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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 May 03. 2022

행복을 정기배송받는 일

강원도에서 과테말라로

채리에게


하이~채리!

너의 지난 여행 이야기와 같이 동봉한 사진 몇 장도 함께 잘 보았다우. 네가 다녀온 마이애미를 구글맵에 찍어봤어. 꽤 가깝더라? 마치 한국에서 필리핀이나 태국에 가는 것처럼, 짧은 비행도 아닌데 그렇다고 또 장시간 비행은 아닌... 신기했어. 네게 휴가가 마이애미란 것이. 마냥 부럽기도 하고. 아니 마이애미가 아니라 마이애비라도 부러웠을 거야. (ㅋㅋㅋㅋ) 비행기를 타고 해외를 못 나간 지 3년이 다 되어 가니까.. 마지막이 2019년 발리였어. 어쩌면 너는 앞으로 내가 자주 갈 태국 여행이 부러울지도 모르겠지만. (넌 태국을 좋아하니까 ㅎ)

 참 그리고 지도를 보고 우리의 중간은 어디쯤일까 봤는데, 하와이 정도는 어때? 다음에 정말 다음에 우리가 이다음에 60살이 되고 70살이 돼도 말이야 서로 거리가 이만치 떨어져 있다면 하와이쯤에서 종종 만남을 가져보는 건 어때? 하와이는 한국에서도 7시간 정도면 직항 편으로 갈 수 있거든. 물론 내가 혼자 하와이를 입국할 때엔 입국심사대에서 크레이미걸(미친X)으로 오해를 받아 2시간을 넘게 잡혀있었지만. 이젠 나도 남편이 있다고!!! :-) 과테말라에선 하와이를 가는 게 쉬운지 한번 알아보면 좋겠어.

오랜만에 너와 여행 얘기나 실컷 하며 족발에 소주를 한잔 기울이고 싶은 밤이구나 허허.


강원도는 서울이나 네가 살던 충청도 권보다 봄이 아주 늦게 와. 여전히 강원도는 밤이 되면 춥고, 서리가 내려 작물을 심지 못해. 벌써 5월이 넘어갔는데도 말이야. 다른 지역들은 보니까 벌써 쌈채소는 수확을 했던데 강원도는 느지막이 이제야 상추 씨를 뿌렸고, 다른 작물은 심지도 않았어. 대신에 밭을 갈고 겨우내 죽어있는 나무들을 치우고 땅이 기름지도록 비료를 뿌리고 비가 오길 기다렸어. 초보 텃밭 꾼인 나는 인터넷에 올라오는 작물 사진들을 보고 초조해져서는 뭐라도 빨리 심고 싶어 안달이었는데, 옆집 할머니가 말하길 강원도는 지금 따뜻한 것 같아도 밤이 되면 얼어 죽으니 자기가 심을 때 따라심으라고 하더라고. 작년에도 그렇게 했는데 나는 올해도 여전히 발을 동동 굴렀어. 게으른 주제에 의욕은 앞서서는. 나는 여전히 매일매일 머릿속이 바쁘고 바지런히 사는 편이야. 남편은 내가 쉬는 꼴을 못 본다고 해.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다!!!'라고 해놓고 마당에 나가서 두릅을 따고 들어오니까 말이야. 방에서 컴퓨터로 일을 하고 있다가 머릿속을 비우고 싶을 때면 무작정 나가는 거지. 그리고 풀을 만지고 그러면 머릿속으로 걱정이나 고민이나 일 생각을 안 할 수 있거든. 그것이야 말로 나에게 정말 아무것도 안 하는 행위인 거야. 그래서 이렇게 강원도에 봄이 늦는 일을 나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해. 늦잠을 자도, 남들보다 씨를 늦게 뿌려도, 전국에 벚꽃 축제가 한창 일 때 벚꽃이 피지 않아도 괜찮은 곳이니까. 조금 늦지만 그래도 제시간에 모든 꽃들을 피우는 지역이니까.


그래도 낮이면 꽤 많이 따뜻해졌어. 노트북과 커피 한잔 챙겨 테라스에 앉아 있으니 행복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네가 꽃 정기배송을 받는다는 편지를 보고 나도 정기배송을 받고 싶어 졌어. 그 어떤 광고 상술에도 흔들리지 않던 내가, 네 편지 몇 줄을 보고 당장 정기배송을 검색한 건 역시 취향이 같은 사람이, 그것으로 인해 행복하다면 나에게도 분명히 보장된 행복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어쩐지 매달 꽃이 오는 날이 기다려질 것 같아. 그리고 꽃이 저무는 날까진 매일 웃겠지. 화가 나도 속이 상해도 꽃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싱그러워지겠지 싶어. 그래서 올해는 여름이 지나면서부터 정기배송을 신청해보려고. 여름까지는 아무래도 이곳은 꽃이 지천에 널리고, 널렸거든. (ㅋㅋㅋ) 뭐 장미나 백합 같은 유려한 뽐새의 꽃은 없지만 수수하고 소박하고, 가끔은 미치도록 번지는 잡초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거든. 봄에 얼른 따먹어야 하는 방풍나물을 뜯지 않고 귀찮아서 방치하면 방풍나물 꽃이 안개꽃처럼 예쁘게 피고, 쑥갓을 먹다 지쳐 내버려 두면 노란 데이지 같은 모양의 꽃이 펴. 작년에 내 귀찮음이 만들어낸 꽃다발 사진을 첨부해줄게.


여름의 소식을 기다렸겠지만 늦게 찾아오는  덕분에 나는 봄을 만끽하고 있어. 두릅을 따서 두릅 튀김을  먹고, 달래를 캐서 달래장을 만들어 밥에 쓱쓱 비벼먹어. 산나물이랑 고사리를 따서 장아찌로 담그고, 매일 찾아오는 고양이 밥을 주고, 그러면서 지내고 있어. 올해 다짐  하나가 책을 예전만큼 읽는 것이라 유튜브를  시간을 줄이고 책을 읽어. 덕분에  유튜브도 자주  보니 새로운 소식들이 많더라. 시호가 많이 컸고, 말을   알고, 에어 팟을 샀다거나 하는 것들. ㅎㅎ 여전히 레슨은 열심히 하고 있고. 바쁜 채리의  너무 보기 좋아. 네가 멀리 과테말라에 가서 외로워하거나 한국을 여전히 매일 그리워했다면 친구들도 슬펐을 텐데. 어쩐지 샘날 만큼  지내고 있으니. 안심이야 (내가 먼데 ) 하긴, 너도 나도 무인도쯤에 떨어트려놓아도 매일 뜨고 지는 해를 보면서도 "이것이 행복이지!"라고  년들이라 ㅋㅋㅋ 매일 아침마다 하루를 정기배송받는 행복처럼 여기자. 다음 답장도 늦겠지만ㅋㅋ 언젠간 보낼 거라는 보장된 행복으로 기다려 볼게.


펜팔도 2년 차에 접어들었으면서 새삼 멀리 있는 네가 오늘 또, 보고 싶구나.

그럼 이만 줄일게.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강원도에서 도연이가.




좌) 수국같이 생겼지만 불두화란 꽃      중) 쑥갓       우) 하얀색 - 방풍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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