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인생수업을 읽고
이 책은 몇년전 구입했다. 하지만 이 책은 읽기 힘들었다. 인생의 마지막을 앞둔 지식인이 할 법한 이야기가 쉽게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1~2번 시도했다가 덮었었다. 그러다 이번 9월에 용기를 내어 다시 책을 집었다. 이번에는 그래도 쉬이 읽을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뭐가 달라졌을까?
불과 2~3년 사이에 30대에서 40대가 되었다. 지금의 내 나이는 내가 초등학생 때 외삼촌의 차를 타고 친척들과 어디론가 놀러갔었을 때, 그 때 외삼촌의 연세와 같다. 나이가 40이 되면 대단한 어른이 되어있을 줄 알았고, 내 주변과 생활이 편안하고 안정적일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여전히 많이 흔들리고 불안한 상황이다. 나이만 어른이지 아직 어른이 아니다.
이 책은 인생을 마무리 하고 있는 지식인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그 지식인은 그야말로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인인 이어령 선생이다. 자세히는 몰랐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얼마나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사실들을 몰랐더라도 이 책을 읽는데는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담담하고 건조하고, 그래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명확히 드러났다. 이 책을 읽으면 따뜻한 서재에서 어느 노 교수가 무릎에 담요를 덮고 유언을 남기 듯 담담히 한마디 한마디 해 나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흥미로웠던 부분들]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이 그랬지. 인간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네. 개미처럼 땅만 보고 달리는 부류.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사는 부류. 개미 부류는 땅만 보고 가면서 눈앞의 먹이를 주워먹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야. 거미 부류는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 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기를 기다리지. 뜬구름 잡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이 대표적이야. 마지막이 꿀벌이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 하는거야. 그게 창조야."
"남자들만 느낄 수 있는 고독의 신호가 있다네. 파이브 어 클락 섀도(five o'clock shadow) 라고 들어봤나? 샐러리맨들이 오후 다섯시가 되면 깨끗했던 턱 밑이 파래져. 퇴근 무렵, 면도 자국에서 수염이 자라 그림자가 생기네. 그게 오후 다섯시의 그림자야. 매일 쳇바퀴 돌듯 회사에 나와 하루를 보내다 문득 정신차리면 오후 다섯시. 수염 자국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지면 우수가 차오른다네. 오늘 뭘 했지? 내일도 또 이렇겠지."
"마지막으로 내 아내가 '내 남편은 일밖에 모른다. 병원에서 수술하고도 교정 보고 글 쓰고, 아버지 제삿날에도 돌아와 일을 한다'고 하지. 그래서 내가 그랬지. '여보, 죽기 전까지 바느질하는 샤넬보고 주위에서 '좀 쉬세요' 걱정했더니 샤넬이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너희들은 이게 일로 보이니? 나는 이게 노는 거고 쉬는 거야' 기가막힌 이야기라네. 노동은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거야. 노동에서 벗어나는 걸 쉰다고 하지. 내 일이 나에게는 노는 거였어. 나는 워커홀릭이 아니라 재미에 빠진 인간이었다니까. 허허."
이 책은 철학책이다. 눈으로 활자를 읽지만 머릿속으로는 생각을 하게 한다.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는 그의 말은 이어령 선생이 삶을 돌아보는 기본 태도이다 . 결코 권위적이지 않지만 그의 말 한마디 생각 한토막은 권위가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곳곳에 밑줄을 긋고 띠지를 붙혀놓았다. 위에서는 3가지만 언급했지만, 다시 읽고 싶은 부분,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이 곳곳에 선물처럼 숨겨져 있었다. 몸에 힘은 빠지고 입술을 마르고, 손가락을 움직이기가 힘들었지만 이어령 선생은 여전히 활력적이었다. 그는 그가 평생을 살아오며 생각했던 것을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했다. 이 책은 꼭 한번 읽어볼만 한 선물같은 책이다. 삶이 힘들어서 도움닫기가 필요할 때 꼭 다시 집어들 소중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