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딱 지금만 쓸 수 있는 글

나 이제 막 쓴다.

by 노나나

내 폰 메모장엔 수십 개의 글감들이 있다. 조금 한가해지면 집중해서 써보려고, 시간이 좀 날 때 써보려고 생각이 날 때마다 하나씩 모아둔 것들. 그중엔 3년이 지나도록 꺼내지도 못한 이야기들이 수두룩하다.

딱 그때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그 번뜩 생각이 나서 메모장을 열고 끄적일 그때. 놓치면 나중엔 내가 뭘 쓰려고 남겨둔 글인지도 모르고 저 아래로 묻힌다.


일기를 밀려 쓴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한 때 일기를 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을 만큼 몰두해 있을 때가 있었는데, 오락가락하는 감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3시간 단위로 쓰고 임시저장을 눌렀다. 그 시절 일기를 보면 재밌다. 더 생생하게 기억이 나고 글에 생기가 있다. 반면에 요즘 내 일기는 텅 비어있다. 뭘 먹었고 뭘 했는지만 적혀있다. 어째 의무적으로 누가 시켜서 기록한 것 같단 말이지. 한 달, 두 달이 지난날들을 찍어둔 사진 몇 장만 보고 뒤늦은 기록을 하니까 어쩔 수가 없다. 사람은 사사로운 건 너무 빨리 까먹어버려서 그날 느낀 기분이나 감정 따위는 하루만 지나도 금세 잊어버린다.


블로그에 쓰는 일기든, 브런치에 쓰는 에세이든 마찬가지인 것 같다. 브런치북으로 내겠다며 야심 차게 시작한 '얼렁뚱땅 혼자 살기'라는 매거진은 글 5개에서 멈춰있다. 마지막 글을 쓴 지 10개월이 지났다. 고작 10개월 지났는데 못 쓸게 뭐야?라고 생각했는데, 못 쓰겠다. 혼자 사는 이야기가 이제 남 이야기 같아졌으니까. 그 10개월 동안 나는 결혼을 했고 신혼집으로 이사를 왔다. 하필 또 내가 적응이 빨라서 이 생활에 익숙해져 버렸지 뭐람. 그래서 혼자 역경을 헤치며 사는 이야기의 목차를 20개나 적어뒀지만 진전이 없는 거다. 어지러운 사회 초년생 시절 이야기를 담겠다고 시작한 '사회생활 이란 게 이런 건가요'라는 매거진도 멈춘 지 오래다. 이제 나름 혼돈의 시절을 지나 사회에서도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30대가 됐으니까. 쓸라면 쓸 수는 있겠지만 얼레벌레 혼자 살고 불안 불안하게 사회에 첫 발디딤 했던 그 시절 감정이 희석되어 찰지게 쓸 자신이 없다. 진짜 솔직하게 말하면 흥미가 사라졌지.


대신 이제 신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쓰고 싶어진다. 환장하겠다. 이렇게 자꾸만 제대로 된 매듭하나 짓지 못한 채 일만 벌인다.


글감을 모으기만 하고 미루기만 하는 게, 완벽한 글을 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다.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니까 멋지게 다듬고 다듬어서 맘에 쏙 들 때 발행해야지.' 하다가 아무 말도 못 한 채 산다. 아니 글쎄 누가 본다고. 누가 내 글을 그렇게까지 봐준다고. 애초에 내가 완벽한 글을 쓸 수 있는 깜냥이냐 되냔 말이다.


내 인생 드라마 중 하나인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야구 선수 인생 전성기 때 사고로 감방에 들어간 주인공에게 여자친구가 이런 말을 한다. "오빠, 야구가 다시 하고 싶은 거야, 1등이 하고 싶은 거야?" 아 그렇지. 나는 글을 다시 쓰고 싶은 거지 목표가 1등은 아니잖아. 그럼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즐기면 되지!


뭐든지 때가 있다. 지나면 맛 없어지는 제철 음식처럼 말이다. 오늘만, 지금만, 이 감정을 느낄 때만 쓸 수 있는 것들을 생생하게 담아 쓰기로 했다. 처음부터 예쁘고 정갈하게 담으려 애쓰지 말고 그냥 휘갈겨 쓰고 발행 버튼을 누르는 거다. 아, 예의상 맞춤법 검사는 한번 돌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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