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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로 Mar 07. 2024

기억의 끝

아침 일찍 일어난 순례가 눈이 소복이 쌓인 창 밖을 바라본다. 맑게 갠 머리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올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린 것 같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아보니 손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왔니?"

"네 할머니, 잘 지내셨죠?"

머뭇거리던 손자가 어색한 듯 인사말을 건넸다.


순례는 손자를 침대 옆 작은 의자에 앉게 하고 반가운 마음에 잡은 손을 오랫동안 놓지 않는다.


"잘 지냈니. 살이 빠진 거 같다. 잘 챙겨 먹고 다녀라. 바쁠 텐데 여기 먼 곳까지 와줘서 고맙다."

"멀긴요. 차 타고 오면 금방이에요. 잠은 잘 주무시죠?"

"잠도 잘 자고 있다. 시설이 좋고 사람들도 잘 챙겨줘서 잘 지내고 있어. 어제는 깊이 잠들어서 꿈도 꾸었단다."

"꿈이요? 무슨 꿈이요?"


순례는 꿈을 꾸었단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겨우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어제 꾼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꿈에 커다랗고 노란 은행나무랑 새빨간 앵두가 가득 달린 앵두나무가 나왔어. 나무가 나온 건 기억이 나는데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 할머니 그거 할머니 집 뒷마당에 있던 은행나무랑 앞마당에 있던 앵두 나무일 거예요."

"그래?"

"기억 안 나세요? 할아버지가 은행나무 베어버려서 고모, 삼촌이랑 많이 싸웠잖아요."

"그래? 그 이야기 좀 해주렴."


순례의 집 뒷마당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다. 가을이면 노란 잎을 우수수 떨구며 지붕과 뒷마당을 노랗게 물들이는 커다랗고 두터운 은행나무였다. 나무는 더디게 자라는 듯했지만 순례와 순례의 남편은 어느새 손자까지 둔 꼬부랑 할멈과 할아범이 되어 있었다. 노란 낭만은 둘의 허리가 곧고 거동이 불편하지 않았을 때까지만 아름다웠다. 어떤 가을 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걸 보는 것이 소름 돋았던 순례의 남편은 이장을 불러 함께 나무를 베어버렸다. 노란 은행나무 열매를 가져다가 한겨울 내내 구워 먹는 것이 나름 낭만이었던 아들과 딸은 그 나무를 왜 베어버렸냐고 화냈지만 순례의 남편은 끝내 입을 꾹 다물고 떠나갔다. 손자가 은행나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순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랬구나. 노란 잎이 쌓이면 아주 예뻤겠다."

"네 할머니, 지붕에 쌓인 잎들이 아주 예뻤어요."

"앵두나무는? 그건 들려줄 이야기가 없니?"

"기억 안 나세요? 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가 심으신 나무잖아요. 여름이면 새빨간 열매가 잔뜩 열려서 제가 따다가 세숫대야에 넣고 물 받아서 씻어 먹곤 했었는데"


앵두나무는 손자가 태어났을 때 순례의 남편이 5일장에서 앵두나무 묘목을 사다가 심은 것이다. 왜 앵두나무를 골랐는지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해 주지 않아 이유는 모르지만, 첫 손주가 태어난 걸 기념하기 위해 본인이 나름 심사숙고해서 골랐을 것이다. 앵두나무와 손자는 빠르게도 자라 어느덧 하나는 열매가 맺고 하나는 이가 빠졌다. 세월이 흘러 손자의 이가 더 이상 빠지지 않고 할머니 집에 찾아오는 일도 뜸해졌을 무렵 순례와 순례 남편은 살던 집을 정리하고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할머니 이사 가시고 앵두나무 저희 집으로 옮겨 심으려고 아빠랑 같이 가서 나무를 뽑았어요. 근데 나무를 뽑은 자리에서 제 이름이 써진 하얀 보자기가 나왔어요. 아빠랑 저랑 뭐지 하면서 열어봤는데, 보자기 안에 제 유치(乳齒)가 들어있었어요. 할머니 저 그때 얼마나 오래 울었는지 몰라요."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어릴 적 손자는 할머니가 이빨을 뽑아주면 매번 그걸 평생 간직할 것처럼 소중히 하는 듯하더니 금세 잊고 집안 곳곳에 흘리고 다녔다. 순례는 그것을 모아 앵두나무 밑에 하얀 보자기로 싸서 고이 묻어두었다.


"할머니, 기억 안 나세요?"

"..."


순례는 생각해 본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손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고 생각할 뿐이다. 그때 순례의 머릿속 저 멀리서 검은색 알갱이들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서울과 부산의 거리만큼이나 멀기만 했던 알갱이들이 점점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순례의 머릿속을 검게 물들이며 다가왔다. 노란 은행나무도 새빨간 앵두가 그득하게 피어 있던 앵두나무도 검은 알갱이들에 잠식(蠶食)되어 갔다. 알갱이들에 다 먹히고 나면 어째서인지 순례는 곧 아이가 될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검은 알갱이로 가득 차기 전에 손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순례가 또다시 사라져 가는 기억을 지키려고 발버둥 치는 사이 손자는 할머니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을 통해 자신을 기억해 주는 할머니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알아채고야 말았다. 손자는 엄마가 싸준 호박죽을 다시 가방에 넣으며 짧은 순간이나마 자신을 기억해 준 할머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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