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의 시간, 산 사람들의 세계
자정이 넘어 잠에서 깨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열한 시경 침대에 누웠고, 눈을 감은 채 수면 직전의 상태로 어둠에 갇혀 배회하다 끔찍한 고관절의 통증이 시작되어 눈을 떴다.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병명도 모른채 부쩍 심야에 이렇게 깨어나는 일이 잦아졌다.
누워 있는 나의 오른쪽 다리를 누군가 지그시 눌러 뜯어내는 듯한 통증이었다. 통째로 잘 튀긴 통닭을 반듯하게 접시에 올린 후 먹음직스러운 한쪽 다리를 뜯기 위해 누르며 뜯어내는 그런 식.
남편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있고 잠귀가 어두워 다행이다. 두 손으로 고관절이 흔들리지 않도록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큰 관절의 심야 통증이 있는 날, 작은 관절들의 통증은 수채화의 배경처럼 엷게 깔리며 짙은 채도의 중앙부를 큰 관절에게 넘겨준다. 잘도 서로를 배려하며 비켜서 오가는구나. 그 와중에 나는 너희의 질서 정연한 모습을 칭찬해. 덕분에 나는 통증의 갑옷으로 온몸을 빈틈없이 감쌀 수 있게 되었거든.
오른손으로 고관절 부분을 단단히 잡고 왼발로 깨금발을 뛴다. 콩, 콩, 콩. 14층 식구들 미안해요. 갑옷 입은 깨금발 용사 따윈 제발 개의치 말고 주무시길!
나의 목적지는 거실의 한쪽 벽면에 위치한 소파다. 가전제품의 LED의 불빛을 살피며 소파로 다가가 그의 무릎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앉는다. 잠시 내쉬는 깊은숨. 후…
애매하게 침착해져서 혹은 어정쩡 히 우울해져서 앉아있는 나를 보라. 나는 어제 낮, 진심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다. 일에 진심인 사람은 알 일. 화장실도 가지 않고 ‘이것만, 끝내리라, 이것만!’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나를 격려하며 재촉했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중요한 것은 일을 ‘완벽하게’ 마치는 것.
희미한 어둠 속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우어? 나는 몹시 놀라 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한시가 다 되어간다. 새벽 한 시. 산 사람들은 거의 잠들기 시작하고 귀신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애기야, 누가 보든 안 보든 열심히 해. 누가 안 볼 때 더 잘해야 해. 네가 네 자신을 돌아보아서 전혀 부끄러움이 없도록. “
머리에서 어깨까지만 희미하게 보이고 아무 표정도 없이 입술도 움직이지 않은 채 음성을 내 귀에 흘리는 ‘아버지 같은 무엇’. 아버지 같은 저 무엇이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아쉬운 건지, 만족한 건지, 계속 있던 건지, 지금 떠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흐믈흐믈 흐려지며 공기 중에 흩어진다.
아버지, 내가 아버지 말을 잘 듣긴 듣나 봐. 결국 나는 누가 있으나 없으나 잘하는 사람이 되었어. 그런데 누가 그러더라. 보는 데서 잘해야 한다고. 안보는 데서 잘할 필요 없다고. 사람들은 그걸 모른대. 안보는 데서 열심히 하는 나를 누군가는 결국 알아보게 되긴 하겠지. 그런데 그게 선명하지 않은 채 미루어 짐작해야 하는 부분이잖아. 그래서 그런 걸까? 선명하게 나를 이끌어 준 사람도, 칭찬하는 사람도 없어. 인정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야, 사실은 인정을 바란다고 할 수 있어. 아버지, 난 인정받고 싶었어. 모든 면에서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이미 충분하다는 말을 그들에게 듣고 싶었어. 열심히 했고, 열심히 하고 있는 데 왠지 무언가 잘못된 느낌이 들어. 아버지, 내가 너무 아파.
귀신의 시간, 어둠 속에 잠시 다녀간 아버지와 같은 무엇. 그 덕분에 홀로 남겨진 느낌을 받는다. 왠지 서러운 느낌에 복받쳐 눈물이 흐른다.
소리 내어 울 사이도 없이 이어지는 다음 순간, 거실의 빈 공간을 채우는 여중 3학년 우리 반 교실. 소박한 복장, 작은 체구, 웨이브의 단발을 한 국어 선생님이 칠판에 무언가 적고 있다. 흐르는 눈물로 시야가 흐려져 보이지 않는 데다 그녀의 뒷모습은 머리에서 허리 부분만 선명할 뿐 아랫부분이 없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칠판에 적힌 그 글을 보려 애쓴다.
개똥벌레,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 저기 개똥 무덤이 내 집인걸.
당시 중3 영어 선생님(남, 연하)과 국어 선생님(여, 연상)이 사귄다고 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났었다. 영어 선생님을 좋아하던 몇 아이들이 국어 선생님의 교무실 책상에 비난성 쪽지를 남기거나 이상한 물건을 국어 시간 교탁에 올려놓는다거나 하며 유치하게 괴롭혔었다.
수업 시간에 저분은 가끔 자신이 좋아하는 가요의 가사를 칠판에 고운 글씨로 적고 한 소절씩 알려 주며 함께 부르곤 했다. 뜬소문의 주인공이 되기 전까지는 존경하는 아이들도 많았고, 서정적인 가사의 가요를 음악이 아닌 국어 시간에 부를 수 있다는 것에 들뜨곤 했다.
개똥벌레는 그녀와 우리가 함께 부른 마지막 노래다. 나와 반 아이들 중 몇은 평소처럼 조용히 따라 불렀고 절반 이상의 아이들은 팔짱을 낀 채 칠판을 노려보며 거의 부르지 않았다. 분단과 분단 사이를 소리 없이 이동하며 함께 노래를 부르던 그녀가 나의 곁을 지날 때 흐르던 눈물을 보았다. 깜박이지 않는 동그랗고 큰 눈에 투명한 눈물이 알알이 맺혀 흘러내린다. 어깨의 들썩임이나 콧물도 없고, 얼굴의 상기됨이나 표정도 없이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20년이나 지난 지금 내 앞의 ‘국어 선생님 같은 그 무엇’도 역시 표정 없는 얼굴에 눈물이 흐른다. 더없이 슬프다. 슬프고 아픈 눈물을 내게 보이며 그것이, 그 무엇이 서 있다. 하필이면 이런 때, 이곳에 그것이 서 있다.
그러니까요. 선생님보다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린 데다 얼굴에 여드름 자국도 심한, 못생긴 영어 선생님과 선생님이 사귀다니요. 진짜 사귀셨던 걸까요? 저는 뭐 별로 관심도 없었지만요. 당시 친구들이 총각 선생님 결혼식 앞두고 운다던가 하는 걸 저는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성년과 미성년, 사랑과 질투 그런 소재들은 제 관심사가 아니었어요. 그건 그렇고, 선생님은 무엇이 어떤 식으로 슬퍼서 그렇게 울었던 걸까요? 그리고 그 일이 어떤 의미여서 선생님은 그 길로 멀리 떠나셨을까요? 유치한 십 대 아이들에게 복수라도? 그것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적어도 선생님 괴롭혔던 몇몇 유치한 친구들은 그 이후 말수가 줄었고, 우울하게 지냈던 것 같아요. 죄지은 아이들처럼요. 아니, 그때의 일을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27번! 널 괴롭게 하는 것은 언제나 너 자신이야. “
이 말을 남기고 다시 홀연히 사라지는 ‘국어 선생님 같은 그 무엇’, 어둠 속에 다시 나는 홀로 남겨진다.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저기 개똥 무덤이 내 집인걸… 이게 나인걸. 한없이 약하고 미움이 많은 나. 당신의 마음과 모든 말을 존중합니다, 다만 나를 괴롭히지는 말아 주세요. 괜찮아 보여도 나는 괜찮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만.
몸의 통증에서 마음의 통증으로 관심이 옮겨 간 나는 결심 같은 것을 해본다. 어렵겠지만 거절도 해보리라. 잘되지 않겠지만 부당하면 따져보리라. 눈 꼭 감고, 주먹 꼭 쥔 채.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으니 어쩌면 목소리가 떨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눈물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나를 몰아세우면서까지 관계를 돌보지 않으리라. 그러다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죄책감 없이 거절하고, 나의 편에 서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지 않을까?
나를 불쏘시개 삼아 태운 관계의 불꽃은 결국 내 마음속에 상대에 대한 미움의 재가 남았어. 미움의 재를 차곡차곡 채우다 가득 차게 되면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서서히 조금씩 멀리하며 관계를 정리했어. 이 상황을 나는 ‘재를 조금씩 쏟아 버리다.’라고 표현해.
재를 모두 쏟아 버린 후 상대는 내 세상에서 완전히 삭제되는데 자신이 죽을 때까지 내 세상에 없는 사람이란 걸 절대 모르지. 비겁해? 그래, 맞아, 비겁해.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나는 아마 살아있지 못할 거야.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나는 점점 미워하는 사람이 늘어갔거든. 미움은 무엇일까? 상대가 드리운 것도 아닌 쇠줄을 어디선가 주워 들고 나 스스로 몸에 감으며 상대를 원망하는 것, 그것이 미움이었어. 스스로 묶었기에 풀어낼 수도 있는 그 쇠줄을 더욱 잡아당기며 스스로 마음을 옥죄고 괴롭히는 게 미움이라고.
통증은, 나에게 찾아온 이 병증은 다름 아닌 미움에서 비롯되었다. 마음이 산란한 가운데 피어난 꽃, 통증, 통증, 통증…
벽시계를 힐끗 본다. 세 시를 지나 네 시가 다 되어간다. 귀신의 시간을 홀로 보내며 산 사람들의 세계를, 그 방식을 통찰한다. 나는 눈물을 닦고, 통이 트고 곧 밝아올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다. 여느 때처럼 아픈 손으로 얼굴을 씻고,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다리를 절뚝이며 출근했다. 예전과 다름없는 나였으나 그것이 어제의 나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