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by 롤로

유치원을 다녀온 지은이가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안절부절 하며 민영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용기를 낸 듯 비장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엄마, 비밀이 뭐야?"

"비밀? 비밀은 그런 거지, 나만 알고 있어야 하는 것. 남들 모르게 나만 알고 있어야 하는 거"

"그게 맞지?"

"응. 그래"

민영의 대답을 듣고 난 지은 "역시"하고 속삭이며, 반짝 거리는 눈망울을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럼, 서로 비밀을 알고 있으면 막 특별한 사이가 되는 거야?"

"그렇겠지"


지은이의 간식 준비를 시작한 민영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민영은 주걱으로 냄비를 휘저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아직 현관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지은이의 유치원 가방을 가리키며 방으로 가져다 놓으라고 손짓했다. 가방을 방으로 옮기고 간식까지 야무지게 해치운 지은은 얼마 안있어 곤한 낮잠에 빠져들었다. 지은은 무엇이 그리 신이 났는지 자면서도 밝게 웃는 듯한 모습이었다.


민영은 잠든 지은을 잠시 집에 두고 빨리 장을 보고 오려는 요량으로 아파트 앞 마트로 발길을 옮겼다. 덥고 습한 날씨 탓에 마트까지 향하는 짧은 걸음에도 금세 지치고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마트에 도착해 된장찌개에 넣을 두부를 막 집으려고 할 때, 누군가가 민영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은이 엄마! 지은이 엄마!"

120동에 사는 하연이 엄마였다. 그녀와는 같은 조리원을 나와 친해졌다. 하연이 엄마는 동네에서 발이 넓어 이런저런 소식을 많이 전해주는, 어디에나 한 명씩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네?"

"그 얘기 들었어요?"

"무슨 얘기요?"

"햇살 피아노 학원 다니는 아이들 집이 다 털렸대요. 예물이며 현금이며 다 털어갔대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못 들었어요? 근데 지은이도 햇살 피아노 학원 다니지 않아요?"


-


그 시각 지은이의 꿈속 나라에서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네가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고, 껍질이 까진 츄파춥스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무지개 색으로 빛이 나는 꿈속 나라에 유독 무채색의 네모반듯한 건물이 하나가 있었는데, 그곳은 지은이가 다니는 햇살 피아노 학원이었다.


꿈속 피아노 학원이 궁금해진 지은은 그곳을 들여다보기 위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건물 안을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그곳에서는 자신과 은경 선생님이 의자에 앉아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직 곡을 연주하기에는 무리인 나이인지라, 선생님이 먼저 시범을 보여주고 자신이 따라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곧 싫증이 났는지 지은은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지은아, 한 번만 더 해보자. 이거 딱 한 번만 더 연주하면 선생님이 비밀 하나 알려줄게요."

"비밀이요?"

"그래요 비밀!"


꿈속 피아노 학원에서는 지난주에 지은과 선생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다시 한번 그려지고 있었다.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올린 지은은 선생님의 비밀이 궁금했는지 부지런히 연습을 했다. 선생님 옆 자리에 앉아 오늘 해야 할 부분을 다 완료한 지은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선생님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알았어 비밀 알려줄게"


그렇게 말하며 선생님은 지은이의 귀에 비밀을 속삭였다. 비밀을 다 이야기하고 나서 선생님은 지은이의 두 손을 잡고 말했다.


"이건 선생님의 비밀이니까 절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면 안 돼요. 알겠죠? 그리고 나중에 지은이의 비밀도 선생님한테 알려줘야 해요. 그럼 우린 특별한 사이가 될 수 있으니까요. 알겠죠?"


선생님과의 특별한 거래가 마음에 들었던지 지은이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비밀 덕분인지, 지은은 신이 나서 예정에도 없던 연습을 또 하자고 선생님을 졸랐다. 그리고 연습이 끝난 뒤 무언가 마음을 굳힌 듯 선생님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이며 말했다.


"선생님, 저희 집 현관 비밀번호는 5321*이에요."


-


놀란 민영이 두부를 내려놓으며 하연이 엄마를 떨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답하듯 하연이 엄마가 폭풍처럼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그 학원 원장이 글쎄, 아이들한테 비밀이라면서 자기 집 현관 비밀번호를 얘기해 줬대. 그러면 애들이 지들도 얘기해야 하는 줄 알고 집 현관 비밀번호를 술술 불러줬다는 거야."

"비밀번호를요?"

민영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래 비밀번호, 그걸로 문을 따고 들어간 거지. 생각해봐 도둑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으니 사람들이 처음에는 집이 털린 줄도 몰랐다는 거야. 효정이 알지? 효정이네 집은 결혼 예물이랑 현금이 없어졌는데 언제 없어졌는지도 몰랐대. 며칠 전에 알고 경찰에 신고하고 나서야 이 아파트에 그렇게 털린 사람이 여럿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경찰이 하나하나 확인하다 보니 전부 햇살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이 있는 집이더라고, 그게 벌써 다섯 집이야 다섯 집. 아까 아파트 단톡방에 올라온 얘기로는, 오늘 오전에 경찰들이 그 원장 잡으러 피아노 학원으로 갔는데 글쎄 이미 사라지고 없더래. 더 무서운 건 135동 범기 있잖아 범기! 범기도 같이 사라졌대! 범기 엄마 불쌍해서 어떻게 해. 지은 엄마, 지은 엄마네는 별일 없지?"


순간 민영의 손에 힘이 빠지고 점차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문득 머릿속에 갑자기 '비밀'에 대해 묻던 지은이가 떠올랐다. 심장이 점차 빨리 뛰는 것 같더니 집에 혼자 잠들어있는 지은이의 얼굴이 며칠 전 놀이터에서 마주친 범기의 얼굴과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서있는 민영을 바라보던 하연이 엄마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지은 엄마 괜찮아?"


그 순간 민영은 장바구니를 내팽개친 채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지은이의 달콤한 꿈은 계속되고 있었다. 네모난 피아노 학원에서 지은은 선생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초콜릿을 까먹기도 하고 좋아하는 츄파춥스 오렌지맛으로 실로폰을 치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문득 지은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달콤한 꿈을 끝내야 하는 시간이 온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기 아쉬운 마음에 손을 휘적휘적거리고 있을 때 지은을 부르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지은아, 지은아"


지은의 가늘게 뜬 눈 사이이 방문 너머 거실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리고 누구인지 모를 아련한 실루엣이 아직 잠이 덜 깬 지은이의 눈가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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