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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Dec 21. 2018

엄청난 고독, 불확실한 책

<고독한 글쓰기> 마르그리트 뒤라스


내가 과거에도 작가였고
현재도 작가라는 사실을
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일깨워주려는 책을 쓰기 위하여.




marguerite donnadieu trubil




나를 위하여.
내가 혼자인 것은 이 집에서 뿐이다.
글을 쓰기 위하여.
내가 지금까지 써 온 것처럼 쓰지 않기 위하여.
그러나 나 자신도 모르고, 아직 결정하지도 못하고,
결코 누구에 의해서도 결정될 수 없는 책을 쓰기 위하여.

나는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내 방식만의 글쓰기가 있는 유일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삶을 충만하게 만들고 매혹시키는 유일한 일이었다.
나는 글을 썼다.
글쓰기는 나의 뇌리에서 결코 떠나지 않았다.





여기 이 책에 대한 이야기
그것이 쓰기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너와 나의 관계된 쓰기다.

너, 독자와 관계된 쓰기다.






트루빌




내가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았던 곳도 바로 트루빌이다.
트루빌은 바로 내 일생의 고독이다.


엄청난 고독.
불확실한 책.


한 권의 책은 미지의 것이고,
밤이며, 닫혀 있다.
진전이 있어 커지고,
탐구했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나아가
그 고유의 숙명과 출판으로 무화되는
저자의 운명으로 향하는 것은 바로 책.
출판은 책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
<부영사> 내 생에 있어서 처녀작이었다.
라오르, 캄보디아가 무대 배경이었다.
어머니에게 쫓겨나, 푸른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퓌르사-캄보디아의 도시명-의 산악지대를 떠도는, 임신한 열다섯 살 소녀 안나미크의 이야기다.
불행을 야기시킬 만한 가시적인 사건들도 전혀 없이, 구상, 연관성, 계획 작성도 없이 배고픔과 고통만이 있었다.
내 생에 그런 것은 결코 없었다.
내 생에, 여러 권의 책 속에서 단 한 번도 없었다.
부영사의 투쟁은 순진하면서도 혁명적이다.

  
큰 슬픔을 말해주는 책들....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 한 권의 책이 있을지)
아무것도 없을 때조차
우리가 아직 죽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거와 마찬가지로 안다.
  
죽음은 어떤 밤에 찾아온다.
죽음의 정확한 시간
전혀 예기치 않았던 것
그것을 알고 받아들였다.
  
집단의 죽음과 동시에 개체의 죽음
행성의 소멸
프롤레타리아의 소멸과 같은 사건들
전쟁에 의한 죽음
지구상의 수많은 전쟁들
  



**
우리는 누군가 쓴 책만을,
책 속에 갇혀 있는 책만을 읽을 것이다.
그러나 다가올 세기의 어느 날 우리가 파리 날갯짓을 읽게 될 때 그런 글쓰기(파리의 이해 못 할 날갯짓) 역시 해독되고 해석될 것이다.
그리고 읽을 수 없는 그 광대한 시는 천상에 펼쳐질 것이다.

블랑쇼
자기 주변을 맴도는 광기
죽음의 광기
  
바타유
에로티시즘과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
  

나는 곧 허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말린 장미꽃
연중 내내 황혼
여름의 황혼
겨울의 황혼. 진짜 황혼
겨울, , 불의.
그것은 단지 서글플 뿐이다.
우리는 세월에 익숙해 있지 않다.
  

벼락이 칠 때마다 우리는 나무들과 함께 있다.
  

언제나 억압하는 것,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지옥처럼 부당한 노동의 세계.
멸시, 불의, 고용주, 공포, 자본주의 체계의 공포,
거기에 연유하는 불행,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멋대로 이용하는 부유층의 권리,
실패 요인 그 자체를 권리로 삼고, 그 성공을 권리로 결코 삼지 않는 부유층의 권리 남용.
  
그들의 불명예스러운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독서가 우리 모두에 의해서 도달될 것이다.
나는 고집하지 않고 떠나겠다.
나는 사람들이 모두 겪은 것이 무엇인지 묻겠다.
  

해방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이다.



**
우리가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것은 미지의 것이다.
쓴다는 것은 바로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글쓰기는 미지의 것이다.
우리는 쓰기 전에는 곧 무엇을 쓸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쓰기, 그것은 바람처럼 일어난다.

그의 이름은 클리프.
나이는 스무 살.
영국 노신사는 매년 와서 그 젊은이의 무덤에 눈물을 떨구었다.
전쟁의 마지막 사망자인 스무 살 젊은이의 삶, 그 장소에 멈춰 있다.
그 젊은 영국 비행사의 죽음.
그 무덤은 외롭다.
그가 외로웠던 것처럼.
화강암 평석 밑에 여전히 누워 있었다.
그 젊은이가 고아라는 사실 얘기해준 그 노 교수는 8년 후로 결코 다시 오지 않았다.


나는 쓰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나는 옛날에 쓴 책에 대해 말하겠다.
수원지에서  출발해서 그것을 물 저장소까지 이끌어야만 한다.
무덤에서 시작해서 그 젊은 영국 비행사가 있는 곳까지 가야만 한다.


나는 모든 것에 관계하고, 모든 것에 가담하는 그런 행운 때문에 글을 쓴다.
문학의 글쓰기, 그것은 책마다, 작가마다, 작가의 책마다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
침묵이 흐른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트루빌은 바로 내 일생의 고독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고독한 글쓰기>를 읽고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그녀를 생각하며 내게 남은 글들을 되새김질해 본다.


나는 독서를 하면서 발췌를 하고 블로그에 기록하길 오래하였는데, 쓰면서 내가 작가의 목소리를 듣고 여기저기 순서를 뒤바꾸며 이렇게 다시 다시 요약을 한다. 순전히 내가 느낀 데로 내가 볼 요량으로.. 그래서 누군가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떻게 느낄지 아마 제각각이 되지 않을까? (책은 읽는 이에 따라 새롭게 읽혀진다 하니 그렇겠구나 생각한다)


나는 가끔 발췌를 정리하고 기록을 마치고 나서 뒤늦게 완전히 새로운 느낌에 도취되고 마는데.. 정말 나중에서 작가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정말 알았다고 생각할 때조차 제대로 모르고 지나서는 뒤늦게 조금 알아차린 건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뒤라스의 글은 그녀다운 상상력으로 그녀다운 쓸쓸하고 애틋한 느낌의 글이란 생각이 들었다. 말린 장미꽃, 벼락, 나무, 어둠을 이야기 할 때가 좋았다. 모든걸 휩쓸고 다시 여기로 돌아오는 느낌의 글이었다. 트루빌로 향하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트루빌은 바로 내 일생의 고독이다.'


내 생각을 남길 잠깐의 여유 없이 2018년이 지나려 한다... 맙소사...


나는 짧게나마 내 생각을 더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브런치에 들어왔다. 잠시 회사일과 해야 하는 것들(요리 블로그)을 접고, 글 속으로 빠져서 느꼈던 나를 놓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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