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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몬>

그는 천재다!

by 크림동동

도서관에서 <라쇼몬>을 빌려왔다. 오래도록 표지만 보고 좀처럼 손을 뻗지는 않던 책이었다. 변명 같지만 나름의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고전을 좋아하지만 ‘문학전집’이라는 이름은 항상 좀 부담스럽다. <라쇼몬>이라는 제목도 걸렸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고등학교 다닐 때 세계 필독 단편으로 읽은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였는지 금방 기억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주 재미있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보나 마나 밋밋하고 지루할 이야기를 굳이 시간 내서 읽어야 할까?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라는 작가 이름 역시 이런 내 선입견을 바꾸기엔 부족했다. 아무래도 어딘지 고리타분하고 예스럽게 보였다. 어쩐지 자꾸 기모노를 입고 있는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래서 결론은 항상 같았다.


‘언젠가 시간 될 때 읽어봐야지. 오늘은 말고.’


언제나 그렇게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그날따라 <라쇼몬>에 눈이 딱 꽂혔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분량이 짧은 걸 선택하는 편이라 책이 얇은 게 눈에 들어왔다. 책장에서 꺼내 보니 더욱이 내가 좋아하는 단편선이었다. 첫 번째 조건은 합격. 어떤 내용인지 알아나 보려고 뒤표지의 해설을 봤다. 그런데 작가에 대한 설명을 보니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보통 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바로 ‘아쿠타가와 상’의 그 ‘아쿠타가와’였다. ‘아쿠타가와 상’이라고 하면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이다. 어지간히 유명한 일본 책들은 모두 ‘아쿠타가와 상 수상’이라는 타이틀을 있다. 갑자기 흥미가 동했다. 일본 작가들의 작가, 일본 문학상의 원조에 이름을 남긴 그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 걸까? 뒤표지에는 작가의 사진이 조그맣게 있었다. 사진 속의 인물은 내가 생각하던 ‘할아버지’가 전혀 아니었다. 젊고 이지적인 모습이 얼굴만 보면 미남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에 넓은 이마, 길고 날렵한 턱선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어딘지 조금은 거만해 보이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어떻게 보면 반항적으로도 보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눈빛이었다. 눈빛이 날카롭고 예리한 것이 마치 칼날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이런 눈빛을 가진 작가가 쓴 글은 어떨까? 그의 작품 세계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라쇼몬>을 빌려왔다.

아쿠타가와.jpeg 책 뒤표지에 실려 있는 사진



‘그는 천재다!’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이 책에 실린 14편의 단편들은 각기 다양한 문학 영역을 아우르고 있다. 어떤 작품은 동화 같고(「두자춘」, 「거미줄」) 어떤 작품은 철학 대담 같다.(「신들의 미소」) 특히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흙 한 덩이」와 「덤불 속」 이었다. 「흙 한 덩이」에서 평생 일만 하다 죽는 며느리와 그를 보는 시어머니의 지극히 현실적인 마음을 드러내는 작가의 건조한 자연주의적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덤불 속」은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이었다. 여기에서는 한 사건이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등장인물에 따라 각기 다르게 전개되는 구조가 너무 흥미진진했다. 「덤불 속」을 읽으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 사람은 천재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무려 100년도 전에 이런 시점의 변화를 선보이고 있는 이 작가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삶은 그가 쓰는 소설만큼이나 기묘하다. 그의 생모는 그를 낳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정신 이상을 일으킨다. 이 때문에 그는 외가에 입양되어 자란다. ‘아쿠타가와’라는 성도 외가의 성을 받은 것이다. 이런 기구한 환경은 그의 정신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의 자질을 보인다. 1916년 이 책에도 실린 단편, 「코」로 데뷔한다. 이 작품은 일본 근대 문학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격찬을 받았다. 이후 여러 사조를 넘나들며 뛰어난 작품들을 계속 발표한다. 그러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의 충격과 타고난 불안정한 성품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탓인지 1927년 36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아쿠타가와의 작품을 읽고 있자니 자꾸 누군가가 생각났다. 실험적이고 새로운 소설, 불안정한 주인공의 마음을 따라가는 여정, 천재였으나 불행하게 살다 너무 젊은 나이에 가 버린 작가, 바로 ‘날개’의 저자, 이상이었다. 실제 이상은 20세 때 아쿠타가와의 작품을 읽고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했다 한다. 또 그이 단편 소설, 「날개」의 서장에 나오는 “박제된 천재”가 아쿠타가와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라고 하니 내가 아쿠타가와의 글을 읽으며 이상이 떠오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작품이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외에 두 사람의 삶 역시 너무 비슷해서 놀라울 지경이었다. 이상 역시 낳아준 부모가 아닌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자란다. 그 역시 천재였다. 두 사람의 죽음조차 한창 활동할 나이에 요절했다는 점에서 같았다. 물론 한 명은 가난에 시달린 끝에 이국 땅에서 병사하고 다른 한 명은 명성의 정점에서 음독자살했다는 차이점은 있다. 이쯤되면 ‘천재란 원래 불행한 것일까’ 하는 의문조차 든다. 그 답은 알 수 없지만 남들과 다르게 보고 느끼는 그들의 정신 세계가 지극히 궁금해진다. 평범한 독자인 우리는 단지 그들이 남긴 작품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아쿠타가와가 남긴 작품들은 다양하고 각기 깊은 생각들을 담고 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자니 그동안 내심 일본 문학을 가볍게 여겼던 것이 죄스러울 정도였다. 한편으로 아쿠타카와 류노스케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었다. 그의 예민한 정신은 얼마나 바삐 움직였을까? 언제나 시끄럽고 소란스럽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개인으로 본다면 그런 정신을 갖는 것은 불행하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 정신의 단면이 뿜어내는 세계를 보는 행운은 대단하다.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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