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뭐 하는 사람일까?
"나는 콘텐츠 마케터로 일해!"
"나는 웹 디자인 해."
"나는 앱 개발자야."
이렇게 짧고 명료하게 직업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나도 내 일을 한 단어로 설명하고 싶은데 뭐라 칭할 단어가 없었다. 누군가 내 직업을 물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뭐.. 이것저것 해요."
첫 회사를 퇴사하곤 거의 도망치듯 대학에 입학했다. 도망쳤다고 말하긴 하지만 사실 고졸로 내 꿈을 이루기엔 모르는 게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광고와 디자인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도 하고 부모님 두 분 다 미대를 나와서 아주 자연스럽게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대졸'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다시 사회로 나가 한 이커머스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채용공고에 쓰여있던 글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확실한 건 '광고물 제작'이라는 업무 내용이 쓰여있었다. 마음이 설렜다. '드디어 나 광고라는 걸 내 손으로 만들어볼 수 있는 건가?'
맞았다. 정말 내가 만든 광고가 SNS나 포털사이트에 뿌려졌다. 이 회사를 다닌 1년 10개월 동안 딱 4번 정도 말이다. 내 메인 업무는 회사 사업과 전혀 관련이 없는 대표님 지인의 유튜브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촬영도 해주고 편집도 하고, 그냥 그 유튜브 PD였달까? 근데 또 회사 업무를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었다. 상세페이지나 SNS 업로드용 이미지나 영상이 필요하면 간간히 작업도 했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대체 이 회사에서 뭐 하는 사람이지?'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팀이 바뀌었다. 영상미디어팀..? 뭐 이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영상 광고 만드는 일을 했다. 아니, 정확히는 영상 광고 만드는 일이 '추가' 되었다. 팀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대표님 지인의 유튜브를 관리했고 간간히 디자인 작업물을 만들었다. 거기에 영상 광고를 만드는 일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일의 종류가 많아졌지만 기분이 좋았다. 내가 가장 하고 싶던 일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팀이 바뀌었다. 라이브커머스팀..이었던가. 갑자기 라이브쇼핑 사업에 뛰어든 대표님은 조직개편을 하셨고 나는 또 일이 '추가' 됐다. 대표님 지인 유튜브 관리도 하고 디자인 작업물도 만들고 라이브커머스 보조 PD로도 일했다. 그 뒤로도 팀이 세 차례나 더 바뀌었다. 말하자면 긴데 역시나 일은 추가, 또 추가, 추가였다. 이 무슨 '시장에 가면' 게임 같은 경우인가.
가면 갈수록 이게 맞나 싶었는데 맞고 틀리고를 따질 용기가 없었다. 닥치는 대로 받아서 일하다보니 전문성이 떨어져서 메인 작업자가 일손이 부족할 때 도와주는 용병 정도의 쓸모였다. 디자이너라고 칭하기에도, 유튜브 PD라고 칭하기에도, 라이브커머스 PD라고 칭하기에도 참으로 애매한 처지였다.
그렇게 애매한 구성원으로 1년 9개월 차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회사에서 버려졌다. 정규직을 마음대로 자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전혀 관련 없는 물류팀으로 보내버리고 나를 괴롭혀서 내 발로 회사를 나가게 만들었다.
회사가 미웠다. 나에게 명확한 포지션을 주지 않은 회사가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느 하나라도 용병 이상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일을 처리하는데만 급급했던 내 탓도 있지 않을까.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누구보다도 열정 있게 최고의 결과물로 뽑아냈다면? 회사가 날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한 번이라도 주장해 봤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25살, 첫 사회생활을 했던 나이보다 무려 6살이나 더 많았어도 사회 초년생인 건 다름없었다. 선택과 집중이 서툴렀고, 주장을 말할 용기도 없었다. 사실 내가 뭘 잘하는 지도 잘 몰라서 주장이랄 게 없기도 했다.
퇴사하고선 회사에 대한 온갖 배신감과 좌절감에 몇 달을 앓긴 했는데, 덕분에 크게 한 번 성장한 것 같아서 한편으론 정말 고~마운 회사다. 내 자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거라는 것. 그렇게 난 지금 내 밥그릇 하나만큼은 기똥차게 사수하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