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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딸이 농활을 간다고 한다

농활에 대한 추억

by 크림동동

한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대학 동창이 있다. 동창에게는 애가 둘 있는데 올해 큰딸이 대학에 갔고, 터울이 좀 있는 둘째 아들은 이제 중학교 1학년이다.


오랜만에 만나 점심을 먹으며 근황을 나누었다. 건강, 부모님 안부 드을 묻다가 어느덧 이야기 주제는 애들한테로 옮겨 갔다. 나는 동창에게 큰애는 이번 방학에 뭔 하냐고 물었다. 내심 요즘 많은 대학생들이 그렇듯 여행을 가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동창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농활 간대.”


농활? 내가 아는 그 농활? 요즘 대학생들도 농활을 가나? 아니, 그전에 요즘도 농활이란 게 있기는 있나?


‘농활’이란 ‘농촌 활동’의 준말로 뿌리를 찾자면 1920년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낮에는 일손을 돕고 밤에는 글을 가르치던 야학 활동으로까지 거슬러 갈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70-80년대 군사 정권 시절 대학생들이 농촌의 일손을 도우며 노동의 의미와 농촌의 실정을 체험하는 농민 학생 연대 활동을 일컫는 말로 많이 쓰였다.

그 시절 늉활. 챗 GPT로 만든 이미지.

나는 딱 한 번 농활을 가 봤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농활을 가게 된 계기는 내가 별달리 사상에 심취하거나 봉사 정신이 투철해서 그랬던 건 아니고 순전히 당시 과 학생회장을 하던 친구 때문이었다. 그 친구 역시 ‘사상’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는 주변의 압력에 떠밀려 그해 학생회장이 된 참이었다. 때는 문민정부가 처음 출범하고 ‘X 세대’란 말이 한창 유행하던 시기였다. 농활과 같은 운동권 문화는 급속히 사라지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그럭저럭 유지되던 때였다. 친구는 그해 여름 철학과와 함께 연합 농활단을 이끌고 안동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잘 다녀오라고 손 흔들고 하숙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날 밤,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농촌 의료 봉사’에 필요한 의료 기기를 깜빡하고 집에 두고 왔는데 다음 날 아침 자기 집에 들러 그걸 가지고 안동으로 내려와 줄 수 없냐는 거였다. 방학이라 크게 바쁜 일도 없고 농활이란 게 궁금하기도 하던 참이라 그러겠다고 했다.

다음 날 새벽 6시, 친구 집에 들러 ‘의료 기기’를 친구 언니에게서 건네받았다. 새벽 6시에 동생 친구를 맞이하는 언니의 표정은 ‘이 시간에 물건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있다니!’라는 얼굴이었다. 받고 보니 그 ‘의료 기기’란 부황기였다. 나는 그때 ‘부황기’란 걸 처음 봤다. 그걸 가지고 동서울 터미널에서 안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다고는 했지만 그때까지 학교 주변과 기껏해야 서울역까지 나가는 게 고작이었던 터라 동서울 터미널이란 곳에 가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농활단이 있는 안동의 마을까지는 5시간 정도가 걸렸다. 이래저래 물어 농활단이 머무른다는 숙소에 도착했더니 다들 자고 있었다. 다행히 조금 있다 한 명씩 부스스 일어났다. 오전 활동을 끝낸 후 피곤해서 자고 있었던 거라고 했다. 친구는 부황기만 받고 나를 돌려보내기에 미안했는지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만 하루, 짧지만 처음이자 마지막 농활을 경험하게 되었다.


직접 경험한 농활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틀렸다. 내가 알기로 농활은 농촌의 부족한 일손을 돕기 위한 활동이었는데, 이건 돕는 게 아니라 숫제 방해하는 수준이었다. 오후 활동은 김매기였다. 하지만 논에 한 발 들이자마자 여기저기서 “신발이 빠졌어요.” “발이 안 빠져요.”란 말들이 튀어나왔다. 말이 좋아 논이지, 물을 많이 먹는 벼가 심어진 땅은 진흙탕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땅에 발을 들이니 발이 푹푹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땅이 부드럽고 발이 빠질지는 경험하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다. 미리 스타킹을 신는 등 준비를 했지만 막상 발을 들이니 다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일을 돕기는커녕 한 발씩 떼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힘들었다. 김매기 또한 난관이었다. 잡초란 놈은 쑥 잡아당긴다고 그냥 뽑혀 나오는 게 아니었다. 잡아당기는 데도 요령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걸 알 도리가 없는 우리들은 쓸데없이 힘만 주다 줄기만 ‘뚝’ 끊어먹기 예사였다. 아저씨들은 우리가 일 한 걸 보며 혀를 찼다. 이러면 소용없다, 뿌리까지 말끔히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도우러 온 건지, 배우러 온 건지. 방해하러 온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밤의 ‘의료 봉사’ 역시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벌레였다. 마을 회관에서 의료 봉사를 했는데 깜깜한 밤에 환하게 불이 켜진 곳이 있으니 벌레들이 사정없이 몰려들었다. 시골이라 크기도 어찌나 큰지 나방 크기가 손바닥까지는 아니어도 거진 나비에 견줄 정도였다. 방충망과 매캐한 모기향도 소용없었다. 그 와중에 농활단은 처음 써 보는 부황기와 쑥뜸을 가지고 쩔쩔매었다. 쑥뜸 사용법을 알려준다며 시범을 보이다가 뜨겁다고 소리 지르는 통에 아주머니들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하는 판이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아주머니들은 아주머니들대로, 농활단은 농활단대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모임의 목적이 ‘의료 봉사’인 건지 ‘친목 다짐’인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나는 다음 날 서울로 돌아왔다. 나의 ‘농활’에 대한 기억은 이게 전부다. 그 이후 농활단의 모습이 얼마나 나아졌는지는 모르겠다. 고작 하루, 그것도 막 농활단이 막 활동을 시작했을 때의 모습만을 봤으니 내 인상이 객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미 당시의 농활도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처럼 ‘계몽’적인 활동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때 이후 ‘농활’을 떠올릴 일은 없었다. 사실 단어조차 잊고 있었다. 오랜만에 친구 입에서 그 단어를 들으니 귀에 생소할 지경이었다.


요즘의 농활은 더 이상 계몽 운동이 아니라 일종의 농촌 체험 활동인 모양이었다. 농촌에 내려가 일손도 돕지만 그와 동시에 농촌 문화도 배우고 자연과 함께 하는 친환경적인 생활을 경험해 보는 형태인 듯했다. 친구 딸이 농활을 가려는 이유도 시골 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한 까닭에 농촌을 겪어보고 싶다는 거였다.

요즘 농활(출처: 네이버 이미지)

나는 친구 딸이 기특했다. 대학에 들어가면 너도나도 유행처럼 나가는 해외 배낭여행 대신 국내 농촌 체험 활동을 택한 모습이 예뻐 보였다. 농활이란 단어가 여전히 쓰이는 것도 반가웠다. 비록 내용은 바뀌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적절히 형태를 바꾸어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 비록 단어지만 대견하게 느껴졌다. 마치 같이 오랜 세월 평지풍파를 이겨낸 동지를 다시 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요즘 농활에서 볼 수 도시와 농촌의 새로운 관계였다.


과거 농활에서 도시와 시골은 수직적인 관계였다. 도시 대학생들은 시골로 내려가 새로운 문물과 지식을 전파했다. 요즘의 농활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오히려 도시 사람들이 자연과 우리 문화를 배우기 위해 시골로 내려간다. 도시와 시골의 관계는 더 이상 수직적이지 않고 대등하다. 그 모습이 흐뭇했다. 어쩌면 100여 년 전 야학으로 농활을 시작했던 그 시절 도시 지식인들이 궁극적으로 꿈꾸었던 것은 이런 도시와 농촌의 수평적인 관계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요즘의 농활은 처음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여름 친구 딸은 어떤 농활의 기억을 가지게 될까?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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