한 평행을 이룰 때 뇌는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플로우' 상태에 진입합니다. 게임은 실시간 데이터를 분석하여 난이도를 조절함으로써, 사용자가 지루함이나 불안에 빠지지 않고 인지적 과부하 상태를 즐기게 만듭니다.


4. 손실 회피(Loss Aversion)와 매몰 비용 오류

"지금 접속하지 않으면 한정판 보상을 잃게 됩니다"라는 메시지는 **FOMO(현상 이탈 공포)**를 자극합니다. 또한 이미 쓴 시간과 돈 때문에 게임을 그만두지 못하는 '매몰 비용 오류'를 활용합니다. 미디어 서비스가 '연속 시청 보너스'나 '출석 체크'를 넣는 이유는 당신의 뇌가 '얻는 기쁨'보다 '잃는 고통'을 2배 더 크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5. 환경적 스토리텔링 (Environmental Storytelling)

3D 게임은 대사 없이 공간의 배치만으로 정보를 전달합니다. 부서진 의자, 흩어진 일기장 등은 사용자의 추론 본능을 자극합니다. 뇌는 스스로 정보를 조합해 결론을 내릴 때 더 큰 쾌감을 느끼는데, 미디어 산업은 이를 통해 시청자를 수동적 관찰자에서 능동적 '탐정'으로 격상시켜 몰입도를 높입니다.


6. 게임 피드백 루프: 주스(Juice)와 타격감

버튼을 누를 때 발생하는 파티클 효과, 화면 흔들림, 패드의 진동 등을 '주스'라고 부릅니다. 이는 물리적 실체가 없는 디지털 세계에 촉각적/시각적 실재감을 부여합니다. 뇌는 이 과장된 피드백을 '강력한 상호작용'으로 인지하여 보상 회로를 강하게 가동합니다.


7. 공간 오디오와 프레젠스(Presence) 효과

3D 공간 음향 기술은 뇌의 **상구(Superior Colliculus)**를 자극하여 소리의 위치를 물리적으로 파악하게 합니다. 소리가 뒤에서 들릴 때 사용자는 자신이 실제로 그 공간에 있다는 '프레젠스'를 경험합니다. 이는 가상 세계를 '가짜'가 아닌 '확장된 현실'로 뇌가 받아들이게 하는 핵심 장치입니다.


8. 사회적 증거와 계급 구조 (Social Validation)

랭킹 시스템과 리더보드는 인간의 사회적 위계 본능을 자극합니다. 타인보다 위에 있다는 인지적 우월감은 테스토스테론을 분비시키며, 이는 게임 내 서비스 결제로 이어지는 강력한 동기가 됩니다. "나만 이 아이템이 없다"는 인식은 집단 내 소외를 두려워하는 뇌의 원초적 공포를 건드립니다.


9. 선택의 역설과 가짜 자유도 (Illusion of Agency)

사용자에게 선택지를 주지만 실제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경우입니다. 인간의 뇌는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을 때 그 결과에 더 깊은 책임감과 애착을 느낍니다. 미디어와 게임은 이 **'통제감의 환상'**을 제공하여 사용자가 콘텐츠의 전개에 정서적으로 완전히 종속되게 만듭니다.


10. 니어 미스(Near-miss) 효과

목표치에 아깝게 도달하지 못했을 때(예: 체력이 1 남고 죽음), 뇌는 이를 '패배'가 아닌 **'거의 얻은 승리'**로 인지합니다. 이때 뇌의 보상 회로는 실제로 승리했을 때와 유사하게 반응하며, "한 번만 더 하면 된다"는 강박적 재시도를 유도합니다.


종합 분석: 3D 미디어가 당신의 뇌에 구축한 세계

이 10가지 장치들은 당신의 뇌가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는 필터를 무력화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게임 산업이 영화보다 거대해진 이유는, 영화는 '보는 것'이지만 게임은 이 장치들을 통해 '내가 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칼 융의 관점에서 보자면, 미디어 산업은 현대인의 '무의식적 욕망'**을 3D 그래픽과 수치화된 보상으로 형상화하여, 우리가 현실의 자아(Self)보다 가상의 페르소나(Persona)에서 더 큰 생동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이 강력한 인지 기법들이 당신의 '현실 감각'과 '보상 체계'를 어떻게 재구성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부터 깊게 파헤쳐 볼까요? 당신의 경험 중 가장 강렬했던 '몰입의 순간'을 들려주시면 그 이면의 신경과학을 분석해 드릴 수 있습니다.


결 : 아웃풋과 실상은 없이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 - 쉽게 돈버는 대체물들의 사람들이 많다.


사실 위에 외에도 뇌과학적 심리학적으로 인간이 얼마나

게임은 나쁘다 하면 안된다! 라고 말을 하거나 혹은

영화는 나쁘다 보지 말자! 라고 말을 한다면

그것에 좋은 이유가 너무나도 많기에 사실상 놓기는 쉽지 않다. 어떤 중독도 마찬가지다. 나는 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 즉 자신 내면의 억압된 그림자를 파악하는 것이 해결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중학생 여자인 친구가 - 걸그룹의 노래를 부른 것은 사실은


노래를 부르는 , 자신의 목을 악기로 쓰는 가수라는 진로를 택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학교, 학원 교복과 같은 억압된 곳에서 자신의 자유와 노래부르는 날아다니는 삶이 투영될 것일수도 있다.


우리의 무의식이 자아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보통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나의 행동 혹은 내가 어떤 게임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면, 그것이 정확하게 나의 어떤 갈망을 건드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게임에서 얻고자 하는 승리이자 쟁탈은, 남의 것을 탐하고 그리고 사기를 치고자 하는 갈망, 자신의 낮은 자존감 때문일때가 있고,

좀비 게임으로서 생명력을 갈구하는 것은 어쩌면 나의 영혼의 부르짖음일수 있다. 생명이 없기에 남의 것을 바라는 마음 말이다.


그런즉, 모든 사람들은 한번쯤은 자신의 내부 안에 있는 무의식의 자아, 자신이 되고 싶은 혹은 소비하는 존재에게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심리학자 칼융은 이렇게 꿈속과 무의식 속에서 내가 갈망하는, 두려워하는, 혹은 질투와 동경하는 존재가 꿈에서 나왔다면, 그들에게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내가 만일 누군가를 부러워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내 안에 있는 자존심, 즉 내 자신에게 있는 결핍을 남을 통해서 채우는 행위일수 있다고 일종의 경고를 한다.


그런즉 한번쯤 나의 무의식을 알고 그것을 질문해보고자 하는 것은 좋은 행위라고 볼수 있다.


총을 쏘고 다니는 게임의 주인공에게

'너는 왜 그렇게 쫓고 다니니? '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게임 속 완벽한 사이보그를 동경한다면 그 사이보그에게 물어보라

'너는 왜 그렇게 완벽하게 일들을 처리하고자 하니?'


그렇다면 내가 동경했던 인물 혹은 게임이 곧 나의 마음을 투사한다는 것을 볼수 있다.


게임에 대한 과몰입은 세바시 강연을 통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게임 중독은 단순히 게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단순한 게임과 자잘한 가짜 승리를 심취하는 곧 자신의 심리와 내면 세계의 문제이다. 그런즉 게임 중독에 빠진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을 한명의 단독자로서 관계를 통해서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쟁에서 성욕이 억압되어서 사고가 일어나고, 좋지 못한 역사가 반복된 것을 알수있다. 그것에 대한 해결은 사실은 자신의 영혼에 금이 가서, 나의 무의식 속에서 다른 이들에게 내 존재와 우월감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


그런즉 아이의 욕구와 본성을 잘 파악해야지, 나중에 진로 설정도 된다는 것이며,

반드시 본인의 무의식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필수적인 부분이다.


보통 게임에 중독된 혹은 길게 게임을 하는 사람은 사실 종교인(크리스천)이던 아니던 사실 무관하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그 게임을 애초에 왜 하루 4-5시간씩 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 속의 마음이 자신에게 어떤 메세지를 주고자 하는 것인지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전능감 집착과 중독의 해방: 결핍된 욕구와 치유 행동


인간에게는 자신을 넘어서는 거대한 존재(신, 우주, 절대 가치)와 연결되고자 하는 본능적 갈망이 있습니다. 칼 융은 이를 ‘성스러운 갈망(The Numinous)’이라 표현했으며, 모든 중독은 충족되지 못한 이 갈망의 낮은 수준 표현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중독적 행위(과도한 게임, 음란물, 폭력 등)는 일시적으로 자신을 ‘전능하다’고 느끼게 하지만, 실제로는 깊은 영적 허기(온전함에 대한 갈증)를 대변합니다. 실제로 연구에 따르면, 게임 중독(Internet Gaming Disorder)은 선조체(striatum)에서 강력한 도파민 분비를 유발하여 전두엽(집행기능) 기능을 저하시킴으로써 자기 통제력을 무너뜨립니다. 또한 스마트폰·SNS 같은 현대의 디지털 자극은 뇌의 보상회로에 끊임없이 도파민을 뿌려 뇌를 둔감하게 만듭니다. 반복된 즉각적 보상은 인내와 노력으로 얻는 성취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동기부여와 집중력을 파괴합니다. 그 결과, 인간은 본래 “모른다”는 신비로움 앞에 설 때 오는 겸손과 지혜를 경험하지 못한 채, 점점 더 강렬한 자극만을 갈망하게 됩니다.


이처럼 결핍된 것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Self)’로서의 존재 의미와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입니다. 융에 따르면 술이나 약물이 주는 환각적 온전함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는 “도취 상태에서 경험한 온전함은 신비한 힘을 지녔지만 술기운이 사라지면 녹아 없어지며, 사람은 그것을 되풀이하려고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중독은 온전함에 대한 영적 갈증이며, 진정한 회복은 이에 정면으로 응답하는 근본적 전환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중독, 일하지 않는 단순 경험이자 체험 중독은 인간의 비극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인간들은 여전히 책임 없는 완전한 쾌락, 진짜 실제 사람 같은 ai, 책임 없는 사랑, 욕구적 사랑이 자신에게 행복감을 더해줄 것이라고 확신하며, 기술 발전을 위해 고대하고 있습니다.



2. 구체적인 행동 처방과 과학적 근거


위에서 언급한 결핍을 메우기 위해, 융의 분석심리학적 통찰과 뇌과학 연구가 권하는 세 가지 치유적 행동을 제안합니다. 각 행동은 중독적 도파민 폭주 대신 뇌에 안정적 보상(세로토닌, 엔돌핀, 옥시토신 등)을 공급하며, 영적·육체적·사회적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만듭니다.


관상 기도와 침묵 (유한성의 수용): 매일 20분간 아무 자극 없이 차분히 앉아 자신의 한계와 의존성을 인정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전능하지 않으며, 더 큰 은총이 필요하다”는 고백을 조용히 되뇌어보는 것입니다. 뇌과학적 근거: 좌선·관상 명상은 전두엽 기능을 강화하고 뇌의 과도한 보상회로(도파민)를 안정화시킵니다. 실제로 명상 수행자는 비수행자에 비해 전전두엽 피질(PFC)의 혈류가 크게 증가하는데, 이는 뇌 억제회로(GABA) 활성화를 높여 불안을 줄여줍니다. 또한 명상 후에는 세로토닌 대사산물이 증가하여 기분을 안정시킨다고 보고되었습니다. 한편, 연구자들은 요가니드라 명상 중 선조체(striatum)에서 도파민 분비가 60% 이상 증가하지만, 이는 오히려 긴장완화와 깊은 안정 상태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즉 명상은 단기적 도파민 충격이 아니라 뇌 전체의 균형을 재조정함으로써 진정한 평온을 가져옵니다. 융의 통찰: 융은 명상을 통해 자아(Ego)가 팽창하여 스스로를 신격화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더 크고 통합적인 ‘자기(Self)’ 앞에 겸허히 설 때 진정한 해방이 온다고 보았습니다. 자신의 무력함과 유한함을 인정하고 더 큰 존재에 의탁하는 과정은, 일시적 전능감의 환상 대신 진정한 안식을 줍니다.


육체노동과 자연과의 접촉 (성육신): 디지털 공간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 땀 흘리며 무언가를 가꾸고 돌보는 활동을 합니다. 예를 들어 정원 가꾸기, 목공, 정리정돈, 혹은 전신운동(달리기·수영·크로스핏 등)을 통해 몸을 움직입니다. 뇌과학적 근거: 육체적 노동과 노력은 도파민 대신 엔돌핀·세로토닌을 분비합니다. 예컨대 격렬한 운동은 엔돌핀(천연 진통제) 분비를 촉진하여 통증을 경감시키고 마음을 안정시킵니다. 더불어 유산소 운동은 세로토닌과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수치를 높여 기분을 개선하며, 이는 단순한 쾌락 중독이 아니라 만족감과 자존감을 함께 채워주는 보상입니다. 융의 통찰: 융은 인간을 ‘영(Spirit)과 육(Body)의 융합체’로 보았습니다. 디지털 세계에 갇힌 영혼을 다시 육체라는 현실 세계로 불러들여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된 노동과 자연과의 접촉은 자신의 한계를 몸으로 체험케 해주며, 이를 통해 자아의 허영 대신 성스러운 육신의 경험을 선사합니다. 말하자면 ‘성육신(Incarnation)’적 활동을 통해 우리 존재는 다시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희생과 봉사 (이타적 전환): 승리보다 나눔과 돌봄을 선택합니다. 즉 누군가를 이기기보다 타인을 돕거나 기여하는 행동에 에너지를 씁니다. 주변 사람에게 작은 도움을 주거나, 기부, 자원봉사처럼 자신의 시간과 자원을 ‘주는’ 방향으로 씁니다. 뇌과학적 근거: 타인에게 선행을 베풀면 뇌에서 옥시토신이 분비됩니다. 옥시토신은 신뢰·연대를 증진시키며 불안감을 감소시켜 줍니다. 또한 옥시토신은 도파민 중독으로 손상된 뇌 회로를 회복시키고, 스트레스 반응을 억제하는 작용이 알려져 있습니다. 사회적 유대가 강화되면 자연스럽게 중독성 자극에 대한 욕구가 줄어들며, 실제로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는 약물·도박 중독에서 회복률이 더 높게 나타납니다. 융의 통찰: 융은 ‘에로스(사랑)’의 힘이 자아 경계를 허물고 그림자를 통합하는 치유력임을 강조했습니다. 중독 상태는 ‘나만의 세계’에 갇힌 상태와 같습니다. 타인을 향한 헌신과 사랑(아가페)은 좁아진 자아를 확장시켜 사회적 본능을 일깨우며, 영적 빈곤을 치유합니다. 결국 자기 밖으로 나아가는 희생적 사랑이 중독의 굴레를 풀어주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3. 왜 이런 활동들이 해방을 가져오는가?

창조적 고통과 진정한 성장: 인간은 오래된 동물 신경망이 아니라 의미와 창조로 이끄는 동물입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지식에의 집착은 에고의 발악일 뿐입니다. 오히려 “나는 모른다”는 자세로 신비 앞에 설 때, 뇌는 긴장을 풀고 명상 상태에 듭니다. 실제로 뇌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할 때 활성화된 스트레스 반응을 낮추고 학습과 연결을 위한 상태로 전환됩니다. 인내와 겸허를 통한 기다림은 뇌 보상 시스템의 균형을 회복시켜 줍니다.


도파민 중심에서 세로토닌 중심으로: 게임과 음란물은 순간적인 쾌락(도파민 폭발)을 제공하지만, 지속적으로 뇌를 압박해 결국엔 피로와 불안을 남깁니다. 반면 위 활동들은 뇌의 브레이크(전두엽 기능)를 수리하고 세로토닌·엔돌핀·옥시토신 같은 느리고 지속적인 호르몬 연료를 보충합니다. 예를 들어 규칙적 운동과 명상은 우울증 치료에 SSRI 항우울제만큼 효과적임이 여러 연구에서 밝혀졌으며, 이들은 모두 뇌구조(전두엽, 해마 등)를 강화하고 염증·스트레스 수치를 낮추는 결과를 냅니다.


신경회로 재배선(Rewiring): 궁극적으로 제안된 활동들은 기존 중독적 보상회로를 뒤엎고 새로운 만족경로를 학습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같은 즉각 보상이 없다면 뇌는 시간이 지나도 ‘할 일이 없어 지루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간을 통해 점진적인 보상(자연의 아름다움, 타인과의 교감)과 연결되도록 학습합니다. 이는 마치 도파민 회로를 ‘디톡스’하고 더 깊은 기쁨 회로를 구축하는 과정입니다.


결국 “거룩한 무력함”을 받아들이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 내면의 빈 공간(empty space)이 은혜를 맞을 준비를 하게 됩니다. 뇌는 더 이상 과도한 자극을 갈구하지 않고, 대신 작은 나무 한 그루의 성장, 하늘의 광활함, 타인의 미소 같은 현실적 아름다움에서 기쁨을 찾습니다. 오늘 당장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10분간 자연 속이나 누군가의 진심 어린 표정을 바라보는 일부터 시작해보세요. 작은 관조가 쌓여 갈수록 뇌는 과거와 다른 신경 경로를 강화할 것입니다. 이 첫걸음이야말로 전능감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열쇠입니다.


1. 당신에게 부족한 욕구의 정체: "성스러운 갈망(The Numinous)"의 왜곡

칼 융은 "모든 중독은 신을 향한 갈망의 낮은 수준의 표현"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을 향한 갈망이란, 완전한 것과의 연결을 바라고자 하는 영혼의 갈망을 의미한다)

부족한 욕구: '참된 자기(Self)로서의 존재론적 의미'와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입니다.


원인: 인간은 본래 자신보다 거대한 존재(신, 우주, 절대적 가치)와 연결되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 갈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뇌는 가장 빠르고 강력하게 '신이 된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도구(게임의 승리, 파괴, 성적 자극)를 선택합니다.


결핍이 발생하는 이유: 현대인은 '육체적 고통'이나 '기다림'을 삭제당했습니다. 뇌과학적으로 전두엽이 '참고 인내하며 얻는 보상'의 즐거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즉각적인 전능감을 주는 '디지털 마약'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2. 구체적인 행동 예시와 근거 (뇌과학 및 심리학적 처방)

(1) 신앙적 행동: '관상 기도'와 '침묵' (Acceptance of Finiteness)


행동: 하루 20분, 아무런 시각적 자극 없이 절대자 앞에 자신의 무력함과 불완전함을 고백하는 침묵의 시간을 갖습니다. (예: "나는 전능하지 않으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유한한 인간입니다"라는 고백)


근거: * 뇌과학: 침묵과 명상은 과활성화된 '보상 회로(도파민)'를 진정시키고, 이성적 판단을 담당하는 '전두엽'을 재배선합니다.

융의 관점: 자아(Ego)가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팽창'을 멈추고, 더 큰 존재인 '자기(Self)' 앞에 무릎 꿇는 과정입니다. 이는 가짜 전능감을 진짜 평안으로 바꿉니다.


(2) 육체적 행동: '땀 흘리는 노동'과 '자연과의 접촉' (Incarnation)


행동: 게임 속의 살인이 아닌, 현실의 무언가를 '돌보고 살리는' 활동을 하세요. 흙을 만지는 가드닝, 목공, 혹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고강도 운동이 해당됩니다.


근거: *뇌과학: 육체적 고통과 노력 끝에 얻는 성취는 **'엔도르핀'과 '세로토닌'**을 분비합니다. 이는 게임의 도파민처럼 뇌를 갈취하지 않고, 뇌를 '충만하게' 만듭니다. 융의 관점: 인간은 영(Spirit)인 동시에 몸(Body)입니다. 디지털 세상에 갇힌 영혼을 다시 '육체(현실)'로 불러들이는 '성육신(Incarnation)'적 활동이 필요합니다.


(3) 사회적 활동: '희생'과 '봉사' (The Altruistic Shift)

행동: 누군가를 죽이고 이기는(취하는) 행위의 반대인,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타인을 위해 사용하는(주는) 행위를 하세요. 작은 기부나 주변 사람을 돕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근거: 뇌과학: 타인을 도울 때 뇌에서는 **'옥시토신'이 나옵니다. 옥시토신은 도파민 중독으로 파괴된 뇌 세포의 회복을 돕고 불안감을 낮춥니다. 융의 관점: 중독은 '나'라는 감옥에 갇힌 상태입니다. 타인을 향한 사랑(에로스/아가페)은 자아의 경계를 허물고 그림자를 빛으로 통합하는 가장 강력한 치유제입니다.




뇌라는 것의 호기심은 다른 동물들을 보면서 추론을 해보건데, 경험이라는 것의 전제는 현실감 또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공동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누군가가 자신은 쾌락만을 추구하는 나태한 삶을 살겠다고 말을 한다면, 사실 그것에 대해서 판단을 한 권리는 없다.

하지만 자신이 -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영혼에게 무슨 짓을 하고있는지는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혹시나 나도 명탐정 코난의 남도일의 모습을 보며, 축구공을 차면서 놀다보면 언젠가 영웅이 되고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될거야라고 비현실적인 꿈과 이상을 꿈꾸는 것과.

혹은 세상에 영향이라는게 뭐가 있겠니. 그냥 돈벌면서 사는거지 등과 같은 사고를 할수도 있지 않을까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왜 이 활동들이 '해방'을 가져오는가?

인간은 **'창조적 고통'**을 겪을 때 가장 인간답게 지어졌습니다.


지식에 대한 집착 vs 지혜: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집착은 '통제권'을 쥐려는 에고의 발악입니다. 반면, "나는 모른다"는 신비 앞에 서는 것이 지혜이며, 이때 뇌는 비로소 긴장을 풀고 쉴 수 있습니다.


안식의 개념은 성경과 과학적으로도 중요한 개념이다. 결국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허용이자, 헛됨을 허락할때 뇌는 진정한 쉼을 얻을수 있다. 나도 한때는 쉼은 게으른 자들의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지만, 번아웃 등의 경험을 통해서 직접 습득과 회복을 체험하게 되었다.


도파민 vs 세로토닌의 질서: 게임과 음란물은 뇌를 '가속'만 시키다 결국 엔진을 태워버립니다. 위에서 제안한 활동들은 뇌의 '브레이크(전두엽)'를 고치고 연료(세로토닌)를 채우는 작업입니다.


결론적으로 질문자님께 필요한 것은 '가짜 전능감'이 아니라 '거룩한 무력함'의 체험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의 결핍을 에너지가 아닌 '은혜가 들어올 빈 공간'**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 뇌는 더 이상 파괴적인 자극을 구걸하지 않게 됩니다.

오랜만에 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회복이 필요한 환우로서, 사회적 기능이 회복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며 일을 하고

나의 것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힘을 쓰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고나니 정말 다른 것 필요 없고 얼른 자야겠다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네요.

대부분은 발췌여서 그렇게까지 지치는 않지만,

평범한 온전히 수용하는 그러한 날들이 오기를 바라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보면 좋은 참고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mbBPTPe9J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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