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변(褐變)

누렇게 변해버린 사과를 보면서

by 롤로

여자가 사과를 깎고 있다. 슥슥, 제법 큼지막한 사과를 한 손으로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작은 과도를 가지고 사과를 돌돌 돌리며 껍질을 벗겨냈다. 잘 깎아낸 사과를 먹기 좋은 크기로 싹둑싹둑 자른 뒤 작은 접시에 옮겨 담았다. 먹음직스러운 모양새였지만 여자와 남자는 사과를 바라보기만 할 뿐 먹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내 침묵을 참지 못한 여자가 말을 꺼낸다.


"변했어."

"뭐가 변했다는 건지 난 도무지 이해가 안 돼."

"이제 더 이상 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잖아. 그게 변한 거야."


남자는 생각한다. 너를 궁금해하지 않으면 변한 것인가.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여전히 너의 웃는 모습이 좋고, 여전히 너와 나누는 대화가 좋고, 여전히 너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마음 편하고 즐겁다. 예전처럼 대화가 많지 않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우린 이제 서로에 대해 많이 알아버렸다는 걸 너는 인정하지 못하는 듯하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음식도 알고 있고, 너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너무 명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고 묻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여자는 생각한다. 난 아직도 네가 궁금하고, 너에 대해 모르는 것 투성이다. 언뜻 이런 사람이겠거니 하고 규정하고 나면 어느 순간 이 사람은 또다시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내가 예상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새롭고, 전과 다르고,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 더 알고 싶다. 그래서 묻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게 당연한 것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음식,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알았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해 다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큰 착각 아닌가. 파스타를 좋아하는 사람도 어떤 날은 햄버거가 좋을 수 있다. 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 변했다고 치자. 나만 변한 거 같아? 너도 변했어."

"하아. 똑같네 이건. 여전히 유치하구나."


남자와 여자는 같은 생각을 한다. 도저히 변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 백 번, 천 번을 이야기해도 변하지 않는구나. 서로에게 쏟아내는 감정의 소요(所要)와 전달에 있어서는 이렇게 변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이나 태도에 있어서는 끝 모를 정도로 한결같구나 하고.


"난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넌 매번 내가 변했다고 하지만 난 그렇지 않거든 그리고 넌 이런 내 모습이 좋았던 거잖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나를 바꾸고 싶어 안달인지 모르겠어. 왜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좋아해 줄 수 없는 거야. 이해할 수 없어."


"난 그게 관심이라고 생각해. 서로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궁금해하고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게 관심이고 사랑이야. 그런데 이제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된 거 같으니까 대화도 노력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잖아. 이건 친구보다도 못한 관계라고 생각해.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관계라는 게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남자와 여자는 또 한동안 말이 없다.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입을 굳게 다물고 그저 둘 사이에 놓인 사과를 바라볼 뿐이다. 먼저 말을 내뱉거나 시선을 돌리면 둘의 사이가 위태로워지기라도 할 것만 같아 둘은 그렇게 가만히 있는다.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사과는 이내 짙은 갈색으로 변해버린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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