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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Oct 16. 2024

다시 마주한 한강의 책, 이제는 읽어나가고 싶다.

미래 철학자는 실험가 또는 여러 방향으로 자유로이 떠날 수 있는 자다.

여자의 말은 태어나지 않았다

나의 여성작가 찾기



2016년 2월 10일 난 읽고 싶은 여성 작가 찾기 시작했다. 마그리트 뒤라스, 시몬 드 보부아르, 헤르타 뮐러, 앨리스 먼로, 한강이었다. 그때 내가 읽던 작가에서 말하는 여성은 남성작가에 의해서 의식되었던 여성이라는 생각에 이미 그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큰 의문이 들었던 시기였다. 

여전히 그런 의문에 갇힌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 굳이 필요 없다는 것도 이제는 알겠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에 뭔가 찾아 나서려고 했던 것 같다.



https://blog.naver.com/roh222/220622413147



우리가 곧 다시 전해야 할 이야기


(지난 글)

나의 여성작가의 계보를 훑어보자면 제인 오스틴, 샬롯, 에밀리, 앤 브론테 자매들, 이디스 워튼, 마그리트 뒤라스, 도리스 레싱, 버지니아 울프, 루이제 린저 그리고 한국 작가로는 박완서, 박경리 정도이다. 그저 소설 읽기에 지나지 않아서 전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는 게 아쉽다. 아니 에르노 작가를 좋아해서 몇 편 이어 읽은 정도다.


아니 에르노작가



(지난 글)
앨리스 먼로의 작가의 책을 읽다가 덮어둔 상태에서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읽었다. 읽을수록 어려워서 띄엄띄엄 읽다가 덮었다. 왜 나에게서 의문 부호가 여러 가지로 생겨났는지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그저 좀 더 여성 작가의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냥 읽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성이면서 여성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여성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은 왜 그런 감정을 갖게 되었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내 감정에 솔직해지지 않았던 것일까? 읽어왔던 작가의 대부분이 남성이었고 나는 그동안 그 책들을 공감하면서 읽어오긴 했는데 불현듯 그것이 제대로 된 공감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젊었을 적에는 마치 남성이 '나'라고 할 때 '홀로 있는 나'를 상정하고 말하듯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적으로 '홀로 있는 나'가 되는 것이 여성이 가져야 할 최종적인 목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 우에노 지즈코 <여자들의 사상> 중 모리사키 가즈에 <생명, 울려 퍼지다> p38


여자가 자신의 경험, 더욱이 그중에서도 가장 절실한 경험인 성과 출산을 사상으로 사유하고자 했을 때 그것을 일컬을 만한 말이 없었다. 남자의 말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여성의 말은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매달 피를 흘리는 여자란 어떤 자인가, 성이란 무엇인가, 임신이란 어떤 경험인가, 출산할 때 내가 낳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에 대한 연이은 물음이 생겼지만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다. 사상이란 사상은 죄다 남자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에노 지즈코 <여자들의 사상> p33




(지난 글)

무언가를 콕 집어서 말하기 어려운 점이다. 지금에 와서 왜 알아야겠다고 문제시하는 점도 모르겠다. 그냥 읽을 것이라면 나는 무엇을 놓치고 읽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여자의 말은 태어나지 않았다'하는 데 정말 그러한가? 그동안 여성작가들이 내놓은 말이 무엇인가? 나는 제대로 들으려고 했었나?

인류 역사상 여성이 글을 배워 읽고 쓴 시간은 남성의 시간보다 분명히 적을 테다.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을 보면 여성, 어머니는 자궁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다. 내가 갑자기 무척 슬퍼지는 이유는 뭔가 아주 동떨어진 곳에서 나를 느껴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런 섬세한 글을 이방인처럼 읽고 여성 작가들의 내밀한 감성을 읽으면서 거부감이 생겨버리는 나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상태로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들어버렸다. 

여성의 글 다운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솔직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점이 아닌가 싶다. 여성들의 증언이 필요하다. 그리고 받아들일 자세도 필요하다. 나는 그 받아들임이 어색하고 거부감마저 들지 않았나 싶다. 페미니즘과 젠더에 관련된 사상은 너무 어려웠다. 사회와 역사까지 다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 발판이 있어서 지금의 여성들이 되었다는 정도로만 인식했다.

젠더 : 문학비평용어사전
성(性)에 대한 영문표기 섹스(Sex) 대신 새로 쓰기로 한 용어로, 1995년 9월 5일 북경 제4차 여성대회 GO(정부기구) 회의에서 결정했다.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젠더는 사회나 문화를 함축하는 사회학적 의미의 성을 뜻하고, 섹스는 생물학적인 의미의 성을 뜻한다.

페미니즘 : 문학비평용어사전
페미니즘은 '여성의 특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페미나(femina)'에서 파생한 말로써, 성 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각 때문에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에 저항하는 여성해방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지난 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싶기도 하고 여성이 여성으로서 공감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이 나 밖에 없을 수도 있는 것이라면 그저 웃음만 나올 것도 같다. 앨리스 먼로의 글을 읽으면서 고민했던 부분이다. 조금밖에 읽지 않고 덮어버렸던 이유가 궁금해서 일본 작가의 <여자들의 사상>을  조금 읽기도 했다. 그런데도 아직 내가 짚은 바가 맞는지 확실치 않다. 여성 작가들의 책을 많이 읽고 고민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싶었다.


마그리트 뒤라스 / 시몬 드 보부아르


헤르타 뮐러 / 앨리스 먼로


한강






미래 철학자는 실험가 

또는 여러 방향으로 

자유로이 떠날 수 있는 자다.



(지난 글)

2016년 5월 17일 아침 일찍 좋은 소식이 들렸다. 한강 <채식주의자> 작품이 영국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분 수상자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2월, 나의 여성작가 찾기에서 한강의 작품을 읽으려고 했는데.... 읽었지만 완독 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어려웠다. 그때 지목했던 헤르타 뮐러와 한강의 책은... 못다 읽고 덮었다.


어둡기만 하다고 생각했다. 숨 쉴 구멍은 전혀 없을지도...라고 생각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 작품은 5.18 민주화 운동을 그리고 있다. 앞서 읽은 리디 살베르의 <울지 않기>도 그랬다. 잊지 않고 읽어나가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내일은 5월 18일 눈부시게 푸른 날이다.




한강 <채식주의자 THE VEGETARIAN> <소년이 온다 HUMAN ACTS> 표지




https://blog.naver.com/roh222/220712156204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6부 작품과 거미, 

7부 가문의 천덕꾸리기 중에서 발췌


#
니체가 철학을 소설에 접근시켰다면,
무질은 소설을 철학에 접근시켰다.
무질이 다른 소설가들보다 덜 소설가가 아니며
니체가 다른 철학자들보다 덜 철학자라는 뜻도 아니다.

인간사의 모든 것이 철학자의 사유 대상이다.
소설가는 자신의 사유를 철저하게 탈脫 체계화해야 한다.
사유될 수 있는 그 무엇도 소설 예술에서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

#
베토벤에게는 놀랄 만큼 약한 이행부들이 많아.
하지만 센 이행부들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약한 이행부들이야.
잔디밭처럼 말이야.
잔디밭이 없으면 우리는 그 위로 솟아나는
아름다운 나무에게서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을 거야.
<13~14살 밀란 쿤데라의 유대인 작곡 선생님(스승)의 말> 

소중한 그 성찰보다 더욱 소중한 것, 그것은 (1942년 유대인 스승이) 그 잔혹한 여행을 떠나기 얼마 전, 아이 앞에서, 드높은 목소리로, 예술 작품의 구성 문제를 성찰하던 한 인간의 이미지다.


이행부(transition)
악곡 중 어느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옮겨 가는 부분이며, 대부분의 경우 조바꿈의 목적을 수반한다. <추이(推移)>라고도 한다.



#
야나체크 Leos Janacek행부 없이 어지러울 만큼 정밀하게 짜인 부드러움과 난폭함, 분노와 평화의 대면對面이라서다.

그의 만년의 곡들은 창조성 폭발이다.
칠십 대 때 유머와 창조성이 넘치고 자유로웠다.

쿤데라는 그의 인생 마지막 십 년을 생각한다.
독립한 조국, 마침내 갈채받게 된 그의 음악.
그의 작품들은 점점 대담하고 자유롭고 유쾌해진다.
피카소의 노년 같다.



레오시 야냐 체크의 카프라치오 Capriccio (1926)




다시 마주한 한강의 책 

이제는 읽어나가고 싶다



작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2024년 10월 10일)은 며칠이 지나도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한국 소설을 읽는데 어떤 거부감을 가지는 것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했다. 특히나 아픈 근현대사를 통해 한국인을 마주하는 것은 내 밑낯을 보는 것이고 보자마자 속이 답답해지고 눈물이 나는 것이라 읽는 것이 쉽지 않아서 마음으로부터 도망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82년생 김지영> 영화로 나왔을 때도 보지 않았다. 책이 나왔을 때도 저 책을 보면서 모르지 않는데 마주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고 영화로 나왔을 때 TV로 방송되는 때에도 결코 채널을 멈추지 않고 돌렸었다. 그렇게 나는 피해왔다. 한국소설 중에 전작해야 할 작가의 작품들을 언젠가는 내가 꼭 붙잡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로베르토 볼라뇨의 <2666>과 <야만스런 탐정들>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 갑자기 내게 한강의 작품이 들어왔다. 많은 뉴스와 유튜브의 영상들 속에서 한강의 작품 읽는 방법 시 - 단편 - 장편 순으로 읽어보라 해서.. 나도 그녀의 시부터 읽어야지 생각했다. 


<채식주의자>는 초반에 읽다가 덮었다. 나에게는 정말 진입하기 힘든 장벽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읽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더 나를 압도하고 있으니 휩쓸려서라도 읽어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나더라도.



https://brunch.co.kr/magazine/female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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