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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얼굴이 좋아졌네

주부가 여행을 떠난다는 것

by 크림동동

“당신 얼굴이 좋아졌네.”


싱가포르에서 돌아온 날, 퇴근 후 내 얼굴을 본 남편이 말했다.


웃으며 받아넘겼지만 내심 그 말이 기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얼굴이 좋아졌다’는 말은 ‘살이 쪘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살이 쪘다는 말을 좋아할 여자는 없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바로 체중계에 올라가 숫자를 확인했다. 다행히 체중이 많이 늘진 않았다. 숫자가 바뀌긴 했지만 평소 조금 과식한 수준이었다.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니 궁금해졌다. 살이 찐 것도 아니라면 남편은 무얼 보고 내 얼굴이 좋아졌다고 한 걸까?

물론 싱가포르에 6일간 다녀온 직후이니 표면적으론 ‘얼굴이 좋아 보일’ 만했다. 하지만 이번 여정은 ‘얼굴이 좋아질 만한’ 성질의 여행이 전혀 아니었다. 실상은 오히려 출장에 가까웠다. 아들이 이번 여름 인턴은 물론 내년 학교 졸업 때까지 지낼 방을 구해야 했다. 언뜻 보기에 6일은 길어 보였지만 방을 구하고 이사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이었다. 매일 방을 보러 다니고 또 이사 후에는 짐 정리를 하느라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갔다.


그래도 이번 싱가포르행은 여러모로 운이 따라주었다. 무엇보다 시기가 좋았다. 싱가포르 학교들은 대부분 5월부터 여름 방학을 시작하는데, 마침 이때 방을 구하러 온 덕에 학교 근처에 괜찮은 매물이 꽤 있었다. 날씨 운도 있었다. 싱가포르도 최근 이상 기후로 몸살 중이라 예년과 달리 기온이 낮은 편이라고 했다. 거의 매일 비가 한차례 내리고 흐렸지만, 덕분에 생각보다 시원하게 다닐 수 있었다. 게다가 마침 망고를 비롯한 열대 과일이 제철이었다. 매일 싸고 맛있는 열대 과일을 한국에서라면 생각지도 못할 저렴한 가격에 실컷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일 좋았던 건 날씨도 과일도 아니었다. 바로 그곳에 있는 6일 동안은 청소도, 설거지도, 빨래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KakaoTalk_20250526_180715034.jpg 싱가포르에서 실컷 먹었던 열대과일



주부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주부에게 집은 ‘쉼터’가 아니라 ‘일터’이다. 사람들은 아프면 집에서 쉬라고 말하지만 주부는 아파도 집에서 쉴 수가 없다. 눈 닿는 곳마다 일거리다. 싱크대에는 그릇이 쌓여 있고, 돌아서면 빨래거리가 나오고, 가만히 있어도 먼지는 쌓인다. 아픈 몸을 이끌고 집을 치워 보지만 애쓴 티도 나지 않는다. 이는 가사 노동의 목표가 ‘현상 유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해도 표가 나지 않지만 반대로 하루라도 거르면 당장 티가 난다. 게다가 가사 노동에는 출근도 퇴근도 없다. 이는 다시 말하면 주부들에게 집이란 ‘무한 노동의 무한 반복’, 즉 24시간 돌아가는 일터라는 말이다.


그래도 요즘은 ‘이모님 3종 세트’ 같은 가전제품 덕분에 예전보다 가사 노동 부담이 많이 줄었다. 그러나 여전히 주부는 집이란 공간이 주는 압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집에 있으면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시달린다. 이러한 압박감은 집이라는 공간을 떠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주부들은 언제나 일탈을 꿈꾼다.


예전에는 빨래터, 미용실, 목욕탕 등이 그런 역할을 했다. 빨래터를 제외한 다른 곳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역할을 하고 있지만 요즘은 그것보다는 여행이 좀 더 대중적인 일상 탈출 행위가 되었다. 여행을 간다는 건 일상에서 잠시 떠나는 것이고 이러한 ‘끊어짐’은 일상의 스트레스에서 잠시 벗어날 기회를 준다. 물론 가족 여행의 경우 주부의 역할이 계속 이어지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친구끼리 자매끼리, 심지어 혼자 여행가는 주부들도 많아졌다.


굳이 쉬려고 간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번 싱가포르행은 나에게 좋은 휴식이었다. 그곳에서도 방을 구하느라 몸은 여전히 바빴지만, 매일 아침 청소를 하지 않고 침대를 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하루가 끝나고도 저녁 걱정 없이 멍하니 앉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분좋게 느껴질 수 없었다. 게다가 평소 비싸서 엄두도 내지 못하던 열대 과일을 먹을 수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이런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기분에서 먹는 음식이 한입 한입이 피부에 윤기로 흘러나왔다. 걱정 근심을 걷어갔다. 남편이 내 얼굴에서 본 것은 바로 그런 휴식의 흔적, 일상의 근심과 스트레스가 떨어져 나간 나의 밝은 얼굴이었다.


아쉽게도 여행의 깜짝 미용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이틀 만에 남편이 말했다.


“당신,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어.”


하지만 얼굴의 윤기는 사라졌어도 아직 여행이 가져다준 휴식의 에너지를 속에서 느낄 수 있다. 그 힘을 빌어 한동안 일상에 충실해야겠다. 다음 여행이, 일상에서의 일탈이 더욱 달콤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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