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소년소녀들
다이소에서나 팔법 한 작은 양초가 흔들거리는 4인용 테이블 책상에 앉아, 우리는 신청곡을 적는 종이에 각자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적기로 하고 고심 중이었다. 그때 새봄이 가장 먼저 가수와 노래 제목을 적었는데, 잔나비의 '꿈과 책과 힘과 벽'이었다. 우리는 고심하여 적어 낸 종이를 신청곡 상자에 넣고 자리로 돌아와 부지런히 맥주잔을 비웠다. 맥주를 절반 정도 비워냈을 때였나. 바의 큰 스피커로 나오는 노래의 전주를 듣던 새봄이 말했다.
"이거 내가 신청한 노래야!"
나는 그때 잔나비의 노래를 처음 들어보았다. 새봄이가 신청한 노래는 연관 없는 단어들의 나열 같은 이상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술 취한 귀로 가사를 음미하며 들었을 때, 노래가 제법 마음에 들어 새봄이에게 물었다.
"노래 좋다. 새봄이 너 이 노래 왜 좋아하게 된 거야."
안주로 나온 땅콩을 먹으며 자신이 신청한 노래를 듣던 새봄이가 말했다.
"나, 고시 공부할 때 이 노래 듣고 많이 울었어. 위로를 많이 받았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노래라니, 궁금했다. 그리고 그런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노래들이 궁금해졌다. 그렇게 잔나비의 노래를 하나하나 찾아 듣다 나는 잔나비의 팬이 되었다.
2025.05.06 그룹사운드 잔나비 콘서트<모든 소년소녀들> 2025 잠실실내체육관
해가 뜨고 다시 지는 것에
연연하였던 나의 작은 방
-꿈과 책과 힘과 벽
누구에게나 잠시 웅크린 시절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있다. 나의 경우라면 고시 준비를 하던 시절이 그러했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자격증이나 이직을 준비하는 시절, 또 회사원들에게는 수습이나 신입 시절이 그러하지 않을까. 참으로 미숙한 시절이다. 어른이면서도 어른 같지 않은 시절, 꿈은 양손 가득 쥐고 있는데 정작 내 초라한 모습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시절, 그렇다. 잔나비의 '꿈과 책과 힘과 벽'은 그런 시절에 관한 노래다.
그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노래를 하지만 우리의 노래가 불려질 수 있을까, 지하 클럽에서 죽어라 부르고 열심히 하지만 밝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넘치는 야망을 가득 쥔 청년들은 현실의 '힘과 벽'에 계속해서 눌렸고 힘들어했다.
하루하루가
참 무서운 밤인 걸
잘도 버티는 넌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루는 더 어른이 될 테니
무덤덤한 그 눈빛을 기억해
어릴 적 본 그들의 눈을
우린 조금씩 닮아야 할 거야
-꿈과 책과 힘과 벽
벽을 넘지 못한자들에게 ,버틴다는 것은 소멸한다거나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해낸다는 말의 다른 의미라는 것을 나는 이제는 안다. 해낸 다는 것은 특출 나다는 것도 아니며 엄청난 성공을 이뤄낸다는 것도 아니다. 어찌 보면 살아낸다라는 말 같기도 한데, 많은 이들이 그런 것을 해내는 게 어른이라고 말한다. 무덤덤한 눈을 하고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어른을 닮아가는 소년들은 손에 쥔 꿈을 모래처럼 흘려버리고, 현실에서 공고하게 버티는 삶을 살아간다.
콘서트에서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며 에너지를 쏟아내던 보컬 최정훈은 '꿈과 책과 힘과 벽'을 부르다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한껏 웅크리고 있던 불확실한 시절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한 회한일까. 아니면 자신도 어른의 세계에 발을 내딛으며 아깝게 놓쳐간 꿈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언제부턴가 무덤덤한 눈을 갖게 된 나도 왠지 모를 눈물이 흘렀다.
셋 리스트가 계속해서 넘어가고 곧 신곡인 '모든 소년소녀들 : 버드맨'이 시작되었다.
그곳엔 어떤 바람이 불었기에
땀 서린 모자를 벗어 보였던가?
우린 꿈이라 했던, 날이 선 눈빛으로
노려보던 언덕 위를 이제는 떠나는가?
...
불어오는 바람에 머릴 쓸어 올리고
꿈으로 얼룩진 바짓단을 털었네.
-모든 소년소녀들1 : 버드맨
그랬던 잔나비가 모든 소년소녀를 불러 모아 콘서트를 열었다. 그리고 버드맨을 빌어 유년시절의 꿈에 대한 안녕을 고했다. '꿈으로 얼룩진 바짓단을 털며' 그들은 이제 어릴 적 꿈에서 깨어나 다른 세계로 걸어 나갈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제아무리 웅크린 시절이라도 양손 가득 쥔 꿈이 있었고, 그저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에 연연하는 고통스러운 날의 연속일지라도 나는 웃을 일도 많았다고. 이제는 다 커버린 소년소녀들과 앞으로 커나갈 소년소녀들에게도 실로 따뜻한 인사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꿈이 있었고. 웃을 일도 많았지"
- 모든 소년소녀들1 : 버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