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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i Oct 19. 2022

태초마을 그날의 선택을 기억하십니까

시작이 끝을 정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간신히 1990년대에 태어났습니다. 제 또래들은 이제 서른 줄에 이르렀습니다. 


게임은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였습니다. PC, PS, NDS. 이것들은 우리의 3종신기였습니다. 


닌텐도 DS 이전에 '게임보이'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손에 쥐기에는 제법 크고 무거운 것이었지만, 어딜 가든 '게임보이'가 있으면 심심할 틈이 없었기에 손때가 배어가도록 참 살뜰히도 쥐고 다녔습니다. 


게임보이를 사는 가장 큰 목적은 포켓몬 게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레드, 블루, 그린. 조금 더 나중에는 옐로우, 골드, 실버가 등장했습니다. 처음 151종이었던 포켓몬의 수는 251종으로 늘어났습니다. 지금의 어린 친구들도 포켓몬을 즐긴다는데, 이제는 몇 종까지 늘었는지 찾아보기도 겁이 납니다. 순정파인 저에게는 1세대 151종만이 진정한 포켓몬입니다. 


포켓몬 시리즈의 서막을 연 1세대 레드, 블루, 그린에서의 주인공은 피카츄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시작부터 선택을 요구받습니다. 플레이어는 오박사의 연구소에서 꼬부기, 파이리, 이상해씨 세 포켓몬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합니다. 이 중 하나를 고르면, 게임 내에서 저의 라이벌 캐릭터는 그 상성의 포켓몬을 골라갑니다. 제가 식물 속성인 이상해씨를 고르면, 라이벌은 불 속성인 파이리를 고르는 식입니다. 라이벌도 얄밉지만, 뭣보다 오박사가 참 얄밉습니다. 


스타팅 포켓몬을 고르는 것은 중요합니다. 물 속성의 꼬부기를 고르면, 불 속성이나 땅 속성의 포켓몬들에게는 수월하게 이길 수 있지만 식물 속성의 포켓몬들에게는 고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불 속성의 파이리를 고를 경우, 초반이 참 힘듭니다. 초반에 깨야 하는 마을 체육관이 바위 속성과 물 속성이 연달아 있어서, 파이리의 공격이 별 효과를 거두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파이리를 골랐습니다. 그리고 바위 속성의 체육관장(애니메이션에서는 '웅이'라고 불리는 그 친구입니다)에게 4연패를 당했습니다. 어린 나이지만 욕은 다 알았기에,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욕들을 내뱉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게임은 조졌습니다. 


웅이에게 4연패를 당하고, 저는 숲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벌레 포켓몬인 캐터피를 잡았습니다. 캐터피를 키워 단데기를 만들고, 다시 인고의 시간을 거쳐 나비 형태의 버터플이 만들어졌습니다. 버터플은 '수면가루'와 '환상빔'을 가지고 있어서, 웅이의 바위 포켓몬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 게임은 조졌습니다. 주인공이 되어야 할 스타팅 포켓몬, 파이리가 아무짝에 쓸모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기왕 시작한 거, 조금 더 해봅니다. 


물 속성의 트레이너 '이슬이'로부터 웅이에게 당한 패배보다 더욱 쓰라린 패배를 당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버터플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시 숲으로 가서 피카츄를 잡아서 키웠고, 간신히 이슬이를 이깁니다. 


그렇게 바위, 물을 지나 전기, 식물, 독, 에스퍼, 격투 타입의 각 관장들을 깨어나갔습니다. 어느덧 파이리는 리자몽으로 진화했습니다. 


리자몽이 '베어가르기'를 배우고, 나아가 '회오리불꽃'까지 배우게 되면 그때는 거북왕이나 이상해꽃이 감히 비길 수 없는 경지에 이릅니다. 게다가 리자몽은 날개가 있어서 비행술까지 해결이 됩니다. 이제는 단 열매를 누릴 차례가 된 것입니다. 


파이리를 고르고 두 번째 체육관에 이르기까지 저는 '조졌다'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자 가장 믿을만한 친구는 역시 리자몽이었습니다. 리자몽이 아니었더라면 사천왕을 한 번에 클리어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저는 어떤 선택을 하고, '조졌다'를 생각합니다. 차라리 포켓몬 게임이었다면 리셋하고 새로 시작할 텐데, 이건 인생이라 그러지도 못합니다. 왜 하필 파이리를 골라서 번번이 웅이에게 깨지고 이슬이한테 혼날까. 때로는 서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그래도 선택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내하고 버티는 수밖에 없습니다. 파이리가 리자몽이 되어 앞에 놓인 장애물을 베어 가르고, 회오리 같은 불꽃으로 포효하며 하늘을 날아갈 날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어떻게든 웅이를 넘고 이슬이를 건너면, 파이리의 시대는 오게 되어 있습니다. 


잘못된 선택은 존재합니다. 저절로 드는 후회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작이 끝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멀리 숲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결국 파이리는 리자몽이 되어 하늘을 날 것이고, 저는 파이리를 키운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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