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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 Mar 30. 2021

나는 나의 것

강원도에서 과테말라로

채리에게


안녕? 오늘의 나는 서울의 한 복판, 공덕역 앞에 있는 롯데 시티호텔 5층에 머물고 있어. 지난 어느 편지에서 던가 남편이 한 달에 2번 서울에 일을 하러 나간다고 전해주었지? 오늘은 남편이 일을 하는 날이고, 나온 김에 하루를 더 붙여 이틀을 일하기로 해서 호텔을 예약했어. 이렇게 서울과 강원도를 오가는 생활은 3개월 차에 접어드는데 어느 날은 혼자 강원도 집에 있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전날 경기도 언니네로 가서 조카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밀린 대도시 업무를 보느라 남편의 퇴근시간까지 미팅에 쇼핑까지, 홍대를 하루 종일 쏘다니기도 했어. 그리고 오늘은 호텔에 머무는 날이야. 내일이면 내가 준비하던(?) 공모전의 마감날이라, 하루 종일 호텔에 처박혀 소설 수정을 할 생각으로 숙소를 잡았어. 그리고 기왕이면 조용한 환경이 필요하니까 호캉스를 하기로 한 거지. 

서울에 올 때마다 평소의, 그러니까 결혼 전 싱글 때의 텐션을 다시 찾아서 혼자 참 부지런히 놀아. 호텔에 얼리 체크인을 예약해서 아침 9시에 호텔에 들어와 낮잠을 한숨 자고, 그러고 네게 음악을 틀고 네게 편지를 쓰고 있어. 편지를 다 쓰고 나면 4층에 있는 호텔 실내 수영장엘 가볼 거야. 수영장 때문에 이 호텔을 예약했는데 정작 수영복을 들고 오질 않았어. 아직 코로나 때문에 겁이 조금 나는 상태기도 하고 오늘은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하거든. 하지만 수영장을 왜 가냐면 거기서 노트북을 하기 위함이지. 알지? 우리는 분위기를 꽤 타는 편이잖아. (사실은 뽕을 뽑기 위함이지ㅋㅋㅋ) 수영을 하는 것보다 수영장의 그 비린내를 맡으며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하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빗소리가 잘 들리는 창가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거나 책을 보거나 그래야 하니까. 그게 잠깐의 기분 환기에 아주 도움이 되니까 말이야. 


지난 네 편지에서 아무도 없는 파나마로 간 동안 너의 세계에 오빠뿐이었다는 말에 격한 공감을 했어. 어쩌면 너와 나 조금은 비슷한 감정을 겪고 있구나 하고. 아무도 모르는, 그리고 모든 게 낯선 동네로 이사 온 우리도 비슷하거든. 심지어 여긴 도시가 아니라 사람을 만날 일 조차 없으니. 기껏 하나로 마트 정도를 나가지만 누군가와 대화할 일도 없으니, 우리는 서울에 오는 2주 동안은 서로의 얼굴만 보고, 둘이서만 대화를 해. 대문을 열고 나가도 갈 곳이 없으니(여긴 마을이 아니라 산속에 있는 집이거든) 싸움이 나더라도 나갈 수도 없어...

우린 둘이 한 집에 하루 종일 붙어있지만 그렇다고 무언가를 함께하는 시간이 많은 건 아니야. 나는 아침 9시에 눈을 뜨면 커피를 내려서 바로 서재로 들어가고 아침 겸 점심을 먹을 때까지 나오지 않아. 점심을 먹고 나면 또 저녁을 먹을 때까지 일을 해. 그러고 밥을 차리고 나면 영화나 예능 같은 걸 보면서 두 시간쯤 보내고, 그러고 나면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잠을 자. 하루는 내가 같이 시간 좀 보내자고, 산책을 하러 나가자고 했더니 혼자 다녀오라고 하길래 난 불같이 화가 났지. 남편이 그러더라고. 


"나는 매일 너만 보고, 너랑만 말해. 다른 사람들 목소리도 들은 적 없고 이번 주 일주일 동안 우체부 아저씨랑 말 한번 섞은 게 전부인데 왜 서운해?"


24시간 몸은 붙어 있으면서 대화를 하지 않는 것보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같이 있을 땐 대화도 하고 공감도 하고 그런 걸 원했나 봐. 그런데 남편의 입장은 이렇게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도 축복이고 일부러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우린 늘 같이 있으니 좋지 않냐는 거지. (좀 못됐게 말하자면, '뭘 더 바래?'가 되겠다.)

싱글일 때 나는 혼자 한강에 나가 한두 시간을 거뜬히 걷다가 들어오고, 혼자서 술도 자주 마시고, 혼자서 영화도 보고 참 혼자 뭐든 잘하고, 혼자 하는 걸 좋아했던 나였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면서 더 이상 이런 문제로 서운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오더라고. (그런데 그게 잘 안돼. 아직도 하루에 열두 번씩 삐지는 나) 우린 지금 둘만의 세계에 살고 있어서 자칫 상대를 너무 의지하게 될까 봐 두렵다는 생각마저 들었어. 기껏 다잡아 놓은 성숙함을 잃어버리게 될까 봐. (내가 또 평정심을 잃기 시작하면 소유욕이 장난 없거든ㅋㅋ) 

이래서 결혼 후에도 혹은 아이를 갖게 된 후에도 자신만의 방은 늘 필요하다는 것일까? 

남편이 장난 삼아 이런 말을 자주해. 내가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할 때, 


"응 네 맘대로 다 해. 네가 주인이니까. 이 집도, 나에게도 네가 주인이야."

"그럼 나는 누가 주인이야?"

"너는 너지."


웃자고 한 농담인데 나는 사뭇 진지해. 남녀평등을 외치는 사회라지만,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았어. 내 주인은 나야. 나는 나고, 누구의 것도 될 수 없어. 그런데 하지만 남편... 너는 내 거야... (?ㅋㅋㅋㅋㅋㅋㅋ?)


참, 지난 주말엔 비가 내내 내렸는데 정자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막걸리를 마셨어. 내가 뜯은 쑥으로 쑥 전을 하고, 내가 뜯고 만든 달래장에 찍어먹었지. 강원도에도 이제 봄이 오나 봐. 온갖 알 수 없는 들꽃들이 피고 있고, 새싹들이 마구 움트기 시작했어. 나는 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앞뜰에 나가서 봄나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들어오곤 해.(물론 들여다본 다음 뜯어... 먹지) 이렇게 새로운 나의 강원도 집에서 사람에게만 의지하지 않는 나만의 의식과 시간을 만드는 중이야. 어쩐지 좀 평화롭지 않니? 내가 글을 쓰면서도 나 요즘 참 행복하네, 싶은 기분이 들어온다. 둘만의 세계가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겠어. 환경은 언제나 변하는 법이니까. 지금은 파나마가 아닌 과테말라에 있는 너도 시호가 생기면서 둘만의 세계는 깨어졌겠지만 또 다른 세계 속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테니까. 이것 또한 과정이겠지? 이런 기분들이 평범한 일상이 되는 그런 날을 기다리며. 

요즘 너만의 세계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부활절 연휴는 잘 보내고 있는지 소식 전해주렴 :)


그럼 이만,


ps. 안 바쁠 때 답장 좀

강원도에서 도연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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