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편지를 받자마자 노트북 충전기를 찾아 헤맸어! 이게 얼마 만에 편지를 받자마자 쓰는 답장인지 모르겠어.
늘 편지를 읽고 나면 바로 답장이 쓰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리지만, 애가 착 들러붙어있어서 그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 당일 답장이 가능하냐?! 하면, 육아와 청소를 도와주는 식모를 구했기 때문이야! 이곳에선 도우미나 메이드 같은 세련된 단어를 쓰지 않아. 아마도 과테말라로의 한국인 이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그즈음엔 그런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여전히 이곳에 사는 한국인들은 '식모'라는 단어를 사용해. 코로나 때문에 입주해서 같이 사는 식모를 쓰는데(식모는 처음 우리 집에 들어올 때 코로나 검사를 했고 부활절 연휴까지 집에 갈 수 없는 조건이야. 연휴가 끝나고 돌아오면 다시 코로나 검사를 하기로 했어 ), 이름은 Cynthia야. 발음하기 좋게 이름이 그냥 Cindy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고는 하지.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해놓고는 바로 식모를 구했어. 어머님 집에서 일주일 동안 지내다가 같이 이사를 했어. 식모와 함께 살면 여러모로 편한 부분이 많지만, 그에 따른 신경 쓰이는 것들도 제법 있는데.. 그중 첫 번째는 얘가 물건을 훔치는 애인가 아닌가.. 오랜 시간 같이 지내 신뢰가 쌓이기 전까지는 항상 그걸 의심하게 돼. 식모들이 작게는 생리대나 음식 같은 것들도 훔쳐가고 크게는.. 주인이 집에 없을 때 집을 통째로 털어가기도 해.(와우!) 그래서 사람을 잘 구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식모를 들이고 난 후에야, 퇴근한 오빠를 웃으며 반길 수 있게 되었어. 오빠에게 상냥하게 굴 수 있게 되었고 이삿짐 정리를 얼추 마쳐가는 어제부터는 저녁밥도 준비했지. 네 말대로 행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임에 틀림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식모와 함께 살게 되어 이렇게 당일 답장도 가능해졌지 뭐니!!
이사한 집에 대해서 얘기를 안 할 수 없지.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서 "당장 계약서 쓰자!" 했던 이 집은 조금 오래됐지만 깨끗하게 관리되었고 적당히 넓은 2층 집이야. 요즘 계단 오르기에 맛들린 시호 때문에 이사하자마자 계단 입구를 막는 것부터 설치했어. 1층엔 주방과 세탁실 그리고 세탁실 안쪽으로 화장실 딸린 식모방이 있어. 1층의 메인은 거실과 식탁이 있는 공간이야. 2층으로 올라오면 안방과 시호 놀이방, 게스트룸이 있고 2층의 작은 거실엔 티브이가 있어!(오늘 드디어 TV와 인터넷을 설치했다구! 꺄아) 이 집엔 파나마에서 살던 집처럼 근사한 뷰나 테라스는 없지만, 집 밖으로 나가면 단지 안에 있는 분수광장이 바로 있어서 식모가 시호를 하루에 한 번씩 데리고 나가 실컷 걷고 들어오는데, 집으로 돌아온 시호 손에는 늘 나뭇잎 같은 것들이 한가득 쥐어져 있곤 해. 어제는 시호가 나간 시간에 다른 집 아이들도 많이 나와있었던 모양이야. 다른 집 식모가 시호한테 과자를 나눠줬는데, 계속 그 식모한테 가서 더 달라고 그래서 Cynthia가 시호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와 버렸어. ㅋㅋㅋㅋㅋㅋ 앞으로는 나갈 때 과자도 챙겨가라고 해야겠어.
이 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식모의 나와바리인 세탁실이야!(나와바리만큼 딱 와 닿게 표현할 수 있는 우리말을 찾고 싶다) 너에게 보여주려고 세탁실에서 보이는 나무 한 그루 뷰를 찍어봤어. 편지 말미에 첨부할게!
나는 오늘, 막걸리를 마실 거야. 파나마에선 잘 들어오지 않던 막걸리, 어쩌다 한 번 들어와도 한 병에 7~8불씩 해서 도저히 사 마실 수 없었던 그 막걸리를, 주말에 한국 슈퍼에서 장 보면서 2병 사 왔어. 오늘 저녁에 삼겹살을 구워 친구가 갖다 준 백김치에 싸서 와사비를 살짝 얹어 먹은 다음, 어머님이 싸준 물김치에 소면을 말아서 입가심을 할 거야. 그리고 거기에 막걸리를 곁들이고 난 후, 시호를 씻겨 재우고 나면 TV와 인터넷이 설치된 기념으로 윤스테이 두 편을 연이어서 볼 거야! 오늘 저녁을 이렇게 글로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마음이 기쁘다!!
너와 편지를 주고받은 지 일 년 정도 된 것 같은데, 난 그동안 벌써 집이 두 번이나 바뀌었더라. 심지어 나라까지 바뀌었네. 오빠가 이제 당분간은 이사 같은 거 하지 말자고 그러더라구 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도 고개를 마구마구 끄덕였다... 아마도 네가 여행을 온다면.. 지금 이 집의 게스트룸에서 머물게 되지 않을까?
오늘은 괜히 내가 너의 인제 집에 머무는 겨울, 그리고 네가 과테말라 나의 집에 머무는 여름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되네. 그런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거겠지? 틀림없이 그러고 있을 거야.
네가 집에서 고립생활을 하며 만들어 먹는 집밥들도 궁금해진다. 왠지 강원도니까 나물반찬 많을 것 같고 그런 기분이 드네? (생각보다 편견이 심한 사람인가 봐 나는) 조만간 맛있는 짬뽕 집도 꼭 찾길 바라! 집밥도 좋지만, 가끔은 조미료 팍팍 들어간 사 먹는 밥이 속을 꽉 채워주는 날들도 있잖니! 순댓국과 짬뽕, 맛있는 족발집 그리고 술이 있다면 어디서든 버텨내지 못할 날들이 없을 거라 생각해!
그럼 또 소식 전할게. 눈이 많이 내리는 올해의 겨울, 따뜻하고 포근하게 신혼생활하길 바라며... 그럼, 다음 편지까지 안녕히.
p.s. 아참! 우리 펜팔 이름 바꿔야 하지 않니? 너도 연남동이 아니고 나도 파나마가 아니니까. 내가 바꾸려 시도해봤지만 나에겐 권한이 없는 것 같네? 그럼 시간 날 때 답장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