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에서 강원도로>
도연에게,
지난 편지에서 이제 식모가 있어서 당일 답장이 가능하다는 둥 그런 얘기를 늘어놓고선 답장이 다시 늦어져서 민망하구먼. 껄껄껄
나는 시호의 어금니 이앓이로 지독한 며칠을 보냈어. 지금은 조금 나아져서 다시 식모랑 나가서 놀기도 하니 조금은 살만해졌다. 휴- 왜 애는 컨디션 안 좋으면 엄마만 찾는 거냐... 그게 참 힘들고 싫으면서도 묘하게 또 좋다? 참 이상한 마음이야. 왜 그런 거 있지? 부모들은 자식이 자신의 어떤 모습이나 성격을 쏙 빼닮으면 은근히 좋아하잖아. 예를 들어 우리 엄마는 "너는 왜 짜증 많은 것까지 엄마를 닮았니~ 참내~"라고 하지만 얼굴엔 뿌듯함이 가득한 미소가 번져.
시호가 다른 사람한테는 안 가고(원래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아주 잘 가거든) 나한테만 찰싹 붙어있으려고 하는 게 '그래.. 내가 네 애미다.. ' 열 달을 힘들게 품고 배 아파 낳은 대가인가 싶고 그렇더라고. 한 가지 확실한 건 시호가 아프거나 힘들 때, 아니면 조금 턱이 높아 보이는 계단을 내려가려 내 손을 잡으려고 나를 찾을 때, 난 늘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해. '그래, 네가 엄마를 필요로 할 땐 항상 엄마가 옆에 있어줄 거야.'라고.
그런 생각은 하는데.. 사실 엊그제 밤에 악을 쓰고 울어대는 시호한테 소리 질렀다.."도대체 뭐 어떻게 해달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 사는 게 마음 같지 않네?..
그나저나 어제 네가 추천해준 영화 '소울'을 봤어. 솔직한 평을 하자면 보는 내내 조금 실망스러웠어. 두 가지 부분에서 말이야. 첫 째로는, 디즈니 영화니까 예쁜 영상미가 한가득일 줄 알았는데 영화의 절반 이상이.... 무슨 공상과학 영화 같더라고. 두 번째로는! 사실 그게 어떤 영화인지 전혀 모르고 본 건데 영화 시작 부분에서부터 재즈가 나오지 뭐니? 오예! 영화 보면서 재즈음악 실컷 들이마실 수 있겠다 싶었지! 그런데 너도 봤으니 알겠지만 재즈는 얼마 안 나오더라고. 그래서 앞서 말한 두 가지 이유로 '에이. 생각보다 별로다' 했는데 말이야,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에서 탁! 한 대 맞은 것 같았어.
나는 매 순간순간을 살 거야.
하루하루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게 정신 차려보면 시호를 씻겨서 재울 시간이 되곤 하는데, 내 하루 중 몇 번이나 나는 내 삶을 음미하고 있는 걸까.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별다른 감각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만 살아가고 있지 않나? 나에게 에너지를 주는 것들로 나를 채우는 일에 내가 너무 인색해진 건 아닐까. 마침 요즘 이런 생각들이 나를 맴돌던 참이었거든. 저 마지막 대사 한 줄로 나는 한참을 소파에 앉아 있었어. 내 하루를 더 충만하게 채우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매 순간순간을 열 손가락 열 발가락으로 감각하며 살아야지! 시호가 들러붙는 그 순간에도, 힘들다 생각하지 말고 아이와 붙어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순간을 더 절실하게 감각해야지, 하고 생각했어. 결국 이런 생각을 하며 잠에 들었으니 저 영화는 퍽 좋은 영화였다고 할 수 있다!
있잖아 도연아, 사람들이 내가 과테말라에 오고선 더 편안하고 행복해 보인다고들 해. 아무래도 이곳은 내가 청소년기를 보낸 나라이기도 하니까. 가족들도(물론 시댁식구들이지만) 있고 친구들도 많지. 그런데 정작 나는 잘 모르겠어. 이곳 사람들은 낭만이 없어 낭만이. 다들 획일화된 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 같고 말이야. 마치 '과테말라에서 한국 교민으로 살기 백서'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야. 무용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나 잔뜩 나누고 낭만 타령을 해대던 나의 지난 날들이 얼마쯤 그립다. 곧 또 어딘가에서 그런 친구가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지만! 누가 알겠어, 우리의 앞날에 또 어떤 보물들이 곳곳에 숨어있을지. :)
그럼 난 이만 저녁밥을 준비하러 가볼게!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과테말라에서 채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