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재난 SF 단편 by Claude AI
그해 여름은 혹독하게 추웠다.
6월의 서울 기온이 영하 5도를 가리키던 날, 한서진은 세 겹의 패딩을 입고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는 한여름에 내리는 눈발이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여름이 아니었다. 계절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다.
"극지방 빙하가 녹아서 멕시코 만류가 멈췄다는 건 십 년 전에도 알고 있었잖아요."
후배 연구원 민지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에 든 따뜻한 커피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지만, 그의 손끝은 여전히 창백했다.
"알고 있었지. 하지만 이렇게 빨리, 이렇게 급격하게 올 줄은 몰랐어."
서진은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전 세계 기온 지도가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얼룩져 있었다. 적도 지역은 섭씨 50도를 넘나들고, 중위도 지대는 한겨울보다 추웠다. 지구의 열 순환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식량 비축분은 얼마나 남았죠?"
"정부 발표로는 석 달. 실제로는... 한 달 반 정도일 겁니다."
서진은 눈을 감았다. 농작물이 자랄 수 없는 날씨가 이미 여섯 달째 이어지고 있었다. 온실도 소용없었다. 전력망이 불안정해지면서 난방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순간, 모든 작물이 동사했다.
삐-익, 삐-익.
갑자기 경보음이 울렸다. 서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소리는 하나밖에 없었다. 난민 이동 경보.
"또 올라오는 건가요? 남쪽에서?"
민지우가 창가로 달려갔다. 멀리 한강 너머로 검은 인파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적도의 폭염을 견디지 못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북쪽으로, 조금이라도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이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쪽 사람들도 이미 한계였다. 얼어붙은 여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서진은 서랍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3년 전 여름, 해운대 백사장에서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그때는 여름이 정말 여름이었다. 뜨거운 햇살, 시원한 바닷바람, 아이들의 웃음소리.
"교수님, 우리 프로젝트... 성공할 수 있을까요?"
민지우의 질문에 서진은 고개를 들었다. 지하 3층 실험실에는 인류 최후의 희망이라 불리는 대기 순환 복원 시스템의 프로토타입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가동하려면 지금 남은 전력의 70퍼센트가 필요했다. 그 말은 곧 수천 명이 얼어 죽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해봐야지. 안 하면 우리 모두 죽으니까."
서진은 패딩 지퍼를 목까지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에서는 여름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잔인한,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눈발이.
지하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어둡고 습했다. 비상 발전기만 가동되는 시간대라 복도의 조명은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서진과 민지우는 말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각자의 머릿속에서 같은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7만 명의 목숨과, 70억 인구의 미래.
"교수님."
갑자기 민지우가 멈춰 섰다.
"제 가족이 5구역에 있어요. 전력이 끊기면..."
서진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돌릴 수가 없었다. 자신의 딸 수아도 같은 구역에 있었다. 열두 살 딸아이가 추위에 떨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도 알아."
그것뿐이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실험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예상치 못한 광경과 마주했다. 보안 도어가 열려 있었다. 그리고 안에서는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서진 박사님."
중앙의 남자가 일어섰다. 정부 긴급대책본부의 총책임자 강민혁이었다. 그의 옆에는 군복을 입은 장성과, 낯익은 얼굴의 여성이 서 있었다. 재벌 기업 현대기후산업의 대표 차윤희였다.
"어떻게 여기를..."
"보안 권한은 내가 더 높습니다, 박사님." 강민혁이 차갑게 말했다. "프로젝트 엘피스. 당신이 정부 허가 없이 진행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서진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엘피스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대기 순환을 복원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 차윤희가 비웃듯 말했다. "7만 명을 얼려 죽이는 게 희망이라고요? 그 7만 명 중에는 대통령도 있고, 재벌 총수들도 있고, 국회의원들도 있습니다. 당신은 누가 살고 죽을지 선택할 권한이 없어요."
"그럼 70억이 다 죽기를 기다리자는 겁니까!"
서진의 목소리가 실험실에 울려 퍼졌다. 민지우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진정하세요, 박사님." 장성이 나섰다. "우리는 당신을 체포하러 온 게 아닙니다.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장성이 태블릿을 건넸다. 화면에는 한반도 지도가 떠 있었고, 여러 지점이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난민이 120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우리는 그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미 부산과 대구가 함락됐어요. 일주일 안에 서울이 포위될 겁니다."
"그게 저랑 무슨..."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십시오." 강민혁이 끼어들었다. "엘피스를 가동하는 대신, 우리가 지정한 구역의 전력을 차단할 수 있게 해 주세요. 5구역이 아니라... 난민 수용소의 전력을 끊는 겁니다."
서진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건... 그건 300만 명입니다. 이미 살 곳을 잃고 온 사람들을..."
"우리 국민이 아닙니다." 차윤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들을 위해 엘피스를 가동하는 겁니다. 당신 딸도 살릴 수 있어요."
민지우가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그를 돌아봤다. 후배의 눈에는 절박함과 죄책감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서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입니다.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선택하세요, 박사님." 강민혁이 시계를 봤다. "1시간 후면 난민 선봉대가 한강을 건넙니다. 그전에 전력을 재분배해야 합니다. 엘피스를 가동할 건지, 아니면 이 프로젝트를 포기할 건지. 포기한다면 당신은 체포될 것이고, 우리는 군사력으로 난민을 막을 겁니다."
"군사력으로?"
장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강 교량 폭파와 방어선 구축입니다. 예상 사상자는... 더 많을 겁니다."
서진은 프로젝트 엘피스의 메인 콘솔을 바라봤다. 거대한 원통형 장치가 희미한 청색 빛을 내뿜고 있었다. 수년간의 연구, 인류의 희망,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목숨들.
그의 손은 주머니 속 사진을 만졌다. 수아의 웃는 얼굴.
"저는..."
서진은 콘솔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화면을 켰다. 엘피스의 전력 소비 프로파일이 3D 그래프로 떠올랐다.
"당신들은 모두 틀렸습니다."
"뭐라고?" 강민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피스는 70%의 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죠? 그건 최대 출력 시나리오입니다." 서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제가 6개월 동안 최적화 작업을 했습니다. 민지우."
"예, 교수님!"
민지우가 달려와 다른 콘솔을 켰다. 그의 손도 떨리고 있었지만, 손가락은 정확하게 움직였다.
"단계적 기동 프로토콜을 사용하면 초기 전력 소비를 52%까지 낮출 수 있습니다. 완전 가동까지는 72시간이 걸리고, 그동안 효율은 떨어지지만 대기 순환 복원은 시작됩니다."
차윤희가 팔짱을 꼈다.
"그래도 52%잖아요. 여전히 수만 명이 죽는다는 얘기예요."
"맞습니다. 그래서..." 서진이 새로운 화면을 띄웠다. "전력 소비 패턴을 재분석했습니다. 현재 서울 전력망의 28%가 실시간으로 소비되지 않고 있어요."
"무슨 소리입니까?" 장성이 다가왔다.
"빈 건물들의 대기전력, 가동되지 않는 산업 시설, 이미 폐쇄된 상업 지구... 전력망은 살아있지만 실제로는 쓰이지 않는 전력입니다. 6개월 전 급격한 한랭화 이후 수많은 시설이 폐쇄됐지만, 전력 배분 시스템은 업데이트되지 않았어요."
민지우가 리스트를 띄웠다.
"강남 업무 지구 - 폐쇄율 73%, 하지만 전력 공급은 계속됨. 인천 산업단지 - 가동률 12%, 전력 할당은 100% 유지. 이런 식으로 전국적으로..."
"하지만 그걸 재배분하려면 전력망 전체를 재설정해야 합니다." 강민혁이 반박했다. "그런 작업은 최소 한 달이..."
"3일이면 됩니다." 서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AI 기반 전력 재분배 시스템을 이미 개발해 뒀습니다. 차 대표님."
차윤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저를 부릅니까?"
"현대기후산업이 2년 전 개발한 스마트그리드 통합 시스템. 전국 전력망에 70% 이상 설치되어 있죠. 그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으로 원격 재설정이 가능합니다."
"...그건 정부 승인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긴급 상황에서는 48시간 내에 임시 권한 행사가 가능하다고 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민지우가 법령 조항을 화면에 띄웠다. "재난안전법 제47조 3항."
침묵이 흘렀다. 강민혁이 차윤희를 봤고, 차윤희가 장성을 봤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장성이 지적했다. "52%에서 28%를 빼도 24%가 모자라요."
서진은 심호흡을 했다.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 더 필요합니다. 현대기후산업 파주 R&D센터에 있는 SPES 시스템."
차윤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3년 전 프로젝트가 중단됐어요. 상용화 실패작입니다."
"실패한 게 아니라 포기한 겁니다." 서진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 "초전도 에너지 저장 시스템. 시제품 3기가 여전히 파주에 있고, 각각 15테라와트시를 저장할 수 있습니다. 3년 전 마지막 충전 이후 방전율이 연 3%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42테라와트시 정도는 남아있을 겁니다."
"불안정합니다!" 차윤희가 소리쳤다. "3년 동안 유지보수를 안 했어요. 제어 시스템도 오프라인이고, 초전도 코일의 상태도 알 수 없습니다. 폭발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직접 가서 확인해야 합니다." 서진이 말했다. "SPES를 안전하게 가동할 수 있다면, 엘피스에 필요한 나머지 24%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도 죽지 않습니다."
"파주는 지금 난민 통제선 너머입니다." 장성이 지도를 가리켰다. "그곳까지 가는 것 자체가..."
"그럼 호송해 주십시오." 서진이 장성을 똑바로 쳐다봤다. "저와 민지우, 그리고 SPES 시스템을 아는 기술자 몇 명만 있으면 됩니다."
"미친 짓입니다." 강민혁이 고개를 저었다. "성공 확률이..."
"실패하면 원래 계획대로 하시면 됩니다." 서진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누군가를 죽이는 선택을. 하지만 그전에, 아무도 안 죽이는 방법을 시도해 볼 기회를 주십시오. 72시간만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강민혁이 차윤희를 봤다.
"대표님, SPES가 정말 작동할 수 있습니까?"
차윤희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서진이 말했다. "이게 우리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6시간 후, 파주로 가는 군용 트럭 안.
민지우는 5명의 엔지니어들과 함께 덜컹거리는 트럭에 앉아 있었다. 원래는 10명을 데려가려 했지만, 현대기후산업에서 SPES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인력 중 5명만이 남아있었다. 나머지는 이미 난민이 되었거나, 사망했거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밖에서는 총성이 들렸다. 난민들과 군의 충돌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교수님."
옆자리의 젊은 엔지니어 김태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할 수 있을까요? SPES는 3년 동안 방치됐어요. 냉각 시스템도 작동을 멈췄을 텐데..."
"초전도 코일은 액체헬륨으로 냉각됩니다." 민지우가 노트북을 열며 설명했다. "밀폐된 순환 시스템이라 외부 전원이 끊겨도 최소 5년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어요. 문제는 제어 시스템입니다."
"전원이 3년 동안 끊겨있었는데, 재부팅이 될까요?"
"안 되면 수동으로 해야죠."
트럭이 갑자기 멈춰 섰다. 앞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전방에 난민 무리! 최소 3천 명!"
운전석에서 박 대위가 내렸다. 민지우도 트럭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눈보라 속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남루한 옷을 입은 채, 얼어붙은 얼굴로.
그리고 그들은 트럭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발포 준비!" 박 대위가 소리쳤다.
"안 돼요!" 민지우가 뛰어내렸다. "그 사람들은 무장하지도 않았어요!"
"명령입니다!" 박 대위가 민지우를 밀쳐냈다. "통과를 방해하는 자는 제압한다!"
민지우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여기서 총격이 벌어지면,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그리고 난민들이 흩어지지 않으면 파주까지 갈 수 없다.
"잠깐만요!"
민지우가 군인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확성기를 들었다.
"여러분! 저는 한국기후연구원의 민지우입니다!"
난민들이 멈춰 섰다. 수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했다.
"저희는 지금 기후를 되돌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파주 연구소에 가야 합니다. 그곳의 장비를 가동해야 여름이 다시 따뜻해지고, 겨울이 다시 추워집니다. 계절이 돌아옵니다."
"믿을 수 없어!"
군중 속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중년의 남자였다. 거친 베트남어 억양이 섞인 한국어였다.
"당신들은 우릴 버렸어! 남쪽에서 얼어 죽을 때 국경을 닫았잖아!"
"맞습니다." 민지우가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틀렸습니다. 제가 사과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겠죠. 하지만..."
그가 배낭에서 태블릿을 꺼내 화면을 보여줬다. 엘피스의 설계도와 시뮬레이션 결과였다.
"이 시스템을 가동하면 3개월 안에 기후가 안정됩니다. 전 세계적으로요. 한국만이 아니라 베트남도, 태국도, 필리핀도. 모두 다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길을 막으면, 그 기회가 사라집니다."
침묵이 흘렀다.
"당신 말을 믿으라고?" 군중 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여성이었다.
"아니요." 민지우가 고개를 저었다. "믿으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함께 가시겠습니까?"
"뭐?"
"저희는 SPES라는 오래된 에너지 저장 시스템을 가동해야 합니다. 3년 동안 방치된 장비입니다. 솔직히 5명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어요. 여러분 중에 전기 기술자가 있습니까? 기계공? 엔지니어?"
난민들이 웅성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몇 명이 손을 들기 시작했다.
"저는 전력망 엔지니어였습니다." 처음 소리쳤던 베트남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응우옌입니다. 하노이 전력공사에서 15년 일했어요."
"물리학 박사예요." 인도 억양의 여성이 손을 들었다. "프리야. 뭄바이 공대에서 초전도체 연구했습니다."
"기계 수리공." 젊은 태국 남자가 나타났다. "솜차이예요. 뭐든 고칠 수 있어요."
민지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감사합니다. 트럭에는 20명까지 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파주 연구소는 넓습니다. 난방 시설도 있고, 비축 식량도 있어요. 성공하면... 여러분도 따뜻해질 수 있습니다."
박 대위가 민지우의 어깨를 잡았다.
"이건 규정 위반입니다. 신원 확인도 안 된 사람들을..."
"대위님." 민지우가 그를 돌아봤다. "우리가 가동하려는 시스템은 한국만을 위한 게 아닙니다. 전 세계를 위한 겁니다. 그렇다면 전 세계 사람들이 도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박 대위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숨을 쉬었다.
"내 책임입니다. 타십시오."
18시간 후, 파주 SPES 연구소.
시설은 예상보다 훨씬 나쁜 상태였다. 3년 동안의 방치로 외벽 일부가 무너져 있었고, 눈이 내부로 쌓여 있었다. 하지만 지하 저장소는 밀폐되어 있었고, 거대한 원통형 초전도 코일 3기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코일은 살아있어요!" 프리야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온도가 4.2켈빈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헬륨 순환계가 작동 중이에요!"
"하지만 제어 시스템이 문제입니다." 김태훈이 메인 콘솔 앞에서 고개를 저었다. "전원이 들어오지 않아요. 배전반 자체가..."
"이리 비켜봐." 솜차이가 나섰다. 그는 공구함을 열고 배전반 커버를 열었다. "아, 이거... 쥐들이 전선을 갉아먹었네. 3년 동안 아무도 없었으니까."
"수리할 수 있어요?" 민지우가 물었다.
"시간이 좀 걸려요. 전선을 다시 연결해야 하는데, 일일이 손으로..."
"제가 돕겠습니다." 응우옌이 공구를 들었다. "전선 연결은 제 전문이에요."
다음 36시간 동안, 다국적 팀은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일했다. 솜차이와 응우옌이 배전 시스템을 복구하는 동안, 프리야는 초전도 코일의 상태를 정밀하게 점검했다. 김태훈과 다른 한국 엔지니어들은 제어 소프트웨어를 재부팅했다.
"3호기 코일에 미세 균열 발견!" 프리야가 보고했다. "자기장 누출이 0.3%... 허용 범위지만 불안정합니다."
"출력을 80%로 제한하면 되겠어요?" 민지우가 물었다.
"해봐야 알죠. 하지만 위험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게 위험해요." 민지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48시간 후.
"연결 완료!" 응우옌이 마지막 케이블을 꽂으며 소리쳤다.
민지우는 떨리는 손으로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메인 콘솔에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모니터에 숫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호기 저장 전력: 13.7 테라와트시"
"2호기 저장 전력: 14.1 테라와트시"
"3호기 저장 전력: 12.9 테라와트시"
"총 40.7 테라와트시..." 김태훈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충분합니다! 엘피스 72시간 가동에 필요한 35 테라와트시보다 많아요!"
환호성이 터졌다. 프리야와 응우옌이 껴안고, 솜차이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었다.
민지우는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SPES 가동 준비 완료했습니다."
전화 너머로 서진의 안도의 한숨이 들렸다.
"잘했다, 지우야. 차 대표가 30분 전에 전력망 재분배를 완료했어. 이제 엘피스를 켠다. 5분 후에 SPES와 동기화 신호를 보낼게."
"교수님."
"응?"
"우리... 해냈습니다. 아무도 안 죽이고."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엘피스가 실제로 작동하는지 확인해야 해."
"성공할 겁니다." 민지우가 주변을 둘러봤다. 한국인, 베트남인, 인도인, 태국인... 20개국에서 온 난민들과 엔지니어들이 함께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니까요."
72시간 후, 서울 기후연구원 지하 3층.
엘피스가 저음의 웅웅 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동되고 있었다. 거대한 원통형 장치의 중심부에서 푸른빛이 맥박처럼 뛰고 있었다.
"대기 상층부 이온화 진행 중 - 37%"
"성층권 온도 변화 감지 - 상승세로 전환"
"북대서양 해류... 미세한 움직임 포착!"
연구원들이 긴장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서진은 메인 스크린을 응시했다. 지구 전체의 대기 순환 모델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교수님, 멕시코 만류의 유속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한 연구원이 소리쳤다. "시속 0.3킬로미터... 0.5킬로미터..."
"적도 상공 온도가 하강하기 시작했어요!"
"중위도 기온 상승 확인!"
강민혁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정말... 정말 되는 겁니까?"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3개월 동안 점진적으로 회복될 겁니다. 하지만 방향은 확실합니다. 기후가 돌아오고 있어요."
모니터의 그래프들이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극단적으로 흔들리던 선들이 점점 정상 범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성공입니다."
실험실이 조용해졌다가, 이내 폭발적인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사람들이 서로를 껴안고, 울고, 웃었다.
서진은 조용히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발이 확실히 약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구름 사이로, 6개월 만에 처음으로 하늘의 틈이 보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딸 수아였다.
"아빠! 뉴스 봤어? 기온이 올라가고 있대! 내일은 영상으로 올라간대!"
"그래, 수아야." 서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괜찮을 거야. 다 괜찮아질 거야."
전화를 끊고, 그는 한강 쪽을 바라봤다. 난민들의 행렬이 여전히 보였다. 하지만 이제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는 군인은 없었다. 대신 임시 난방 텐트와 구호 물품을 나르는 트럭들이 보였다. 그리고 멀리서 파주 방향의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차윤희가 옆에 섰다.
"당신이 옳았어요, 박사님. 저는... 저는 효율만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당신은 모두를 살리는 방법을 찾았죠."
"저 혼자서는 못 했습니다."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민지우가 없었으면, 응우옌이 없었으면, 프리야와 솜차이가 없었으면... 차 대표님이 결단을 내려주지 않았어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건 우리 모두의 성공입니다."
"앞으로 3개월은 여전히 힘들 겁니다." 강민혁이 말했다. "기후가 완전히 안정될 때까지, 식량 부족과 난민 문제는 계속될 거예요."
"알아요."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방법을 알잖아요. 함께하면 된다는 걸."
그날 밤, 서울 하늘에 변화가 일어났다. 구름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처음으로, 별빛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파주 연구소에서 민지우는 옥상에 서서 그 별들을 바라봤다. 옆에는 프리야와 응우옌, 솜차이가 함께 있었다.
"Beautiful," 프리야가 영어로 중얼거렸다.
"สวยมาก (아름답다)," 솜차이가 태국어로 화답했다.
"Đẹp quá (정말 아름답다)," 응우옌이 베트남어로 말했다.
"아름답네요." 민지우가 한국어로 마무리했다.
네 사람은 웃었다. 언어는 달랐지만, 마음은 같았다.
"우리가 정말 해냈네요." 프리야가 말했다. "세상을 구했어요."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민지우가 고개를 저었다. "3개월 동안 이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하고, 그동안 모든 사람이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해요."
"함께 하면 되겠죠." 응우옌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가 증명했잖아요. 국경도, 언어도 상관없다는 걸."
하늘에서는 별들이, 국경 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빛나고 있었다.
에필로그 - 3개월 후
5월의 햇살이 따스하게 창문으로 들어왔다. 진짜 봄 햇살이었다.
서진은 딸 수아와 함께 한강 공원을 걷고 있었다. 강변에는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오랜만에 야외를 즐기는 사람들. 아이들이 뛰어놀고, 연인들이 산책하고, 노인들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저기 봐, 아빠!" 수아가 가로수를 가리켰다. "잎이 나왔어!"
벚나무 가지에서 연두색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일부 나무에서는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찾아온 봄이었다.
"교수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민지우가 서둘러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프리야, 응우옌, 솜차이가 함께였다.
"다들 어떻게..."
"오늘 엘피스 최종 점검 미팅 있잖아요." 민지우가 웃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에게 서울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대로 된 서울을요."
"안녕하세요, 한 박사님." 프리야가 한국어로 인사했다. 어색하지만 정확한 발음이었다.
"한국어 배우셨네요?"
"네, 앞으로 여기서 일할 거니까요." 프리야가 미소 지었다. "서울대학교에서 연구 포지션을 제안받았어요."
"저도 한국전력공사에서 일하게 됐어요." 응우옌이 말했다. "전력망 복구 프로젝트 팀장으로요."
"저는 현대기후산업 정비팀에 들어갔어요." 솜차이가 덧붙였다.
서진의 눈이 촉촉해졌다.
"모두... 남기로 했군요."
"여기가 우리가 함께 세상을 구한 곳이니까요." 민지우가 한강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직 할 일이 많아요. 엘피스 시스템을 전 세계에 확산시켜야 하고, 다른 나라들도 도와야 해요."
강 건너편에는 임시 정착촌이 보였다. 난민들을 위한 주거 단지였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집과 일자리가 제공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벚꽃이 피고 있었다.
수아가 프리야에게 다가갔다.
"언니, 저도 나중에 과학자가 되고 싶어요. 언니처럼요."
프리야가 무릎을 굽혀 수아의 눈높이에 맞췄다.
"그럼 열심히 공부해야 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법을 배우는 거야.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리가 증명했잖아?"
"응!"
그들은 함께 한강변을 걸었다. 한국인, 베트남인, 인도인, 태국인. 그리고 강변에는 수십 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봄을 즐기고 있었다.
그날 저녁, 서진은 연구실에 혼자 남았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고 두 장의 사진을 꺼냈다. 하나는 3년 전 해운대에서 찍은 가족사진. 또 하나는 파주 연구소 앞에서 찍은 다국적 팀의 사진.
두 사진을 나란히 놓고 바라봤다.
첫 번째 사진은 잃어버렸던 과거를 보여줬다. 두 번째 사진은 함께 만든 미래를 보여줬다.
창밖에서는 완전히 핀 벚꽃이 저녁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은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해 여름은 혹독하게 추웠다.
하지만 그다음 봄은, 함께 만든 봄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그리고 인류는 배웠다.
위기는 우리를 갈라놓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모이게 했다.
국경도, 언어도, 피부색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우리가 함께 한다는 것.
<끝>
첫 문장 빼고 전부 클로드가 썼습니다. 이 단편소설 제작 과정은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