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처음으로 엄마가 불쌍하다고 느꼈다. 스물.. 한 세 살쯤 됐을 때 말이다. 내가 없었더라면, 동생이 없었더라면 엄마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훨훨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나를 낳고 동생을 낳아서 쉰이 넘도록 방구석에 박혀 12시간씩 일을 하는 걸까. 그럼에도 나는 엄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미안하면서도 엄마가 불쌍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는 절대 애를 낳지 않겠다고. 절대 엄마처럼은 안 살 거라고.
어릴 때 가난을 모른 채 자랐다. 정확히 1997년에 태어난 IMF 베이비지만 그냥 교과서에 나오는 어떤 역사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해마다 새로운 가방은 못 매고, 철마다 새 옷과 신발은 없었지만 그 시절엔 다들 그러고 살았다. 있는 집 애든 없는 집 애든 비슷비슷했다. 내 눈엔 그랬다.
다만, '가난'이라고 생각하던 나만의 어떤 기준이 있었다고 한다면, 소풍 때 도시락 없이 김밥천국 김밥을 사 오는 친구들이나 운동회 때 부모님이 못 오시는 친구들이 내 기준에선 그런 범주였다. 나는 소풍날이면 아침부터 내가 좋아하는 새콤한 유부초밥 냄새를 맡으며 일어났고, 운동회나 학교 이벤트 때마다 항상 엄마와 함께였다. 초등학교 때만 이랬던가? 아니... 고등학교 때까지 매일 아침마다 엄마표 토스트를 먹었다. 그렇게 가난을 모르고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얼마 전, 상견례를 했다. 꽤 긴장한 탓에 입이 바싹 말라 어른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나 귀만 쫑긋 세우고 있었는데 아빠가 이런 말을 했다. "몇 천 원이 없어서 버스도 못 타던 시절이 있었는데... 우리 딸이 나중에 그런 어려움이 있을 때 잘할까 모르겠네요." 순간 많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집에서 세 정거장 떨어진 교회에 갈 때 자전거에 앞 뒤로 나와 동생을 태우고 힘차게 페달을 구르던 엄마의 다리, 어쩌다 새벽에 깨 보면 항상 일하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
아빠는 유치원 때 이후론 기억에 잘 없었다. 언제는 회사에 갔고, 언제는 지방에서 일한다고 몇 달을 못 봤고, 또 언제는 새벽마다 일하시느라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자라왔다. 잇따른 실패에도 늘 도전하는 아빠와, 아무 말 없이 함께 견뎌내며 아빠몫까지 아이와 행복한 기억을 쌓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엄마 품에서. 이들은 가난이 아이들에게 묻어나지 않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많이 애썼다. 소풍날 검은 봉다리에 김밥을 들고 온 친구와, 할머니와 운동회에 온 친구의 부모도 분명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내 엄마의 최선이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었던 것뿐이겠지.
내가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는 말을 했을 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너 낳고 키울 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어. 너도 그 기쁨을 느껴봤으면 좋겠네." 거짓말. 나를 낳고 이렇게 힘들게 살았는데 어떻게 행복했을 수가 있지? 어떻게 후회를 하지 않을 수가 있지? 대체 아이가 주는 행복이 뭐길래 수 십 년을 감내할 수 있는 걸까. 이제 와서 알았다. 나는 절대 엄마처럼 안 사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 자신이 없는 것이었다. 지혜롭게 최선을 다 할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