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살아낸 시간들
시간은 숫자로 흐르지 않는다.
살아낸 밀도로, 견뎌낸 무게로 흐른다.
가끔, 나이를 잊는다. 아니, 잊히는 건 나이뿐만이 아니다.
기억의 조각들도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어디론가 흩어진다.
스물일곱의 단단한 몸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세계의 들판을 달리고 싶다.
알프스의 설경을 마주하고, 탁 트인 하늘에 드러눕는 상상을 한다.
그러다 현실이 나를 부른다.
“곧 진료실 들어가실게요. 혈압부터 재고 기다리세요.”
간호사의 익숙한 목소리에, 이 순간의 감각을 애써 붙잡는다.
순간 다리가 풀리고, 이름이 불린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한다.
혈액투석의 고단한 시절, 이식 초기의 위태로운 시간을 지나 어느새 15년.
그 시간은 마치 덩어리째 잘려나간 듯 네 머릿속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다.
스무 살에서 마흔으로 곧장 건너뛴 사람처럼.
이제 하루를 약으로 달래며 산다.
하지만 아버지의 신장이 언제까지 내 안에서 버텨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월 속에서 사라져 버린 기회와 말라버린 꿈들이 문득 마음을 스친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기록한 시간’과 ‘기록하지 못한 시간’을 이어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내가 살아낸 날들은 나이로 환산되지 않는다.
죽음의 경계를 지나며 잃어버린 시간을 초월해
또 하나의 ‘나’를 빚어냈다.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나를 더 많이 쓰고, 더 정성스럽게 남겼을 것이다.
눈물이 아니라, 담담한 글로.
살아낸 그 시간을 하나하나 붙잡아
마침내 내 품에 껴안을 수 있도록.
이 글은 브런치북 「그날 이후, 다시 살아가는 중」에 수록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