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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 Feb 16. 2021

그저, 사는 것. 살아있는 것.

강원도에서 과테말라로

채리에게


하이, 채리. 오늘은 내편이 서울로 촬영을 가는 날이라 혼자 집에 있어. 여태 촬영이 있을 때면 늘 같이 서울을 갔는데 오늘은 일이 너무 밀려 혼자 집에 남아있어.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처음으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건데, 적막함에서 오는 두려움이 절반, 나머지 절반은 아주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어. 커피를 한잔 내려 자리에 앉아 답장을 쓴다. 


네가 편지에 쓴 이야기 중에 시호가 엄마만 찾는 게 힘들고 싫으면서도 묘하게 좋다는 글을 보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 사람이라는 동물은 참 감정이 복잡하구나 라는 생각. 나도 그렇거든, 아이를 낳아 길러보진 못했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내편이 '내 차키는 어딨어, 내 라이터 어딨지?(지 라이터까지 나한테 물어보는 건 무엇?), 내가 두꺼운 장갑이 있었던가?' 뭐 이런 사소한 걸 물어올 때면 귀찮고 짜증이 나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좋더라고. 내가 이 사람에게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인 것 같은. 나에게 있어 가장 욕망하는 욕구가 있다면 '인정 욕구'라고 할 수 있어. 인정받고 싶고 명예롭고 싶고. 그런 마음들 때문에 여태껏 일을 욕심내며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


사람의 인정 욕구를 이용해 무진장 부려먹기만 하는 가부장 문화가 예전에는 아주 흔했지. 올해 한국에는 설 명절에도 코로나 때문에 혹은 덕분에, 가족들이 모이지 않는 분위기였어. 신혼부부인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 분위기에 동참하느라 고향에는 못갔어. 결혼 후 여자들의 가장 걱정거리 하나가 명절, 제사의 집안일 문제잖아. 내가 어릴 때는 제사나 명절이 되면 여자들은 며칠 전부터 할머니 집에 모여서 음식을 했어. 남자 어른들은 그 흔한 설거지 마저 절대 도와주는 법이 없었지. 남자와 어린애들은 큰방에서 큰 상에 모여서 밥을 먹고, 여자와 며느리들은 주방 앞 작은 상에 모여앉아 큰 보울에 밥과 나물을 비벼서 퍼먹는 모습. 그런 풍경을 보고 자랐어. 과연 나는 결혼 후 어떤 명절을 보내게 될까... 궁금했어. 주방 일을 쉼 없이 하고, 작은 상에서 쪼구려않아 비빔밥을 먹는 풍경 속  저 뒷모습이 미래의 내가 되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도 많이 했던 것 같아. 다행히도 그렇지 않았어. 우리 집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더라고. 안도의 한숨 휴~!!! 그냥 짧게 갔다가 잘 얻어먹고, 잘 놀다가 왔어. (카페같이 하던 동생이 시누이가 된 건 알고 있지?)

물론 앞으로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생길 테고 내 의지나 신념과는 관계없이 하기 싫은 일들과 불편한 얼굴을 자주 하게 되겠지. 하지만 괜찮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 내편이 저리 든든하게 나를 챙겨주고 있으니 말이야. 부디 제발 시간이 흐를수록 남의 편이 되지 않길 바라며. (ㅋㅋ)


참, 그리고 영화 소울을 보고 네가 감상평을 남겼길래 나 역시 감상평을 해보자면 말이야. 영상, 음악 이런 건 다 모르겠고(실제로도 기억이 안 남) 너에게 추천하고 싶었던 이유가 여운 때문이었어.  나는 소울이 끝나고 나서 한참을 울었어. 찐으로 소리 내서 꺼이꺼이. (누가 보면 최소 친인척 사망) 영화 말미에 주인공'조'가 피아노를 치는데 하늘에 수많은 별, 넓은 높은 산, 아름다운 바다 막 이런 장면이 짧게 스치는데 가슴속 뜨거운 무언가가 막 올라오는 거야. 이렇게 아름다운 지구별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벅차게 행복해서. 그저 사는 것.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내 옆에 사랑하는 이가 있고 고개를 돌리면 창밖으로 강이 흐르고, 하늘엔 별이 빛나고... 너무 아름다워서 마구 울어버렸어. 그리고 영화를 끝나자 코로나 시대가 참 슬프기도 했고 말이야. 이런 기분이라면 당장에라도 짐을 싸서 비행기에 몸을 싣어야 하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지구별에 태어나 작디작은 대한민국에만 머물러있기는 이 짧은 생이 너무 아까우니까. 어디라도 마구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하, 아무튼 이렇게 여행 가고 싶다...로 편지를 마치게 되네. 


아무튼 우리, 살아있음에 감사하자. 곁에 있는 내 사랑하는 아이와 남편을 여전히 따뜻한 온기로 안아줄 수 있음에 감사하자.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커피를 한잔 마시며 이렇게 우리,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음에 감사하자.

그럼 20000 줄일게.


ps. 

어때? 이 무용한 것들에 감탄하는 편지를 읽으니 낭만 타령하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었니?

부디 이 글을 네가 새벽에 읽길 바라며. 

안 바쁠 때 답장 좀. 



강원도에서 도연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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