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봉산에서 봄을 봤다

by 크림동동

지난 주말, 응봉산에 갔다. 원래는 계획에 없던 나들이였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 남편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날씨가 너무 좋아 다들 나가는데 우리도 응봉산이라도 가자' 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지금?' 하며 말꼬리를 끌었더니, 이내 '날도 좋은데 하필 이럴 때 마트에 가서 장이나 보고 있냐'며 도리어 짜증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마트에 간다고 나설 때는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이러는 게 더 반칙 아니냐'라고 받아쳤다. 그랬더니 또 '그건 그렇지'하며 금방 수그러들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결국 '알았어, 빨리 갈게. 집에 가면 같이 가자.' 했다.


봄꽃이 필 때마다 이런 식이다. 매년 피는 봄꽃이건만 남편은 개나리가 피고 벚꽃이 피기 시작하면 매년 처음 보는 양 들뜬다. 그리고 벚꽃 명소를 가 보고 싶어 한다. 행여 한 군데도 못 가고 봄을 지내기라도 하면 두고두고 아쉬워한다. 나는 이제 봄꽃 축제에 시큰둥하건만 남편은 여전히 꽃이 피면 마음도 봄이 되나 보다.


올해는 벚꽃이 유난히 빠르다. 집 주변 대로변 가로수 벚나무는 해가 잘 들어 그런지, 지나다니는 차들 때문에 그곳만 유난히 온도가 높아 그런지 유독 꽃이 빠른 편이다. 일찍부터 봉오리가 맺히더니 지난주부터는 만개하다 못해 지나가면 꽃비가 흩날린다. 한 블록 정도의 짧은 길이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휘날리는 게 제법 장관이었다. 이제 벚꽃 따위는 별 관심 없다는 내 눈에도 예뻐 보이니 남편 마음은 오죽 달떴을까? 그래서 주말에 석촌호수라도 가자고 한 참이었다. 하지만 하필 주말 비 예보에, 그 때문에 꽃이 지기 전에 보겠다며 미리 몰려든 어마어마한 벚꽃 구경 인파 사진을 보고는 아예 갈 마음을 접은 터였다. 그러다가 주말 아침, 예보되었던 비는 안 오고, 날씨는 파란 데다가, 산책 나온 길에 아직 산 전체가 개나리로 노란 응봉산을 보니 다시 꽃구경 생각에 마음이 들썩인 모양이었다.


같이 가자 했지만 응봉산까지 가는 길은 꽤 번거로웠다. 집에서 볼 때는 바로 건너편인 것처럼 가까워 보였는데 버스를 타고 가자니 한 번 갈아타야 하는 데다가 시간도 40분이나 걸렸다. 아무래도 밥때를 거를 것 같아 미리 먹고 갈까 해 봤지만 김 빠진다 할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대신 견과류 한 줌 입에 털어 넣고 선글라스 끼고 나섰다. 점심은 좀 늦게 먹기로 하고. 그런데 남편은 호기롭게 외쳤다. '오늘은 외식하자!' 글쎄, 남편과 외식이 그다지 성공한 적이 없어 별 기대는 없지만 남편의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나도 응봉산 개나리는 한번 보고 싶긴 했다. 뱃속에 넣은 견과류가 오래 버텨 주기만을 빌면서 집을 나섰다.


압구정에서 응봉산은 바로 보이는 산이다. 사실 산이라기도 뭐 하다. 높이가 고작 94M라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지경이다. 하지만 응봉산은 남산으로 이어지는 줄기 중 하나로 원래는 산체가 컸다. 서울이 팽창하면서 산줄기가 여기저기 깍여나가 지금의 모습으로 작아진 거다. 현재 성동구 대부분이 응봉산이었다고 보면 된다. 응봉산은 또 조선 시대 왕들이 매사냥을 즐겼던 곳이기도 하다. 응봉산의 '응(鷹)'자가 바로 '매'를 뜻하는 한자다. 매는 해안의 절벽에 서식한다고 한다. 응봉산은 한강 바로 앞이라 매에게는 좋은 환경이다. 게다가 궁궐과도 가까웠으니 응봉산은 왕가의 매 사냥터로 안성맞춤이었을 거다. 이렇게 왕가의 사냥터로 이용될 정도니 응봉산은 예사 산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서 보는 한강 전망은 빼어나다. 강남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모습과는 또 틀리다. 지금은 '한강 전망'이 강남에서 강북을 바라보는 모습, 강북에서 강남을 바라보는 모습, 둘 다를 뜻하지만, 과거 '서울'이라고 하면 '사대문 안'을 뜻했으니 그때의 한강 전망이란 강북에서 강남을 바라보는 것밖에 없었다. 아니, 그때 강남은 서울이 아니었기에 사실 서울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응봉산에서 한강 건너편을 볼 때 우리는 시간을 건너뛰어 과거 조선시대 사람들이 보던 시선으로 한강 그 너머를 보는 거다.


요즘 응봉산을 말할 때 매를 언급하는 사람은 없다. 매 대신 자리한 건 개나리다. 응봉산 개나리 축제는 서울에서 가장 먼저 봄을 맞이하는 축제다. 3월 말 열리는 개나리 축제 무렵이면 응봉산은 온통 샛노랗게 물든다. 매년 봄, 성수대교, 동호대교를 지나갈 때마다 마치 전등을 밝힌 듯한 응봉산의 환한 노란색을 보며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마음먹어도 이상하게 막상 발걸음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난 주말 남편의 충동적인 행동에 따라나선 거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응봉산에 가 볼까?


작은 고추가 맵다고, 낮다고 얕보았던 응봉산은 마을버스에서 내려 전망대까지 줄곧 급경사에 계단이었다. 고작 10분 정도였지만 '헉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생각보다 뜨거운 햇볕에 살짝 덥기까지 해서 산이 낮아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전망에서 보는 경치는 그런 수고를 날리기에 충분했다.


그곳은 봄이었다. 축제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환한 노란빛은 여전히 절정으로 모든 것을 덮고 있었다. 개나리 너머 보이는 강남은 아스라이 봄 안개에 노곤해 보였다. 중랑천과 합쳐져 흐르는 한강은 한없이 여유로웠다. 따뜻한 봄볕 속에 사람들은 삼삼오오 사진을 찍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활기 있었다. 모든 것이 생기를 되찾고 피어나는 시간, 그 시간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 조선시대 사람들도 개나리가 피는 계절이면 응봉산에 올라 이런 풍경을 보았을까? 물론 그때는 강남의 저 높이 솟은 건물들은 없었겠지만 봄안개에 졸고 있는 자연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남편을 따라나서길 잘했다. 가끔 남편의 충동적인 행동이 괜찮을 때도 있다. 이번이 그랬다. 하지만 매번 그러는 건 사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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