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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 Jan 19. 2021

행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제에서 과테말라로

채리에게


지난 편지 잘 받았어, 그곳에서의 생활은 파나마와 비교할 순 없겠지만 조금 더 편안해졌으리라 짐작해본다. 특히 순풍!으로 인해 다니엘 오빠가 조금 더 편해졌겠다는 생각을 했어. (왜냐? 이제 돈 주고 사 먹으면 되니까 ㅋㅋ)


네 편지를 읽고 있는데 왜 나마저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는 걸까. 한국에, 그것도 바다와 가까운 (속초 양양까지 한 시간) 곳에 사는 나 역시 파나마에서 너와 마찬가지로 회를 먹을 수가 없어. 바다가 가까워서 인지, 애매한 위치에 있는 인제에는 횟집이 없어. 물론 큰 읍내를 나가면(차로 30분 이상) 있지만 광어 한 접시를 오만 원이나 주고 먹고 싶지가 않달까. 서울은 회 엄청 싸잖아. 3만 원이면 광어에 우럭에 연어까지 섞어서 모듬으로 한 접시 먹을 수 있는 데 말이야. 뭐 더 저렴하고 합리적으로 즐기고 싶다면 마트에 파는 신선한 회를 한 접시 사서 집에서 먹어도 좋은데 말이야. 게다가 연초에는 꽃게를 좀 사다가 꽃게 찜을 하려고 했거든. 작은 읍내, 큰 읍내, 더 큰 읍내의 식자재 마트까지 뒤졌는데도 꽃게를 살 수 없었어... 대박이지? 이런 곳이야 여기가. (ㅋㅋㅋ) 그런데 너무나 위안이 되는 사실은 뭐냐면 근처에 순대국밥 집을 두 군데나 발견했다는 사실이야. 집에서 10분 거리 읍내에 한 군데, 그리고 30분 거리에 한 군데에 있는 순대 국밥 꽤 맛있더라고. 아마 이 곳을 떠난다면 그리워하게 될 정도의 맛이었어. 이제 맛있는 짬뽕집만 찾으면 난 인제에서의 2년 동안 서울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거야.


게다가 인제 집은 택배가 오지 않아. (이럴 땐 서울 그리워!!)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면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는 작은 읍내에 택배 브랜드 별로 '국제 낚시'라는 작은 슈퍼와 CJ 택배 사업소에서 택배를 받아줘. 그럼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곤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거지. 말이 차로 10분이지, 길은 또 얼마나 꼬불꼬불한지 골짜기를 몇 번이나 넘어서 택배를 찾으러 간단다. 이렇게 번거롭고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곳에서의 삶이 만족스러운 이유는 역시 자연 때문일 거야. 거실 창에서 일몰이 보이고, 소양호가 잔잔히 흘러가고, 하늘에 새들이 날아다니는 걸 보면서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세상 모든 삶을 통틀어 내가 제일 행복한 것만 같다는 생각에 빠져버리곤 하거든.


올해 한국은 눈이 많이 오고 있어. 채리가 한국에서 보낸 마지막 겨울이 2018년의 겨울, 2019년의 연초였지? 그때에 비해서 거의 10배쯤은 눈이 많이 내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이 많이 올 때마다 나는 인제에 있었고 인제는 서울만큼 눈이 오지 않았어. 딱 예쁘다. 할 정도로만 눈이 쌓이고 있어. 12월엔 출근과 인제 주말 부부생활을 했는데, 눈이 많이 온 날은 출근을 해야 하니, 새벽부터 눈을 치우고 염화칼슘을 뿌렸는데, 이젠 출근도 안 하겠다. '아싸 고립!이다!'라는 심정으로 눈 소식이 있으면 전날, 읍내로 나가 장을 10만 원어치를 보는 거야. 그리곤 자가 고립 생활을 시작하지. 매일매일 집밥을 먹으면서 말이야. 거긴 일 년 내내 한 계절이라니 눈이 가끔은 그립기도 할 채리에게 오늘 내가 만든 눈사람 사진을 한 장 부쳐 보낸다.


그곳은 일 년 내내 눈이 한 번도 오질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고 서늘한 계절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오늘 편지를 쓰면서 인제에서의 불편한 삶을 늘어놓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행복하고 충만한 건, 어쩜 행복이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전재가 달리면 조금 더 극적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네.

과테말라에 보금자리는 잘 구했는지, 이사는 언제 하는지. 채리의 가족이 머물 집은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니 정리가 좀 되면 곧 소식 전해주길 바래~ 오늘도 매 순간 즐겁지만은 않은 하루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의 행복과 충만으로 감사한 하루가 되길.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인제에서 고립 중인 도연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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