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미리 쓰는 편지

2026년

by 훌리아

미리 쓰는 편지에 앞서 파스칼 메르시어 <언어의 무게> 33-35페이지를 아래 발췌한다.





사랑하는 딸,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건 너희 엄마가 사망한 후 내가 몇 년 동안 그녀에게 쓴 편지다. 내가 리비아의 죽음을 속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몰래 부인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아. 이 편지의 의미는 죽음을 넘어 리비아를 계속 살려두려는 게 아니야.


다른 뜻도 있단다. 리비아에게 쓰는 일은 나 자신에게 쓰는 행위와도 같았지. 우리가 리비아를 발견한 그날 밤 이후로 나는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픈 갈망, 내 생각과 느낌과 요구를 명확한 형태로 알고 싶은 갈망을 자주 느꼈다. 그중 몇 가지는 너희 둘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진술이 진정한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 내가 표현한 말은 말하는 도중에 이미 틀리게 들리기도 했고, 틀리지는 않았다고 해도 너무 지나치게 간단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할 때 원래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그대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스로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자기 말이 타인에게 끼칠 영향을 고려하거나 이 말 때문에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기 때문이지.


나중에는 자신의 명료함에서 한 걸음 나아가는 게 아니라 이 말이 타인에게 끼친 영향 때문에 번민해야 한단다. 다른 한편으로 속으로 혼잣말을 할 때면 생각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무척 많았다.


이해가 깊어지기는커녕 모든 것이 단편적이었고 서로 들어맞지 않는 조각으로 가득했지. 그래서 리비아에게 내 상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리비아는 내가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 내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조용히 마음속에서만 리비아를 생각하기에는 호흡이 너무 짧았고, 과거로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게 중요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내가 누구인지 전체적이고 완전하며 깊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멀리까지 거슬러 가자고.


편지를 쓸 때면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를 위장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완벽하게 솔직한 보고서가 되어야 했지.


텅 빈 종이를 앞에 두고 앉아 있을 때면 이따금 솔직해지는 것만큼, 두려움 없이 솔직해지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자신을 열어 보이니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리비아를 위해, 그리고 같은 내면의 움직임 속에서 또한 나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열었다. 사람들은 아마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다고 기대하겠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면 스스로를 향해, 스스로를 위해 완전히 열려 있어야 해.


그런데 왜 자신에게 마음을 열기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할까?


나는 리비아를 불편하거나 당황하게 할 염려가 전혀 없었으니 아무 숨김 없이 그녀에게 나를 드러내 보일 수 있었다. 무감각하고 말이 없는 벽 또는 전혀 모르는 사람. 그러니까 감정에 신경 쓸 필요 없는 낯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과는 아주 달랐지.


듣는 사람은 리비아여야만 했다.


내 언어는 그녀의 영혼에 가닿고 그곳에서 이해를 얻어내야 했고, 이런 이해가 충분해야 나는 내 내면이 어떤 모습인지 깨달을 수 있을 터였다.


이 편지를 없애겠다고 늘 마음먹고 있었다. 나와만 상관있는 내 삶의 실마리니까.


그러다가 왜인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읽고 보관하라고 너희에게 남긴다. 이 내용이 리비아가 사망한 후 오랫동안, 그리고 내가 삶의 마지막에 보인 행동을 너희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아빠가.


파스칼 메르시어 <언어의 무게> p33-35 발췌


weight+of+words+mosaic+art.jpg



여기서 부터

우리의 글


#1. 당신이 내게 준 글


26년을 일수로 9420일, 시간으로 나누면 227,760시간, 분으로 나누면 13,665,600시간, 초로 나누면 819,936,000 이네.


너와 함께한 시간이 너와 나의 얼굴에 주름으로 고스란히 나타나는 구나.


우리의 순간들을 기억하며, 서로의 얼굴에 깊게 새겨진 주름 만큼, 그 많은 회한들, 앞으로 새겨질 주름에는 행복과 평온함이 새겨지기를 바란다.


#2. 내가 쓴 글


내 달력에 당신이 써 준 글을 여기에 남겼어. 다음 달로 넘기는 책상 달력에 당신이 매번 짧은 편지를 남겨 줘서 미리 다 넘겨서 읽어버리고 말았지만. 3월까지 써둔 걸 봤는데... 혹시나 4월도? 역시나 써둔 당신을 보면서 깜짝 놀랐어.


나는 당신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 같아. 고마워.


당신은 내게 어째서 아낌없이 사랑을 줄까?


나에게도 듣는 사람은 당신이어야만 해.


내 언어는 당신의 영혼에 가닿고 그곳에서 이해를 얻어내야 했고, 이런 이해가 충분해야 나는 내 내면이 어떤 모습인지 깨달을 수 있거든.


이 편지를 여기에 남기고 삭제 하려고도 했어. 나와만 상관있는 내 삶의 실마리니까.


그러다가 왜인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내가 삶에 보인 행동을 누군가가 보더라도 이해주길 바란 것도 같아.


파스칼 메르시어의 글을 빌려와서 내 마음을 덧대여 봤어.


이 다음으로 내가 쓴 두 문단 정도의 글이 있었는데 삭제했어. (사실 소설 속 레이랜드 또한 편지를 남기는 것 따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마음을 놓고 있어. '하마터면 읽을 뻔했지.','정말 하마터면.'이라고 해. 아이들은 이제 그의 편지를 읽을 필요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어.)


위장하지 않고 완전히 열린 채로 쓴 나.

내 내면을 보고 조금은 깨달아.

내 삶의 실마리가 무엇인지. 아주 조금.


2026년 2월 어느 날에 훌리아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