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면 내 명칭은 무엇인가'
일본서 졸업하고는 기어이 자기 회사의 일을 보아 달라고 하더래요. 처음에는 월급 일천오백 냥은 쉽대요. 차차 오르면 3년 안에 이천오백 냥을 받는데요. 다른 여자는 제일 많은 것이 칠백 쉰 냥이라는데 아마 그 애는 일본까지 가서 공부한 까닭인가 보아요. 저것도 그 애가 재봉틀에 한 것입니다. (중략) 종일 한 달 30일 악을 쓰고 속을 태우는 보통학교 교사는 많아야 육백스무 냥이고 보통 500냥인데 “천천히 놀면서 일 년에 병풍 두 짝만이라도 잘만 놓아주시면 월급을 꼭 사십 원씩 드리지요” 하는 말에 김부인은 과연 공부라는 것은 꼭 해야 할 것이고, 하면 조금 하는 것보다 일본까지 보내서 시켜야만 할 것을 알았다.
나 같은 것이 무얼 하나. 남들이 하는 말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닌가. 아아 과연 사람 노릇 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다. 남자와 같이 모든 것을 하는 여자는 평범한 여자가 아닐 터이다. 사천 년래의 습관을 깨뜨리고 나서는 여자는 웬만한 학문, 여간한 천재가 아니고서는 될 수 없다. 나폴레옹 시대에 파리의 전 인심을 움직이게 하던 스타엘 부인과 같은 미묘한 이해력, 요설한 웅변, 그런 기재한 사회적인 인물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다. (중략) 아아 이렇게 쉽지 못하다. 이만한 실력, 이러한 희생이 들어야만 되는 것이다.
경희는 생각할수록 그네들이 장하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도 시집가기가 어려운 것이 도무지 이상스럽다. 그 부인들이 장한가? 내가 장한가? 이 부인네들이 사람일까? 내가 사람일까? 이 모순이 경희의 깊은 잠을 깨우는 큰 번민이다. 그러면 어찌하여야 장한 사람이 되나 하는 것이 경희의 머리가 무거워지는 고통이다.
뜨거운 강한 광선이 별안간에 왈칵 대드는 것은 편싸움꾼의 양편이 육모방망이를 들고 자…… 하며 대드는 것같이 깜짝 놀랄 만치 강하게 쪼여 들어온다. 오색이 혼잡한 백일홍 활년화 위로는 연락부절히 호랑나비 노랑나비가 오고 가고 한다. 배나무 위의 까치 보금자리에는 까만 새끼 대가리가 들락날락하며, (중략) 저것! 저것은 개다. 저것은 꽃이고 저것은 닭이다. 저것은 배나무다. 그리고 저기 매달린 것은 배다. 저 하늘에 뜬 것은 까치다. 저것은 항아리고 저것은 절구다. 경희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 명칭을 불러 본다. 옆에 놓인 머릿장도 만져본다. 그 위에 개어서 얹은 명주이불도 쓰다듬어 본다. 그러면 내 명칭은 무엇인가? 사람이지! 꼭 사람이다.
- 경성을 뒤흔든 이혼고백서, “정조는 취미다” 1934년 8월 잡지 [삼천리]에 실린 글이 경성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화가 나혜석이 기고한 ‘이혼 고백서’. 나혜석은 이 글을 통해 자신의 결혼생활과 이혼 후의 삶을 밝히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다. 1년 후 그녀는 보다 파격적인 주장을 외친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오, 오직 취미이다”
- 조선 여자 유학생, 봉건을 말하다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장려한 것이다” 1914년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한 나혜석. 그녀는 유학 생활을 통해 근대적 여성상을 받아들이고 유학생 잡지에 현모양처를 부정하는 파격적인 글을 싣는다.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 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한 것이다”
- 어머니 나혜석, 금기를 말하다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 첫아이를 낳은 그녀는 ‘화가’와 ‘어머니’라는 위치에서 고뇌한다. 그리고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던 육아의 고통에 대해서 입을 연다. “잠 없고는 살 수 없다. 이런 것을 탈취해가는 자식이 생겼다 하면 이에 더한 원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 정의한다” 모성은 천성이라고 규정하는 남성들의 기존 관념을 거부하는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그녀는 모성은 인간으로서 자식과 관계를 맺으며 쌓아가는 경험적 인간관계라 주장했다.
- 이혼녀 나혜석, 제 권리를 요구하다 “조선 남성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여자에게 정조를 요구합니다” 1927년 파리 랑송 아카데미에서 미술 수업을 받던 나혜석은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중 하나이며 천도교 대표였던 최린과 추문에 휩싸인다. 이로 인해 남편 김우영과 이혼하게 된다. 여자에게 재산 분할이나 양육권의 개념조차 없던 시절, 나혜석은 돈도 명예도 자식도 잃은 상태로 이혼하게 된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정조관념이 남성과 다르다는 것을 절감한 그녀. 이에 나혜석은 정조 유린이라는 명목으로 최린을 고소한다.
- 인간 나혜석의 홀로서기 “나는 평생 처음으로 자기 힘을 의식하였고, 행복했습니다” 사회적 금기를 깨는 말들로 인해 나혜석은 사회로부터 고립된다. 가족과 친구 주변인들 모두가 떠나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내 말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1948년 12월 10일. 나혜석은 서울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사회는 그녀에게 침묵을 요구했다. 하지만 나혜석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끊임없이 세상에 말을 걸고자 했다.
출처 : KBS 한국 사전(59회) - 나는 말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나혜석 (2008.10.11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