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터뷰라는 형식을 좋아해요.
대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문답을 좋아하기 때문에 인터뷰를 좋아하는 거죠. 그리고 내 사고의 상당 부분이 대화의 소산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어떤 면에선 글쓰기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혼자 해야 하고 그래서 나 자신과의 대화를 꾸며내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이건 본질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한 활동이거든요. 저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은둔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대화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기회를 주죠.
<수전 손택의 말> 서문에서
1978년은 수전 손택에게 특별하다. 전해인 1977년 역작 『사진에 관하여』를 출간해 한창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고, 1974년 유방암 선고를 받고서 수술과 투병으로 보낸 2년여 동안 구상한 또 다른 역작 『은유로서의 질병』이 출간된 해이기 때문이다. 1978년 수전 손택은 정확히 마흔다섯, 이를테면 사십 대의 절정에 이르렀고, 그간의 신념과 저서 그리고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는 일은 죽음을 관통해 생의 한가운데로 돌아온 그녀에게 남은 생의 방향을 잡는 일이 될 터였다. 그래서 수전 손택은 이즈음의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앎을 얻었지만,
또한 지금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낀다.
수전 손택
손택 : 엄청난 양을 읽었는데, 상당 부분은 무념무상으로 읽었죠. 전 사람들이 TV를 보듯이 책 읽기를 즐겨요. 읽다가 잠들기도 하고요. 우울할 때 책을 한 권 집어 들면 기분이 좋아져요.
콧 : 에밀리 디킨슨이 쓴 글처럼 "꽃망울과 책들, 슬픔을 달래주는 이런 위안들"이군요.
손택 : 그래요. 독서는 제게 여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못 견디겠으면 책을 들고 쪼그려 눕죠. 그건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그러나 제 독서는 전혀 체계적이지 못해요. 굉장히 빨리 읽는다는 점에서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죠. 대다수 사람들에 비해 저는 속독가라고 생각되는데, 많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유리하지만 어디 한 군데 진드근히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단점도 많아요.
저는 그냥 전부 흡수한 후에 어디선가 숙성되기를 기다리거든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식하답니다. 구조주의나 의미론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보라고 하면 아마 말을 못 할 거예요. 바르트의 한 문에서 어떤 이미를 떠올리거나 느낌을 감지할 수 있어도 정확히 이해하고 파악하지는 못해요. 그래서 이런저런 관심사를 갖고 있는데, CBGB(뮤직 클럽)에 가기도 하고 그런 다음 일들을 하기도 해요.
저는 진심으로 역사를 믿는데, 그건 사람들이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가치죠. 전 우리가 행하고 사유하는 게 역사적인 창조물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신봉하는 게 별로 없지만 이건 확실히 진짜 믿음이에요.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거의 대부분이 역사적으로 뿌리가 있다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말해서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 소위 낭만적인 혁명기라고 불리는 시대에 뿌리박고 있다는 거죠. 우리는 본질적으로 아직도 여전히 그 시기에 형성된 기대와 정서를 다루고 있단 말입니다. 행복, 개인성, 급진적인 사회변혁 그리고 쾌감 같은 관념들이요. 우리는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탄생한 어휘를 물려받았어요. 그래서 CBGB에서 열리는 패티 스미스의 콘서트에 가면 향유하고 참여하고 감상하고 더 잘 경청하죠. 니체를 읽었으니까요.
<수전 손택의 말> p63-67
콧 : 책에서 선생님은 사진의 본질과 주된 특성들에 대해 말씀하실 때 '다형적' '다의적' '다원론적' '증식하는' '분리하는'을 비롯해 '소비적'이라는 표현을 쓰셨고, 또한 세계를 보는 사치스럽고 낭비벽이 심하고 불안한 세계관과 동일시하시지요. 반복해서 선생님은 사진에 관해 다음과 같은 동사들을 활용하십니다. '전유하다' '포장하다' '소유하다' '식민지화하다' '생색을 내다' '감옥에 가두다' '소비하다' '수집하다' '공격하다'
손택 :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른 표현들도 많이 썼어요. '매혹하다'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다' '황홀케 하다' '영감을 주다' '기쁨을 주다'라든가. 그러나 특히 아까 말씀하신 '공격하다'로 돌아가 보고 싶네요. 그걸 굳이 짚어낸 사람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제게는 무언가 공격적이라는 게,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아마 그런 생각이 이미 이해를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이제는 '공격'이라는 말이, 몹시 위선적이지만, 사람들에 의해 아주 나쁜 뜻으로 변했다는 걸 알겠어요. 제가 위선적이라고 말하는 건, 이 사회가 자연과 온갖 존재의 질서에 대해 어마어마한 규모로 공격을 감해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제 말은 '산다'는 건 일종의 공격이에요. 세계 안에서 움직이다 보면 온갖 차원에서 공격과 연루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인이 점유할 수 없는 공간을 점유하고 걸을 때마다 식물군, 동물군, 작은 생물들을 짓밟게 되죠. 그러니까 삶의 리듬의 일환으로서 '정상적'인 공격이라는 게 있다는 거죠. 제 생각에는 현대에 고유한 형태의 공격성이 특히 '고조'되는 측면이 카메라의 활용으로 상징되는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잠깐 가만히 있어 봐요, 하고 그 사람의 사진을 찍을 때처럼 말이지요. 이런 식의 전유를 사람들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바람직하다고 느끼는 건 카메라를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보고 집에 가져가고 싶다고 느끼면 사진의 형태로 가지고 갑니다. 세계를 수집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전유와 수집과 공격성을 처음 도입한 것이 사진이라거나, 사진이 없으면 이런 것들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로 이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그런 말이 아닌데 가끔은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서요.
p86-87
콧 : 은유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계시나요?
손택 : 이 질문에 대해서는 좀 더 사적인 방법으로 대답해야겠어요. 사유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이론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방식이란 암시들과 저변에 깔려 있는 은유 또는 패러다임을 파악하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그게 제게는 자연스러운 이해의 방식이었죠. 열네 살인가 열다섯 살 때 처음 철학을 읽기 시작했는데, 내가 은유 때문에 몹시 고생할 거라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그런 생각들도 했죠. 뭐, 다른 은유가 있으면 또 다른 의미가 나오겠지, 하고요. 전 항상 은유에 대해서는 그런 불가지론을 견지해왔어요.
그에 대해 나 자신의 생각을 갖기 오래전부터, 은유를 찾자마자 그걸 알았죠. 하지만 그거 역시 "자, 이거야말로 사유의 원천이 될 수 있겠군" 하고 말하는 한 가지 수단이었어요. 한편으로는 또 다른 은유를 활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여기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론이 있다는 걸 알지만 크게 개의치 않아요. 그보다는 작가로서의 제 본능을 훨씬 따르는 편이죠.
모더니즘이나 아방가르드 또는 실험주의에서 제 흥미를 끌었던 상당수가, 또는 그냥 제가 보기에 좋은 글쓰기라는 건 은유의 정화예요. 쓸데없는 걸 다 벗어던진 적나라한 특질 때문에 저는 베케트와 카프카에게 매력을 느껴요. 그리고 지금보다는 옛날에 훨씬 더 사모했던 로브그리예 같은 프랑스 소설가들의 경우에도, 제 마음을 끌었던 건 그들의 기획, 즉 은유를 담지 않겠다는 그 발상이었어요.
콧 : 그러니까 은유의 정화라는 말씀이 은유의 제거를 말하시는 거군요.
손택 : 어떤 면에서 그래요. 아니, 적어도 은유에 극단적인 회의론을 품고 있다고 해야겠죠. 은유는 사유에 핵심적이지만 쓸 때는 은유를 믿으면 안 돼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허구라는 걸 알아야 하죠. 아니, 필수적인 허구가 아닐 수도 있어요. 은유를 품지 않은 사유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죠. 그러나 바로 그런 사실이 그 사유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거예요. 내 마음을 끄는 건 항상 그런 회의주의를 표현하면서 은유를 넘어 깨끗하고 투명한 무언가로 나아가는 담론이에요.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0도의 글쓰기죠.
물론 제임스 조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절대적으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언어에 의미들을 최대한 욱여넣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그건 은유가 아니라 단순히 언어 그 자체와 단어가 가질 수 있는 온갖 다른 뜻으로 하는 유희가 되어요.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처럼 마리지요. 예를 들어 "강물이 장갑 손가락처럼 다리의 아치 아래를 흐른다 " 같은 은유를 보게 되면 딱 알죠... 어때요?(웃음)
p99-101
콧 : 선생님의 문체를 정의한다고 볼 만한 형용사 네 개의 목록을 만들어봤습니다. 군더더기 없고, 정확하고, 요란하지 않고, 꾸밈없고.
손택 : 그중에서 저는 '꾸밈없고'라는 말에 확실히 공감하게 되네요. 언제나 그게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해왔어요. 수많은 글쓰기에서 소멸할 가능성이 있는 건 바로 그 꾸밈이라고 보았거든요. 영원을 위한 문체는 꾸밈없는 문체 같았어요. 하지만 제게 가장 매혹적인 미국 작가 두 명은 엘리자베스 하드윅과 윌리엄 개스거든요. 그 작가들은 이리도 나와 정반대일 수가 없어요. 둘이 서로 다른 건 말할 것도 없고요. 두 사람 모두 끊임없이 이미지를 활용하고 발전시켜서 전개를 하고
다시 그것들을 이미지 속으로 버려버리죠. (중략)
콧 : 그럼 아까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이전에 하시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는 데 흥미가 생길지도 모르신다고요.
손택 : 그래요, 다르게 글을 쓰고 싶어요. 지금 갖고 있는 자유와 다른 종류의 자유를 찾고 싶어요. 난 작가로서 분명히 소정의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내게 결여된 다른 자유도 있거든요. 그런 자유를 찾는 유일한 길은 실천뿐이에요. 카프카는 글을 쓰려면 아무리 고독해도 충분치 않다고 했는데 그의 말이 옳아요.
(중략)
손택 : 젊었을 때 어떤 대상과 몹시 강렬하게 동화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게 너무나 자기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지요. 그 시기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또 열렬하게 어떤 모델을 갖고 싶다고 원하기 때문에 훨씬 더 민감하게 수용하게 되는 거예요. (중략) 그냥 그 영향들을 소진해버리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는 것뿐이죠. 자기가 받은 문학적 영향을 반박하고 다른 대안들을 시도해 보고 싶은 자연스러운 충동이 있기도 하고요. (중략) 20년 전에 저는 카프카에게 그런 반응을 보였지만, 지금은 카프카에게서 배울 건 다 배웠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과거의 제 취향으로 보면 생경한 것들에 동조하는 건 흥미진진해요. (중략) 그저 새로운 피의 수혈이 필요하고 새로운 자양분과 영감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제 정체성과 다른 것들을 제가 좋아하고, 또 저 자신이 아닌 것들, 제가 모르는 것들을 배우려 애쓰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
p129-131
난 기원으로 회귀하고 싶지 않아요. 기원은 그저 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제 전반적인 느낌은 아주 멀리 왔다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기원으로부터 시작해 여행한 그 거리에서 기쁨을 느껴요. 그런 아까 말씀드린 대로, 뿌리박지 못한 제 유년기와 엄청나게 파편화된 가족 때문이기도 해요. (중략) 전 자신을 스스로 창조했다는 생각을 해요. 그게 저한테는 효과가 있는 착각이에요. 심지어 내가 독학을 했다는 생각마저 해요. 버클리, 시카고, 하버드, 굉장히 훌륭한 교육을 받았는데도 말이지요. 기본적으로는 내가 독학자라고 생각해요. 한 번도 누군가의 제자나 총아가 되어본 적이 없었고, 누가 밀어준 적도 없고, 내가 '출세'한 거도 누군가의 연인이나 아내나 딸이라서가 아니었어요. (중략) 남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방식 말고는 달리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모르거든요. 그래도 다만 내 생각은 더 멀리멀리 나아가고 새로운 시작들을 꿈꾸는 것이지 기원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말은 하고 싶네요.
궁극적으로 우리는 거짓되고 선동적인 해석들을 파괴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기획에 깊이 유대감을 느껴요. (중략) 아까 작가의 사명은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거라고 말했지만, 저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한바 작가의 소명은 온갖 종류의 허위에 맞서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에요. 아무리 해도 허위나 허위의식이나 해석의 체계를 끝장낼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언제나 어떤 세대에든 그런 것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있어야 하고, 그래서 전 사회비판이 오로지 정부에서만 나오는 세계 대부분의 장소들을 생각하면 심히 심란해져요. 착시와 허위와 선동을 파괴하려고 애쓰는, 그래서 만사를 더 복잡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해요. 만사를 더 단순하게 만들려는 불가피한 기류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내게는, 그 무엇보다 끔찍한 일이라면 아마 내가 이미 다 쓰고 얘기한 내용에 동조하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게 아마 날 그 무엇보다 불편하게 만들 거예요. 왜냐하면 그건 내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는 뜻일 테니까요.
p194-197
『수전 손택의 말』은 이런 수전 손택이 1978년 [롤링스톤]과 가졌던 인터뷰를 오롯이 담은 책이다. 다양한 매체의 인터뷰를 엮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긴 인터뷰를 원래의 호흡대로 담았다. 인터뷰에서 수전 손택은 자신의 책들의 내용과 표지에 관한 소소하고 즐거운 에피소드를 늘어놓을 뿐 아니라, 카프카, 베케트 등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 빌 헤일리 앤 더 코메츠, 척 베리 등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 그리고 글쓰기에 관한 지론은 물론이고 파리와 뉴욕 등 자신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 도시들에 관해서도 서슴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문학, 영화, 음악, 사회, 성, 사랑, 여행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생기 있게 긴장과 이완을 번갈아가는 수전 손택의 말에서 여지없이 그만의 지성이 배어난다. 이 인터뷰는 1978년 6월 파리에서, 다섯 달 뒤인 11월 뉴욕에서 모두 12시간에 걸쳐 이루어졌고, 그중 3분의 1만이 [롤링스톤] 1979년 10월 4일 자에 게재되었다. 인터뷰 전문이 공개된 것은 35년 만에 이 책을 통해서가 처음이다. - 출판사 서평 -
미국 최고의 에세이스트이자 평론가, 소설가로 1933년 1월 뉴욕에서 태어났다. 첫 소설 『은인The Benefactor』(1963)과 에세이 「‘캠프’에 대한 단상Notes on 'Camp'」(1964)을 발표하면서 문단과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66년 평론집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서구 미학의 전통을 이루던 내용과 형식의 구별,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에 반기를 들며 화려한 명성을 얻었다. 그 뒤 극작가, 영화감독, 연극연출가, 문화비평가, 사회운동가 등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한 손택은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이자 ‘뉴욕 지성계의 여왕’, 그리고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로 미국 문화의 중심에 우뚝 섰다. 미국 펜클럽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1987~1989)에는 한국을 방문해 구속 문인의 석방을 촉구했고, 1993년에는 사라예보 내전 현장에 가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상연하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도 아낌없이 보여 줬다.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사진에 관하여』(1977)와 ‘전미도서상’ 소설 부분 수상작인 『인 아메리카』(1999)를 비롯해 네 권의 평론집과 여섯 권의 소설, 네 권의 에세이, 네 편의 영화 시나리오와 두 편의 희곡이 있으며 현재 32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파리의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마무리.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뉴욕 지성계의 여왕' '미국 문학계의 다크레이디' 등 수전 손택의 별칭이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녀의 인터뷰의 논증은 내가 할 수 없겠지만 그녀의 의식의 흐름이 어떠한가에 대한 감상을 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내려가 샅샅이 생각해 내는 과정이 얼마나 오래되어서 숙성이 되었나 생각하는 힘이 남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독서량과 사고의 량이 뛰어나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서부터 독서의 순차적 단계를 가뿐히 넘어 자신의 독서의 세계를 구축해낸 점이 부러웠다. 한 인간이 독서의 저변을 넓히고 한계를 뛰어넘어 또 다른 세계로 접어드는 느낌을 받았다. 수전 손택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그녀의 생각이 그때와는 또 다르게 변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어느 말 한 꼭지를 가지고 물어뜯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 사람이 그 당시에 저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구나 하는 정도에 그치고 마는 게 정신건강에 좋지 않나 생각한다.
나는 독자로서 있는 그대로 흡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다. 작가로서 그녀는 자기 글과 말에 동조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고 생각돼 불편하기까지 하니 자기 검열 또한 치열하게 하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했다. 수전 손택의 책을 읽은 적이 없어서 기회가 된다면 꼭 이어서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녀의 사후 많은 가십들로 어지러웠음을 알게 되었고 매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성은 누구보다 자의식이 강했던 수전 손택의 평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화두였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사유를 하는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떤 존재로 보이고 또 기억될 것인가, 손택은 항상 그런 문제들에 진심으로 골몰하고 있었으며,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 자아를 연출해 재현하고 타인과 세계에 각인하는 방식을 고심했다.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