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거리

이태원 추모 공간을 다녀와서

by 롤로

네가 남기고 간 파우더, 선크림, 화장솜 같은 것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자니, 작은 글씨 위에 너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화장품을 가득 사와 책상 위에 하나하나 올려두며 점차 상기되던 너의 표정, 조잘대던 그 입술이 생각난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따뜻하고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것만 있었다. 너의 물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기억에 대한 집착이 끊이지가 않는다. 이젠 네가 없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지만, 나의 눈과 손끝과 모든 감각은 아직 너를 놓지 못한다. 한동안 또 그렇게 멍하니 앉아 시선이 가는 대로 너의 흔적을 좇는다.


마지막으로 너와 함께 했던 저녁 식사를 기억한다. 홍대의 작은 파스타집이었다. 네가 처음 번 돈으로 파스타를 사주겠다고 했다. 뭐 이렇게 비싸고 양도 적은 걸 먹냐고 투덜대던 나를 네가 핀잔주었고, 난 어색하게 웃었다. 창밖으로 옅은 눈발이 휘날리는 계절이었다. 투덜대다가도 막상 음식이 나오니 남기지도 않고 꾸역꾸역 다 먹었다. 저녁을 먹고 거리를 걷다가 네가 무심코 사준 그 검은색 목도리는 아직도 잘 쓰고 있다. 이제 기억은 하나의 말과 문장보다 차가운 눈이나 볼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 그리고 그날 먹었던 파스타의 맛과 같은 감각 속에 존재한다. 모든 감각 속에 네가 있지만 정작 네가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나는 살아간다.


딸아, 네가 처음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너는 누구보다 아름다웠고 누구보다 이 세상과 잘 어울리는 존재였다. 너는 네가 원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였고 나는 그런 네가 나의 딸로 태어나 무탈하게 자란 것 또한 자랑스러웠다. 그런 존재를 지키는 게 어른들의 몫이고 나의 몫인데, 나는 그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어른이 되어버렸다. 나에게서 점점 스러져가는 가능성과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것들을 너에게 너무 일찍, 많이 짐 지어주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마음을 짓누른다.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는 모든 일상에서 나를 멈추게 하는 아픔이다. 아직은 새롭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 같은 것이 보이지가 않는다.


네가 아기였을 때, 나는 네가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너의 숨과, 나의 손가락을 꼭 쥔 너의 작은 손은 나에게 위안이고 희망이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면, 너는 어김없이 깨어 나와 눈을 마주친다. 웃거나 울거나 둘 중에 하나지만, 네가 울어도 좋았고 웃어도 좋았다. 그럴 때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입 안에서, 머릿속에서 솜사탕처럼 부풀어 올랐다. 네가 선사해 주었던 그 아름다운 기억과 시절에 늘 감사하고 고맙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내가 너를 키운 게 아니라, 우린 함께 자란 것 같다. 네가 아슬히 사라진 이 거리에서 내가 왜 잠든 네 모습을 떠올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네가 이곳에서 잠든 그 순간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순간처럼 평온하기를 바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갈변(褐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