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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Aug 31. 2019

때로는 침묵하기

바야흐로 표현 과잉의 시대이다. 시각적 청각적 요소에다 다변, 능변의 소유자들이 도처에 넘쳐난다. 누군가를 이해시키고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좋은 의도 이리라.  

    

하지만, 그가 쏟아낸 말이 그 사람의 총체가 아닐뿐더러 그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결정적 기준은 아니다. 오히려 말을 내뱉기 이전의 생각과 그 생각이 드러나는 행동에서 우리는 그 사람을 읽는다.

     

“생각은 말로 표현하면 갇히고, 행동하면 풀려난다.”(칼릴 지브란, 모래와 거품)    

 

말로 나를 표현하려고 하다 보면 진정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경중을 가리기 어렵다. 모래밭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찾는 것과 같다. 정리되지 않은 말은 내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은 피로한 대인관계를 만들고야 만다.   

  

때때로 나를 위해서, 상대방을 위해서도 침묵이 필요하다.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구체화시킬 필요가 없는 관계가 바람직한 관계다. 침묵이 장애가 되지 않고, 대화의 수단으로 존재할 때 우리는 그를 "친구"라 부른다.

      

“침묵은 기쁨을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다.”(윌리엄 셰익스피어)  

   

아침 안개가 걷히고 처음 마주하는 꽃잎이 우리를 말로 부르던가. 우리가 자연을 접할 때 그 어떤 소란이 장애가 되었던가. 소소한 일상에서 관조가 필요한 상황은 말이 필요치 않고 오로지 침묵만이 필요하다. 그러한 진지한 침묵의 순간이 존재할 때 나와 상대방에게 존중의 의미가 부여된다.      


침묵이 깊어질수록 내가, 내 생각이 살아나고, 내가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때는 침묵에서 비롯된 바로 그 시간이다.     

 

우리는 절대적 침묵을 규율로 정하고 철저한 금식으로 명상을 수행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처럼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스스로 약속한 침묵의 시간만큼은 외부의 모든 안테나를 꺼두어야 한다.

     

때로는, 말의 유희보다는 침묵과 생각의 성찬을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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