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고 있다는 감각은 생각보다 조용하다.
성과가 좋을 때, 계획이 차질 없이 굴러갈 때,
주변의 인정이 따를 때 찾아오는 감각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 일 없이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던 날,
특별하지 않았기에 설명할 필요도 없었던 날에 더 가깝다.
나는 이제야 그 조용한 상태를 ‘잘 살고 있다’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예전의 나는 이 감각을 쉽게 믿지 못했다.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곧바로 다음을 준비해야 했고, 더 나아가야 했고, 혹시 모를 흔들림을 대비해야 했다.
잘 살고 있다는 감각은 늘 조건부였다.
지금도 괜찮지만, 계속 괜찮으려면 더 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라붙었다.
상담실에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잘 지내고는 있는데요.”
그 문장은 늘 중간에서 멈춘다.
뒤이어 붙는 말들
—아직 부족하고, 더 노력해야 하고, 이 정도로 만족하면 안 될 것 같고—
이 그 감각을 금세 지워버린다.
나는 그럴 때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럼, 오늘 하루를 몸으로 느끼면 어땠나요?”
질문이 생각에서 감각으로 옮겨가면, 표정이 달라진다.
긴장이 조금 풀리기도 하고, 어깨가 내려가기도 한다.
잘 살고 있다는 감각은 대개 설명이 아니라,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막연한 느낌으로 먼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말로 정리되기 전의 상태,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감각.
상담에서는 그 감각을 서둘러 해석하지 않고, 잠시 머물러 본다.
나 역시 오랫동안 미래를 기준으로 현재를 평가해 왔다.
이 선택이 나중에 도움이 될지,
이 속도가 뒤처지지는 않을지,
지금의 안도가 나태함은 아닐지.
그런 질문들 속에서 현재는 늘 통과해야 할 구간이 되었다.
머물 수 없는 장소.
그 사이에서 나는 잘 살고 있다는 감각을 자주 놓쳤다.
이 나이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잘 살고 있다는 감각은 목표가 아니라 신호라는 것을.
몸이 조금 덜 긴장되어 있는지,
하루를 마치며 스스로에게 거친 말을 하지 않았는지,
관계 속에서 나를 잃지 않았는지.
그런 작은 신호들은 대부분 아주 미묘해서,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요즘의 나는 잘 살고 있는지 확인할 때, 결과를 묻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오늘 내 몸은 어떤 상태였는지,
마음은 어디쯤에 머물렀는지.
누군가의 속도를 함부로 재촉하지는 않았는지,
나 자신에게 무례하지는 않았는지.
그 질문 앞에서 몸이 조금이라도 ‘맞다’는 반응을 보인다면,
그날은 충분히 잘 산 날이다.
상담가로서 나는 ‘잘 살고 있나요?’라는 말을 쉽게 건네지 않는다.
그 말에는 각자의 기준과 속도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대신 묻는다.
“요즘, 스스로를 대할 때 어떤 느낌이 드세요?”
그 질문은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의 삶이 몸과 마음에 어떻게 닿아 있는지를 비춘다.
잘 살고 있다는 감각은 대개 그 질문에 머무는 동안, 서서히 올라온다.
물론 여전히 흔들리는 날도 있다.
예전의 기준이 다시 고개를 들고,
더 빨리 가야 할 것 같고,
뒤처진 것은 아닌지 불안해질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애써 확신을 만들지 않는다.
대신 감각으로 돌아간다.
숨은 어떤지, 몸은 조여 있는지, 아니면 조금 느슨해졌는지.
감각은 언제나 정직하다.
꾸며지지 않은 상태로 지금을 말해준다.
잘 살고 있다는 감각은 남에게 보여주기 어렵다.
눈에 띄는 성취도, 분명한 결과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감각은 삶을 오래 가게 한다.
무너지지 않게 하고, 소진되지 않게 하며, 다음 날을 다시 열 수 있게 한다.
나는 이제 그 감각을 신뢰하려 한다.
크지 않아도, 분명한 쪽을.
이 나이에 나는 더 이상 잘 살고 있다는 증거를 모으지 않는다.
대신 그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조용히 찾아왔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신호를,
오늘 하루 안에서 한 번쯤은 붙잡아 보려고 한다.
마치 안부를 묻듯이.
잘 살고 있다는 감각에 대하여,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감각이 오늘 하루를 버티게 했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