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다가 너무 힘들어서 친정엄마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문화센터 수업을 가야한다며 도와주지 않는 친정엄마에게 서운함을 느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기사의 말미에는 엄마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는 딸의 이야기로 맺음이 되어 있었지만 댓글에는 ‘자기 아이는 자기가 키워라’ ‘못 키울거면 낳지 마라’는 의견이 가득했다.
그러면 이 기사의 주인공인 아이 엄마는 죄책감을 가지고 다시는 친정엄마에게 부탁을 하면 안되며 아무리 힘들어도 본인이 낳은 아이니까 오직 감내하는 것만이 답인 걸까?
솔직히 나는 이런 이야기는 너무 가혹하다고 본다.
아이는 분명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이지만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육아의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지 알 것이다.
자기 아이니까 자기가 키워라? 그것도 물론 대의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무리없이 거뜬하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모두가 그 완벽한 독박 육아의 장벽을 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들을 키우느라 이미 수년동안 고생한 친정엄마가 다시 손주 보육으로 고생을 하는 것도 속상할 일이다.
원하지 않았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들이 얼마나 많던가.
남편은 첫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 ‘왜 이 조그마한 아이 한 명을 어른 한 명이 보지 못하냐’고 이야기하던 남자였다.
수학 공식처럼 1:1 보육이면 충분하다고 만만히 여겼고 그래서 내가 복직을 할 때까지 굳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댓글같은 남자였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고 특히 복직을 준비해야 하는 나에게는 더욱 산후 조리기간이 힘들기만 했다.
결국 아이의 밤중 수유에 따른 피곤과 예기치 않은 분유갈이로 분유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온갖 고생을 다하는 아이를 보면서 남편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힘들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말은 부모님의 도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정보와 나라에서 제공하는 보육 시스템과 주변 아이 엄마 아빠들과의 연대 등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예전부터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던가.
‘육아의 우리끼리 충분해’를 외치던 폐쇄정책에 백기를 흔들고 개방정책을 도입하게 되었고 결국 우리는 모르는 건 책이며 육아맘 카페에도 묻고 근처의 친정 부모님과 함께 공동육아체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하루 몇 시간 아버지는 우리 동네까지 운동 겸 사이클을 타고 오셨고 우리집에서 샤워 후 아이를 돌봐주셨다.
나는 그 시간 동안 복직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네의 가정 어린이집을 활용했다.
당연히 엄마 품에서 크는 게 제일 좋고 아기는 아직 너무 어린 것도 맞지만 아이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서 육아는 엄마가 아닌 모든 가족의 일이며 그렇다면 가족들 모두가 적응할 수 있는 시스템, 아이를 마을이 키우듯 공동체가 함께 키우는 도움을 일찍부터 찾고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과정에는 여러 지원과 시스템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선행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지적처럼 나 복직하자고 우리 친정엄마가 나 대신 하루 종일 독박육아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젊은 나도 힘든 일이니 당연하다.
아이는 어렸지만 몇 주에 걸쳐 동네의 어린이집 리스트를 정리하고 모두 방문했다. 방문하면서 시설도 살피고 아이가 어린 경우에는 어떻게 보육을 하시는지에 대한 의견도 들었다.
그리고 가장 믿음이 간 어린이집에 매일 한 시간씩만 아이를 부탁드렸다.
이 과정이 거의 한달이 넘게 걸렸는데 이 한달 넘는 과정을 첫 째 주에는 1시간, 둘째 주에는 1시간 30분, 셋째 주에는 2시간 이런 식으로 천천히 늘려 간 것은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
맡기는 입장의 아이엄마도 천천히 아이와 떨어져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해 훈련할 수 있었고 보육해주시는 어린이집 입장에서도 아기가 천천히 어린이집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대비할 시간이 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어린이집에서는 아기 침대도 구입하고 방 시설도 변경하면서 아기를 위한 환경을 만들어주셨다.
십여 군데가 넘는 어린이집을 방문하면서 느낀 점인데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것에 대해 우려가 크고 엄마들의 불안이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좀 하고 표현도 할 줄 알고 몸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줄 알아야 보육시설에 보낼 수 있을 거라 이야기한다.
그러다보니 꽤 긴 시간을 엄마들은 독박육아를 하며 견디는 것이다.
기억할 것이다. 2017년 9월 주말부부를 하던 주부가 우울증으로 인해 아이들을 살해하고 본인도 자살을 시도했던 사건 말이다.
그는 범행 동기로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힘들었고 주말에만 집에 오는 남편도 아이를 돌보지 않고 무관심했다고 이야기했다.
이 외에도 생후 6개월밖에 안된 아기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갑자기 아기를 돌볼 자신이 없어지자 충동적으로 아이 엄마가 친자식을 살해한다던지 아이를 안고 8층에서 뛰어내리는 충격적인 사건들도 발현된 것이다.
이들에게서는 우울증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이러한 우울증은 주변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때 정신병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우울증이 비극적인 사태를 빚기 전에 해결되지 못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엄마는 그러면 안된다’라는 강박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우울증을 자각하거나 병원을 찾아가 건전하게 해결하고 도움을 받기 보다는 ‘내가 엄마인데 이래도 될까’ 라며 자책하거나 ‘엄마라면 누구나 이 정도는 힘든 거다’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되는 순간 마치 트랜스포머로 변신하듯 책임감을 장착하고 육아는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한다.
도움을 구하는 엄마는 서두의 기사처럼 부족한 엄마, 자신의 아이 하나 책임지지 못하는 여자로 비난받기 때문이다.
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해 전국 보건소에서 검사한 산후 우울증 고위험 판정 산모는 총 5810명이다.
하지만 이 중 정신건강센터 상담까지 이어진 경우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2623명일 뿐이다.
2015년에도 고 위험 판정 산모 4801명 중 51%인 2494명만 정신건강 센터에 상담을 의뢰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산후 우울증이 제대로 치료되지 못한 상태로 독박육아의 연결고리로 이어지면서 더욱 많은 안타까운 사례가 나타난다고 분석하고 있다.
엄마 혼자도 힘들고 보육시설에 맡기기도 불안하다보니 사실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1차적으로 생각하는 건 조부모 육아일 것이다.
조부모 육아가 늘다보니 요즘은 황혼육아, 할마, 할빠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하지만 이것 또한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분명 손주를 보는 기쁨도 크지만 황혼 육아를 통한 스트레스도 엄청나다.
육아 정책 연구소가 2015년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를 대상으로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주당 평균 양육시간은 42.53시간으로 법정근로시간 40시간보다도 많다.
또 한국 여성 정책 연구원의 2015년 보고서를 보면 조부모가 손주를 돌볼 때 체력적으로 힘들고 (59.4%) 교우관계나 사회 생활을 하지 못하는 어려움 (41%) 이 크다고 이야기했다.
일본에서는 손주를 돌보며 생기는 우울증을 ‘손주블루’라는 신조어로 부른다고 한다.
흔히 손주를 돌본 뒤 조부모들이 부쩍 늙는 것 같다고 토로하는데 이는 의학적으로도 그럴 듯 하다.
어린 아이를 안고 씻기다 보면 척추 후만증(등이 솟고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지는 척추 변형)이 오기도 하고 노인성 골다공증으로 척추를 압박하게도 된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도 요즘 뉴스를 보면 완벽한 대안은 될 수 없다.
꽤 큰 비용이 드는 육아도우미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것 또한 완벽한 대안은 될 수 없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완벽할 수 없다는 걸 그냥 인정해버리자는 거다.
나는 일을 하면서 육아를 하는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를 좀 더 밀착해서 돌볼 수 없었고 내가 청한 모든 도움 속에는 조부모의 희생도 있었다.
나의 부모님은 나 대신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며 보육의 차원에서 아이가 크고 교육의 차원이 되었을 때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내가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없듯, 나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아이는 자기 또래보다 꽤 일찍 어린이집을 다녀야했고 아이 아빠는 점심 시간에 유치원의 전화를 받고 달려오는 일도 경험해야 했다.
좋은 가사도우미를 만나기 위해 몇 차례의 면접을 보면서 가족이 아닌 누군가를 가족처럼 받아들이는 경험도 했으며 동네 부녀회나 엄마 카페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 모든 게 내 욕심 때문인가, 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으며 나 때문에 아이가 느린 건 아닌가에 대해 조바심을 내기도 했다.
아이는 스스로 나의 불안을 해소시켜주는 존재가 되주었지만, 아마 이러한 불안과 걱정은 아이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불안과 걱정은 엄마의 것만이 아니라는 거다.
어떤 상황이든 벌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아이와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들이 함께 해결해나가야 공동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가 때로는 잘 해결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실패하면 또 어떤가.
그 실패 덕분에 새로운 길이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엄마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완벽한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
아이는 엄마의 계획으로 크는 것이 아니기에.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마인드이다.
나도 아이도 그리고 가족들도 힘들 수 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 실패도 누구의 책임이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충분히 이겨낼 꺼리가 된다. 어떤 경우도 쉽게 희생하지 말라. 누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