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서 과테말라로
채리에게
안녕! 눈치챘겠지만 우리 펜팔 이름이 '파나마와 연남동에서 국제 펜팔'에서 '과테말라와 강원도에서 국제 펜팔'로 이름이 바뀌었어. 처음 시작대로 둘까 하다가, 네 말을 듣고 지난 몇 달간 우리에게 찾아온 변화처럼 펜팔의 매거진도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꿨어. '인제'는 빼는 걸로. 과테말라에도 지명을 따로 붙이진 않으니 과테말라와 강원도쯤으로 해두자. 그게 공평한 것 같으니.
넓은 집으로 이사도 하고, 식모까지(!) 구했다니 파나마보단 확실히 몸이 조금은 더 편해졌을 것 같아. 다른 무엇보다 애를 본다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인 걸 너무나 잘 아니까. (이모는 알지 아무렴) 참, 아쉬운 건 파나마 아파트의 수영장이 너무 아쉽다. 코로나 때문에 많이 즐기지도 못하고.(내가 왜ㅋ) 집 앞에 수영장이 있으면 맨날 나가서 수영을 하고 파라솔 밑에서 책을 읽고 그럴 것 같지만, 절대! 나 같은 귀차니즘 환자는 고작해야 일주일에 한 번을 나갈까 말까 하겠지. 아무튼 파나마의 수영장 있는 아파트를 가볼 순 없게 되었지만 분수광장이 있는 단지를 가볼 수 있다는 건 좋은 것 같아. 산책하기 좋을 테니까. 호랑이가 좋은 짝을 만나게 되어 넷이서 비행기를 나란히 타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런 날이 오겠지? :)
*과테말라에선 식모라고 하는 게 흔하다지만 어쩐지 강원도 사는 나까지 식모라고 하기엔 어색하구먼
어제는 서울을 다녀왔어. 그동안 쓰던 싱글 침대를 버리고, 나머지 짐들을 정리했어. 이렇게 서울을 다녀오는 날은 회를 먹는 날이야. 모둠회 포장, 그리고 이마트에서 특 회초밥 포장. 국물도 곁들여야 하니까 차돌 버섯 들깨 전골까지 포장 해서 소주와 함께 한 상 거하게 차려놓고 먹었지. 오랜만에 사식을 먹으니 좋더라. 매일 요리를 하려니 하루가 참 바빠. 채리가 잘 알겠지만 나는 음식을 먹을 때 가득 차려놓고 먹는 걸 좋아하잖아. 이것저것 먹을 게 많은 걸 좋아하는. 그래서 식사를 준비할 땐 늘 바빠. 그런데 역설적으로 많이 먹질 못하잖아.ㅋㅋ (그래서 넌 내가 좋다고 했지ㅋㅋ) 그래서 나와 함께 삼시 세 끼를 먹는 내편은 살이 엄청나게 찌고 있어. 내가 차려놓은 음식을 다 먹어야 하니까. 지난번 편지에 썼던 내용인데 내 옆의 사람이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고 행복하거든. 그런데 중간중간 너무 음식이 맛이 있다며 고생했다고 눈을 마주치며 웃어줘야 해. 그래야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칠 수 있어. (세상 피곤한 스타일ㅋㅋ) 내편은 아직까진 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고 서로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있지. 편지 말미에 평소 먹는 집밥 사진을 몇 장 첨부할게.
밥을 하느라 바쁘단 이야길 하고 나서 말인데, 어제는 서울을 갔다가 인제에 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요즘은 하루 종일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고 사는구나, 예전처럼 매달 나가는 카드값이나 월세 같은 비용을 걱정하지 않고 (내가 로또가 되었다거나, 갑자기 돈이 많아진 건 아니고_ 인제에 오면서 생활비가 대폭 줄었어. 배달음식을 시켜먹을 일도 없고, 출퇴근하느라 차비가 드는 것도 아니야. 전셋집을 구했기 때문에 월세가 안 나가고 이 집은 도시가스나 수도요금이 안 나오기 때문에 전기세만 내면 돼. 서울에 살때는 속눈썹도 항상 붙이고 가끔 피부관리도 받고 택시도 종종 타고 다니고...) 다음 달은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정말 감사하게도 이미 상반기 스케줄이 거의 꽉 찼어) 그런데도 하루가 너무 바쁜 거야.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내리고 서재로 가서 책을 보거나 일을 하고, 점심때가 되면 밥을 하고 또 일을 잠깐 하고 나면 저녁시간이라 저녁을 해야 되고, 그러다 소주 한잔 곁들이면 졸려서 자. 이 집의 쉐프는 무조건 '나'라서 하루가 어찌 이리 짧고도 바쁜지. 매 순간순간 쫓기듯 살던 서울에서의 삶과는 다른 의미로 바쁜데 반대로 이게 너무 좋고 행복한 거야. 그래서 어제 강원도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지금 얼마나 행복하고, 마음이 충만한지 내편에게 구구절절 설명했어. 내편은 감성을 공감하지 못하는 타입이라서 벅찬 기분에 들떠서 '행복하지? 그렇지?'라고 물으면 '응'이라고 아주 짧게 대답해. 찬물을 아주 확 끼얹는 스타일이야. 그런데도 내가 왜 이런 스타일의 남자가 좋았냐면 내가 기분이 아주 나쁠 때도 똑같이 행동한다는 거야. 불행하고 우울하고 미치도록 히스테리를 부려도 같이 화를 내지 않아. 내 감성을 공감하지 못하거든 (ㅋㅋㅋ) 그래서 감정싸움으로 번지지 않고, 나 혼자 불같이 화르르하고 있는데 그러고 있으면 옆에서 킥킥 대면서 비웃어...(또 지랄이냐고..) 그럼 난 스스로 민망해서 허허 웃고 넘어가...(?!) 아무튼 우리의 신혼 생활은 대체로 이런 식이야. 이렇게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 곳에서 나름대로 먹고사는 일에 바쁘게, 그리고 내 감정에 충실하며 그리 지내고 있어.
오늘은 글을 좀 쓰고 일을 하다가 중식을 먹을 거야. 냉동 짬뽕과 짜장면을 사둔 게 있거든. 거기다 볶음밥을 곁들이고, 멘보샤를 에어 프라이기에 튀겨서 한상 가득, 그리고 생양파를 잘라 짜장에 찍어먹어야지. 생각만 해도 동네 중국집에 온 것 같이 기분이 좋구먼.
채리의 하루도, 그곳에서 맛있는 음식과 느리지만 충실한 하루가 되길.
ps. 안바쁠 때 답장 좀
강원도에서 도연이가!
1) 일본 st 계란초밥과 소고기 초밥
2) 시골밥상 st 우렁된장과 봄나물과 밑반찬
3) 퓨전술집 st 바지락 술찜과 명란 마요 덮밥
주로 아침은 이렇게 먹어
호텔 조식 st 토스트, 해시브라운과 계란, 과일, 시리얼 각종 주스 및 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