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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 Aug 31. 2021

겨울을 닮은 채리에게

강원도에서 과테말라로

채리에게


 지난번 편지에 계절이야길 한다는 게 깜빡해서, 오늘은 계절 이야길 해볼까 해. 채리는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건 어쩐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너는 푹푹 찌는 날씨 속 계곡에 풍덩 뛰어 들어가는 모습보다는 코가 시린 겨울에 커피 한잔 호호 불어 먹는 모습이 더 잘 어울리거든. 나는 네 예상과 다르게 너와 같은 겨울파야. 우리 은근 공통점이 많은 거 알고 있니? ㅎㅎ 나는 겉으로 볼 때는 외향적이고, 역동적이고 어쩐지 모험과 도전이 어울리는 이미지로 비치지만 난 사실 전형적인 A형이며 늘 가던 식당에서 늘 같은 메뉴를 먹길 좋아하는 사람이야. 좋게 말해 섬세하고 나쁘게 말해 예민하지. 그리고 겨울을 좋아하고 말이지.

 겨울이 좋은 이유는 어릴 때는 여름이 싫어서였어. 덥고 땀 흘리고 습한 대구에 살다 보면 그렇게 돼. 진짜로 아프리카 같거든. (아프리카는 안 가봤지만 대프리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야)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는 여름도 싫지 않아 졌어. 서울에 살면서 여름은 더운 계절이 아니란 걸 알아버렸거든. (다수의 서울 사람들이 놀라는 소리가 들린다) 여행을 시작하면서는 더운 것도, 땀이 나는 것도, 추운 것도, 벌레가 많은 것도 그럭저럭 참아 넘기는 편이고 말이야. 그래서 지금은 여름이 싫어서 겨울이 좋다 같은 사춘기 소녀 같은 마음이 아니라, 진짜 겨울이 좋아. 눈 오는 것도 좋고, 비 오는 것도 좋고, 부드러운 울 머플러를 두르는 것도 좋고, 매일매일 똑같은 옷을 입어도 옷에 땀냄새가 배지 않는 것도 좋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 좋고, 따뜻한 남자 친구의 손을 잡고 걷는 것도 좋아. 두꺼운 양말을 신을 때도 기분이 좋고, 코는 시리고 등은 따뜻한 전기장판 위에 누워 있을 때의 기분이란… 정말 최고지.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누워만 있고 싶은 기분이 드니까. ㅎㅎ 어느 날엔가 내가 문득 궁금해서 남편한테 물었어. “나는 어떤 계절을 닮은 것 같아?” 신혼 초에 했던 질문이니까, 좀 설레고 순수한 봄을 닮았다거나 청량하고 밝은 기운이 느껴지는 여름을 닮았다거나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겨울을 닮았다고 해서 내 마음을 네가 어떻게 알았지. 우린 정말 천생연분이야. 하면서 좋아하려고 했는데 “가을을 닮았어.”라고 하더라. 어떤 의미인지 물었지만 말주변이 좋지 않은 나의 편은 “왜?”라는 질문에 “그냥”이라는 성의 없는 답변을 들었지. 게다가 또 어느 날엔가 지금 집에 4계절을 다 보내봤으니 이제 어느 계절이 제일 좋았는지 얘기해보기로 했어. 난 곰곰이 생각하다 겨울이 제일 좋다고 했어. 겨울 동안 움츠렸던 생명들이 새순을 틔고, 벌레도 없던 봄도 좋았고, 다양한 수확물을 먹을 수 있는 여름도 좋았고, 알록달록 가을도 예뻤지만, 그래도 난 겨울이 제일 좋았어. 그리고 남편에게 당신은 어땠냐 물었는데 글쎄… “모르겠어”라고 하는 거야. 그럼 생각해보라고 했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대. 결정을 할 수가 없다는 거야. 다 좋아서. 하나를 골라버리면 나머지가 너무 아쉬워서 안 되겠대. 휴. 뭐랄까… 나랑은 대화하는 방식이 좀 많이 다른 사람이구나^^ 그냥 채리랑 얘기해야지. 생각했어.

 겨울을 좋아하는 네가 사는 그곳은 겨울이 없어서 아쉽겠다. 한국에서 보냈던 겨울 사진을 보며 내내 겨울을 그리워하고 있겠지? 롱 패딩을 입고 아산 어느 한옥카페에서 마셨던 커피가 생각나네. 그리고 추운 겨울이었는데 아산 채리네 놀러 가서 족발을 시켜 먹었던 것도. 그리고 우리의 몽골 여행도 겨울이었고 말이야. 절기로 따지면 가을이었는데 네가 겨울용 두꺼운 흰색 패딩을 챙겨 온 걸 보고 약간 놀라긴 했었는데 말이야. ㅋㅋㅋㅋㅋ (쟨 추위를 많이 타나 봐) 겨울이 오면, 그리고 강원도에 눈이 부지런히 내려주면 내가 눈 사진은 많이 보내줄게. 그리고 영상으로도 자주 담아보도록 할게.

 

 요즘 네 유튜브 보는 재미가 쏠쏠해. 집밥 로그 한걸 보고 나도 요리하는 것 좀 담아봐야겠다 싶었어. 수확만 하고 정작 어떻게 먹었는지는 잘 못 보여주는 것 같아서. 삼각대를 세우고 요리를 하다가 짜증이 나서 꺼버렸어. ㅋㅋ 카메라 앞에 서니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습이 맘에 안 들더라고. 게다가 이렇게 저렇게 각도도 바꾸려고 하니 너무 귀찮고 말이야. 나는 음식을 정말 빨리 하는 스타일이거든? 너랑 비슷하게 계량 같은 거 안 하고 감으로 하는 스타일. 그런데 촬영을 하면서 하려니까 음식 하는 시간이 늘어나서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음식 하는 건 안 찍는 걸로.


네 편지 말미에 행복이란 얘길 덧붙여서 한참을 생각했어. 나는 더 행복한 걸까… 내내 맴돌더라고. 상황은 다르지만 어쩌면 사회와 외떨어져 있는 지금, 나는 이곳에 와서 더 행복해진 게 맞는 걸까 하는 고민을 했어. 결혼하고 나서 행복이란 말을 유난히 많이 안 쓰고 있더라. 행복에 대한 글도 쓰질 않고 말이야. 예전엔 행복 타령이 아주 배고프단 말보다 더 많이 나왔던 나인데. 문득 ‘왜 그런 걸까,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봤어. 그런데 있잖아. 그게 아니었어. 내가 몽골에서 빈 소원 기억하지? 널리고 널린 행복들을 알아차리게 해 달라고. 나는 요즘 지천에 널린 행복들에 둘러 쌓여있어서 행복이란 말을 꼭 꺼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더라고. 내내 모든 게 행복이니까 말이야. 그래도 말이지, 다시 다짐해보려고. 행복은 행복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더 행복해지는 거라고. 입으로 내뱉어서 그 순간을 기억시켜야 하는 거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그곳에서 더 행복한 건지 궁금해질 때면 네 주변에 지천에 널린 행복을 알아봐 주도록 하자. 그리고 꼭 소리 내어 말하자. 행복하다고 말이야.


네가 어디에 있건 늘 행복하자 채리야.




PS. 오늘은 한국에도 비가 많이 와, 우기인 그 곳에도 비가 오니?

비오는 날엔 글쓰기 만큼 좋은 게 없지. 그러면 안 바쁠 때 답장 좀.

강원도에서 행복한 도연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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