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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로 Jan 02. 2024

한여름의 오미자(五味子)

오미자를 마셔요

길고 투명한 잔에 달그락하고 시원한 얼음을 가득 담는다. 거의 잔의 입구까지 솟아오른 얼음 위에 새빨간 열매가 가득 들어 있는 청을 한 스푼 듬뿍 올리고 청을 사르르 녹여줄 미지근한 물을 살살 돌려가며 얼음컵 위에 부어 준다. 핑크빛 물이 얼음 위에 묘한 빛깔을 물들이며 넘실거린다. 붉게 올라가 있던 열매들은 어느새 잔의 가장 아래 부분에 가라앉는다. 그 모습이 마치 동백꽃 같기도 한데 이 차는 붉은 빛깔의 오미자(五味子)다. 의식(儀式) 같은 오미자 차(茶) 만들기를 끝내고 벌컥벌컥 마신다. 뜨거운 여름의 열기를 식히고 땀으로 배출된 기력을 돋우기에 이만한 차(茶)도 없다. 차를 다 비우고 입맛을 다실 때마다 약간의 아쉬움 같은 여운이 남는다. 


여름의 햇살처럼 선명한 기억들이 있다. 너무나 선명한 기억이어서 여름의 햇살처럼 당연하고, 겨울의 눈처럼 당연하며, 가을의 낙엽처럼 당연하고 또렷한 기억. 그중 하나는 아마 내가 처음 오미자 차를 마시게 된 날의 기억일 것이다. 그 청의 색깔만큼이나 붉고 선명한 기억은 약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피소까지 얼마나 남았어?"

"거의 5시간은 더 가야 할 거 같은데?"

"와 진짜? 큰일이네 나 물 가지고 온 거 다 떨어졌어."

"나도 다 마셨다. 어쩔 수 없지 가다가 계곡 같은 거 나오면 계곡물 마시자."

"오 좋아. 그렇게 하자.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네."


대학교 여름방학이었다. 방학을 맞이해 호기롭게 지리산 종주에 도전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 지도가 잘 되어 있던 것도 아닌데, 지리산도 사람 사는 곳이니 물어물어 찾아가면 어느새 천왕봉까지 오를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와 20대의 호기로움 같은 것들로 가득 채운 배낭 하나만 가지고 출발했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그 호기로움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산등성이에서 살며시 나타난 반쪽짜리 해의 기운만으로도 우리의 몸에서는 땀이 한 바가지씩 떨어지고 있었다. 한 걸음에 땀 한 숟갈씩 퍼서 바닥에 던지며 걷던 우리는 이제 겨우 정오가 되었는데 가지고 온 물을 거의 다 마셔버린 것이다. 바위에 걸터앉아 김밥과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으며 되돌아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배낭에 반쯤 남아 있던 호기로움은 결국 대피소까지 가보자라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산은 깊고 길은 굽이졌으며 나무도 많고 물도 많았지만 7월의 햇살은 그 모든 것들의 가장 위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마실 물은 어느새 떨어졌고 정수리는 뜨겁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계곡이 나오면 계곡물을 마시자고 합의 한 상황이었지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선뜻 그 물을 퍼마시지 못하고 가벼이 입술을 적시는 선에서 마무리하고야 말았다.


"아, 땀을 너무 많이 흘린 거 같아."

"윤민아, 지도 보니까 요 앞에 마을 있는 거 같은 데 가서 물 좀 얻어 마실까?"

"그... 그럴까?"


거듭된 실패와 고난 속에서 배낭 속에 남아 있는 호기로움도 바닥이 나버려 물을 얻어마실 용기조차 저 단전 밑에서 온 힘을 다해 끌어올려야 겨우 생길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랴 이대로 가다간 너무 많이 흘려버린 땀 때문에 천왕봉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탈수로 털썩 쓰러져 젊은 날에 생을 마감하고야 말 것 같은데, 결국 나타난 마을에서 너무나 수상한 행동거지를 하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다녔다. 생각보다 사람이 있는 집이 없어 이대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가 하던 차에 할머니 한 분이 선풍기를 틀고 툇마루에 앉아 파리를 잡고 계신 집을 발견했다. 땀으로 떡진 머리를 급하게 매만지고 할머니께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

귀가 잘 안 들리시는지 우리가 건넨 인사를 듣지 못하셨다.

"안녕하세요!"

재차 인사를 건네자 그제야 돌아보셨다.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셨기에 재빨리 용건을 말씀드렸다.

"저, 죄송한데 물 좀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그 이후의 기억은 이렇다. 할머니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큰 양재기를 챙겨 오셨고 수돗가에서 물을 틀고 콸콸 쏟아져 나오는 물을 양재기에 받으셨다. 그리고 그 위에 얼음을 한가득 부어버리시고는 붉은색 오미자 청을 밥주걱 같은 것으로 퍼서 양재기에 텀벙 텀벙 넣으셨다. 양재기를 휘휘 저으시고는 새끼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신 뒤 한 덩어리를 더 퍼서 넣고는 다시 휘 저어 커다란 커피 잔에 나눠 담아 각자의 앞에 한 잔씩 내어주셨다. 얼음에 엉겨 붙은 오미자 열매와 씨가 기억난다. 달콤하고 약간은 신듯한 그 맛이 기억이 난다. 한 잔을 다 비우자 핏줄 속에 차오르고 머릿속에 시원하게 번지던 향긋했던 오미자의 내음이 기억이 난다. 사실 첫 잔은 그 맛을 느낄 겨를도 없이 벌컥벌컥 단숨에 목 뒤로 넘겨버렸지만 잠시 여유를 챙기고 난 뒤 느낀 오미자의 맛은 실로 오묘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다. 


그때부터 여름이 올 때마다, 땀을 흠뻑 흘릴 때마다 오미자 차를 타 마시지만 그날의 그 오묘했던 맛이 되돌아 오진 않는다. 무엇 때문에 그 여름날의 오미자는 내 삶 속에 가장 선명한 기억 중 하나로 남았는지 생각해 보지만 그 답의 그물이 쉽게 좁혀지진 않는다. 흑백 사진 같은 많은 기억의 파편 속에 선명한 총천연색의 붉은빛으로 이루어진 작은 기억 하나. 여름이라는 계절에 그런 붉고 선명한 작은 기억 하나가 있다는 것은 꽤나 마음에 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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