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게, 고등학교 축제 전날이었다.
방과 후 학교에 남아 독서토론 동아리(였지만 수다 동아리로 불림) 단도직입 멤버들과 축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날씨가 계속 우중충하더니 비가 조금 내렸고, 축제 때 야외 시화전을 계획하고 있었던 우리는 비가 와서 걱정…은 무슨 그냥 교실에서 신나게 페인트칠 같은 걸 하고 있었다. 내일이 축제인데 뭐가 중요해… 어차피 시화전은 명분이고 논다는 게 마냥 좋았던 고딩이었다.
암튼 저녁 무렵 비가 그치더니 무지개가 떴다. 나는 들떠있던 아이들을 뒤로하고 혼자 몰래 카메라를 챙겨서 사람이 없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창문 너머로 무지개를 찰칵찰칵 찍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우리 동아리 멤버는 아니고, 축제 준비 도와준다고 같이 남아있던 동아리 남자애의 친구가 복도 끝에서 어?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고 데면데면한 관계였던 터라, 그리고 왠지 들켰다는 부끄러움도 있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메라를 숨긴 채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아이도 아무 말 없이 그런 나를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위층에 올라온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동아리 멤버들과 어울려 페인트칠을 시작했다…
지금이야 카메라가 흔하고 아무 때나 막 들이대도 그냥 그러려니 하지만 당시만 해도 카메라라는 게 좀 시선을 끄는 물건이었다. 학교라는 공간에 일상적으로 들고 다닐만한 물건은 더더욱 아니었고. 휴대폰 카메라도 없던 시절이라 일상 스냅샷은 어림도 없었고, 기본적으로 사진이라는 건 특별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찍는 거였다. 심지어 그때 내가 들고 다닌 카메라는 홀가라는 토이 카메라였는데… 토이 카메라라니 지금도 매니악한데 당시엔 말할 것도 없지… 토이 카메라라는 인식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어쨌든 다 같이 모여 놀면서 페인트칠 같은 걸 하다 보면 최후엔 모두가 예상하는 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야 만다. 꺅꺅대며 서로를 향해 붓질하고 던지고 뿌리고 사이좋게 손도장도 찍고 결국 우린 전부 만신창이가 되었지.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소강상태로 다 같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데 아까 아래층에서 내가 사진 찍는 걸 목격한 그 남자애가 아, 이럴 때 카메라 있으면 좋은데! 라고 하는 거였다… 흘리듯 얘기했고 다들 흘려들었지만, 날 저격한 얘기란 걸 알았기 때문에 혼자 뜨끔했고… 결국 난 끝끝내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좀 아쉽네. 뭐가 그리 부끄러웠다고.
사실 유난스러워지는 게 싫었던 거 같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토이 카메라라는 물건은 광량이 부족한 실내에선 사진이 잘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홀가는 일반 필름이 아니라 중형 필름을 사용하는데 아무래도 좀 레어한 필름이다 보니 필름값도 비싸고(고딩이 돈이 어딨어) 현상하려면 충무로 사진관까지 가야 하는 귀찮음을 감수해야만 했다… 또 홀가는 촬영 사이즈를 6x4나 6x6 둘 중 하나로 설정할 수 있는데 6x6 사이즈로 촬영하게 되면 한롤에 12컷 밖에 못 찍는다…는 어쩐지 부끄러웠던 그때의 나를 위한 변명.
하긴 12컷 밖에 찍을 수 없었기 때문에 셔터를 누르던 한 장 한 장의 기억이 유난히 생생한 거 같다. 그 카메라에 달린 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한 없이 가벼운 셔터였지만 당시의 나고딩(…)에겐 돈+귀찮음+컷 수 제한이 걸린 매우 무거운 셔터였기에.
암튼 옛날 사진을 찾다 뜬금없는 걸 발견해서 새벽에 추억 보정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