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훌리아 Apr 26. 2023

내 직업은 문학입니다.


집 안의 천사 죽이기 

버지니아 울프 저



나는 과연 어떤 직업상의 경험을 해온 것일까요? 내 직업은 문학입니다. 여성만이 갖는 경험이라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는 편입니다. 길은 일찍부터 나 있었지요.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같은 많은 유명한 여성들과 이름 없이 잊혀 간 훨씬 더 많은 여성들이 나보다 오래전에 그 길을 평탄하게 닦아 내 걸음을 순조롭게 해주었습니다. 글쓰기는 점잖고 무해한 일거리지요. 펜을 긁적인다고 해서 집안의 평화가 깨지지도 않고, 가계에 부담이 되지도 않으니까요. 


그때 내가 쓴 글은 어느 유명한 남성의 소설에 대한 것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 서평을 쓰던 중에 모종의 유령과 싸울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유령은 여자였고, 그녀에게 <집 안의 천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내가 서평을 쓰고 있었을 때 나와 종이 사이에 끼어들곤 하던 것이 바로 그녀였습니다.




집 안의 천사


그녀는 아주 정이 많습니다. 아주 매력적이고 자기 욕심이라고는 없습니다. 가정생활의 어려운 일들을 척척 해냈지요. 날마다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닭고기를 먹을 때면 다리를 집었고, 외풍이 들면 바람막이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녀는 자기 몫의 생각이나 소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항상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소원에 공감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정숙했습니다. 그녀가 내 등 뒤에 살며시 나타나 소곤대는 것이었습니다.



이봐요.

당신은 젊은 여성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남자가 쓴 책에 대해 글을 쓰려 하는 군요.

다정하고 상냥하게 굴어요.

아첨하고 적당히 비위를 맞추는 거예요.

우리 여성의 모든 술수와 책략을 쓰도록 해요.

당신에게 당신만의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해요.

무엇보다도, 정숙하세요.




나는 몸을 돌려 그녀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녀를 죽였습니다. 만일 내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가 나를 죽였을테니까요. 그녀는 내 글쓰기에서 심장을 움켜 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펜을 종이에 대자마자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소설책 한 권을 평하려 해도, 자기만의 생각을 가져야 하며, 인간관계와 도덕과 성에 대해 자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집 안의 천사>에 따르면 여성은 이 모든 문제를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다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성공하려면 매력적이라야 하고 환심을 사야한다. 요컨대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좀처럼 죽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허구적인 존재라는 것이 그녀를 도왔지요. 유령을 죽이기란 실재하는 존재를 죽이기보다 훨씬 어려우니까요. 그 시절의 모든 여성 작가에게 닥칠 수밖에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집 안의 천사>를 죽이는 것은 여성 작가가 해내야 할 일의 일부였습니다.




그녀 자신


내 말은, 여성이란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분명히 말해, 나도 모릅니다. 여러분도 모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예술과 직업에서 자신을 표현하기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첫 번째 서평으로 1파운드 10실링 6펜스를 벌었고, 그 수입으로  페르시아고양이를 한 마리 샀습니다. 야심이 생겨 자동차가 있어야겠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이야기하는 유명한 소설의 서평을 쓰기보다 훨씬 더 즐겁답니다. 


소설가의 정신 상태는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환상이 그 무엇으로도 깨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녀의 상상력이 깨어났을때 곤혹스러운 궁지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무엇인가 몸에 대한 것을, 여성으로서 말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정열에 대한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정열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는 여성에 대해 남자들이 뭐라고 할지를 의식하자 그녀는 예술가다운 무의식 상태에서 깨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상상력은 더는 작동할 수 없었습니다.




남자들이 충격받을 거야




여성 작가들은 남성의 극단적인 인습에 방해를 받습니다. 남성들은 자신은 그런 방면에서 큰 자유를 누리면서도, 여성들이 그런 자유를 누리는 것을 정죄함에 있어서는 얼마나 준엄한 태도를 취하는지요. 그들이 스스로 그런 태도를 깨닫고 있는지, 혹은 자제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나는 <집 안의 천사> 죽이기를 해결했고, 육체로서의 나 자신의 경험에 대해 솔직히 말하기는 해결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많은 유령과 싸워야 하고, 많은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저 앉아서 글을 쓰기까지는 정말이지 앞으로도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에게 가장 개방된 직업인 문학에서 이러하다면, 여러분이 처음으로 진입하려 하는 새로운 직업들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까지 남성들이 전유하던 집에서 자기만의 방을 획득했습니다. 이 자유는 시작일 뿐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여러분은 그 방을 어떻게 장식하고 누구와 함께하고 어떤 조건으로 공유할지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정말이지 독서에 관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은 아무 조언도 따르지 말고 자신의 본능에 따라,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여, 자신의 결론에 이르라는 것뿐이다.

버지니아 울프




도대체 책에 관한 어떤 법칙을 정할 수 있겠는가? 더 나은 작품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각자 대답해야 할 것이다.  다른 곳들에서는 법과 관습에 얽매일 수도 있겠지만, 서재에서는 아니다. 하지만 자유를 누리려면 우리는 물론 자신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힘을 되는대로 무지하게 낭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힘을 훈련하여 정확하고 강력하게 목표 지점에 쏟아야 한다. 


시와 소설, 역사와 회고록, 사전과 정부 간행 보고서, 온갖 시대와 인종과 기질의 남녀가 온갖 언어로 쓴 책들이 서가에서 서로 떠밀고 있다.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 잡다한 혼란에 어떻게 질서를 부여하고 우리가 읽는 것으로부터 가장 깊고 폭넓은 즐거움을 얻어 낼까?


흔히 우리는 막연하고 산만한 마음가짐으로 책을 접하며, 소설이 진짜이기를, 시가 거짓이기를, 전기가 아부하기를, 역사가 자신의 편견을 강화해 주기를 요구한다. 책을 읽을 때 그 모든 선입견을 추방해 버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시작이 될 것이다. 책의 저자에게 그가 해야 할 말을 부러 주지 말고, 그가 되려고 해보라. 그의 공저자, 공범이 되는 것이다. 




소설 읽는 법



소설가가 하고 있는 일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읽는 것이 아니라 실험적으로 뚜렷하게 인상을 남긴 어떤 사건, 전체적인 장면을, 그 순간에 담긴 인상 전체를 직접 써보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것은 어렵고 복잡한 기술이다. 아주 섬세한 지각뿐 아니라 대담한 상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독서란 실로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독서의 먼지가 내려앉기를 기다리자. 갈등과 질문이 죽어 없어지기를 기다리자. 걷고, 말하고, 장미에서 죽은 꽃잎을 떼어 내고, 잠드는 거다. 그러면 갑자기 우리가 의도하지 않고도 책이 돌아오되 다르게 돌아와 하나의 전체로서 정신의 꼭대기로 떠오를 것이다. 전체로서의 책은 지금 당장 부분적인 문장들로 받아들인 책과는 다르다. 


시간이 가다 보면 우리의 취향을 길들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것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온갖 종류의 책들을 탐독한 뒤 읽기를 그치고 살아 있는 세계의 다양성이나 부조화로 눈을 돌리면, 우리의 취향이 조금 달라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제 우리 취향은 그리 탐욕스럽지 않으며 오히려 사색적이 되어, 우리에게 특정한 책들에 대한 판단을 내리게 할 뿐 아니라 어떤 책들에는 공통된 성질이 있음을 말해 줄 것이다.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읽는 데 상상력과 통찰력과 판단력의 그토록 희귀한 자질이 필요하다면, 당신은 문학이란 극도로 복잡한 예술이며 우리가 설령 한평생을 독서에 바친 다음이라 해도 그 비평에 아무런 공헌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지례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독자로 남아야 한다. 독자로서의 책임과 중요성이 있다. 영향력이 창조되는 것이다. 



       

집 안의 천사 죽이기    저자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를 여성으로서, 

작가로서, 독자로서, 인간으로서 

유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버지니아 울프 산문선 4권]



제1권 『집 안의 천사 죽이기』  페미니즘적 이슈나 여성 문학론 등 여성과 관련된 테마의 글


제2권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문학에 대한 울프의 생각을 보여 주는 문학 원론에 가까운 글


제3권 『어느 보통 독자의 책 읽기』 한 사람의 독자로서 울프가 읽은 개별 문학 작품 및 작가에 대한 글


제4권 『존재의 순간들』 울프 자신의 삶이 담겨 있는 개인적인 수필이나 자전적인 글




영국 모더니즘의 대표 작가

버지니아 울프(본명 애들린 버지니아 스티븐)


188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평생 정신 질환을 앓으면서도 다양한 소설 기법을 실험하여 현대문학에 이바지하는 한편 평화주의자, 페미니즘 비평가로 이름을 알렸다. 빅토리아 시대 소위 최고의 지성들이 모인 환경에서 자랐고, 주로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았다. 비평가이자 사상가였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의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오빠 토비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한 후 리턴 스트레이치, 레너드 울프, 클라이브 벨, 덩컨 그랜트,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과 교류하며 ‘블룸즈버리 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 그룹은 당시 다른 지식인들과 달리 여성들의 적극적인 예술 활동 참여, 동성애자들의 권리, 전쟁 반대 등 빅토리아시대의 관행과 가치관을 공공연히 거부하며 자유롭고 진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어머니의 사망 후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버지의 사망 이후 울프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평생에 걸쳐 수차례 정신 질환을 앓았다. 1905년부터 문예 비평을 썼고, 1907년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에 서평을 싣기 시작하면서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파도』 등 20세기 수작으로 꼽히는 소설들과 『일반 독자』 같은 뛰어난 문예 평론, 서평 등을 발표하여 영국 모더니즘의 대표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소설가로서 울프는 내면 의식의 흐름을 정교하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 내면서 현대 사회의 불확실한 삶과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1970년대 이후 「자기만의 방」과 「3기니」가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으로 재평가되면서 울프의 저작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자기만의 방」이 피력한 여성의 물적, 정신적 독립의 필요성과 고유한 경험의 가치는 우리 시대의 인식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버지니아 울프는 픽션과 논픽션을 아우르며 다작을 남긴 야심 있는 작가였다. 그녀의 픽션들은 플롯보다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더욱 초점을 맞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해 쓰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출항』, 『밤과 낮』, 『제이콥의 방』, 『댈러웨이 부인』, 『파도』,『현대소설론』 등과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에세이 『자기만의 방』과 속편 『3기니』 등이 있다. 1927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등대로』를 발표하며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고 『올랜도』, 『물결』, 『세월』 등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쳐 왔던 울프는 1941년 독일의 영국 침공이 예상되는 가운데 정신 질환의 재발을 우려하여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마무리.


제목만 쓰다듬던 책들이 읽혔을 때의 기쁨이란 확실히 크다. 아꼈던 마음이 녹여져 있다. 그런 독서도 물론 좋지만 다 떠나보내고 나면 다시 무엇부터 시작해야 될지 전혀 방향을 잃은 채 놓여진다. 그래서 추천도서, 이달의 베스트, 이달의 추천 신간, 인문학 추천 등 그 테두리 안에서 책을 고르기도 했다. 읽기는 했는데 여전히 그 독서방향을 잡은 것 같지는 않았다. 주말에 서점을 찾아 그 전과 다르게 모르는 작가와 책을 골랐다. 전혀 모르겠는데 호기심이 드는 책들을 골라왔다. 한동안은 제목만 볼 듯 하다. 


버지니아 울프처럼 말하고 쓸 수 있다면 좋겠다. 브런치에 글을 쓸 때 가장 어렵고 두려운 건 내 안에 제단되는 말들이었다. 아직도 내 있는 그대로의 생각과 말이 매끄럽게 쓰여진 적은 없다. 아직 내 말을 못 찾았다. 어떻게 말하고 싶은지를 아직 나도 잘 모르겠으니깐 이렇게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더 읽고 말하다보면 나도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말하게 되지 않을까.


박태원 작가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패러디하여 방통대 과제물을 제출했었다. 그 소설가 구보가 내가 되어 하루의 일과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이 '전체적인 장면을, 그 순간에 담긴 인상 전체를 직접 써보는 것'을 작가처럼 말로 쓴다는 것이 어려웠다. 내가 상상한 장면을 어떻게 말로 풀어쓴다는 것인가? 여전히 이건 독자가 작가의 글을 읽고 상상하던 일의 역전이 되어서 상상하던 일을 글로 써야 하는 것인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이 같다고는 하지만 소설가의 일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경희>나혜석 '눈에 보이는 대로 그 명칭을 불러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