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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채리 Jul 22. 2022

여전히 술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타입이라..

<과테말라에서 강원도에서>

세상에 마상에, 나는 네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고 찰떡같이 믿고 있었어.

네가 요즘 어딘가에 자발적으로 갇혀 주야장천 글을 쓰며 지내고 있는 걸, 인스타그램으로 보아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거든. 


'도연이가 무지 바쁘네.. 바쁜 게 끝나면 답장 써주겠지..' 이런 기가찬 생각을 품고 있다가 오랜만에 브런치를 들어와 봤는데.. 마지막 편지가 네가 보낸 것이더라구????? 


'어?? 내가 술 마시고 읽었나? 그래서 기억이 안나나..?' (여전히 술 마시면 필름이 잘 끊기는 편 ㅋㅋ)

아무래도 그랬을 가능성이 크지 싶어. ㅋㅋㅋㅋ헤헤


지난 번 편지에서 꽃을 정기배송 받기로 한 것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꽃 정기배송 8회가 모두 끝났어.

정기배송을 갱신하지는 않았어. 보장된 행복에도 숨어있는 미묘한 스트레스들이 있더라고.

이를 테면, 이런 것들이야.


그 꽃집은 한 주는 차분하고 온화한 느낌의 꽃다발을, 그 다음 주에는 여름색 짙은 트로피컬한 느낌의 꽃다발을, 또 그 다음 주엔 다양한 톤의 하얀 꽃들을 모아 어쩐지 한 여름의 풋사랑스러운 꽃다발을 .. 이런식으로 격주로 다른 컨셉의 꽃을 배송하는데.. 내가 2주에 한 번 받았더니, 내가 받을 때는 어떻게 된 게 매번 여름여름여름 트로피컬 트로피컬, 컬러풀 컬러풀인거야.


꽃으로 집 분위기를 조금 바꾸고 싶어서 일부러 한 번 배송을 스킵했어. 그리고 그 다음 주에 갖다 달라고 했지.

그런데, 중남미 사람들이 사실.. (비단, 이곳 뿐 아니라 한국 사람들처럼 야무지고 똑똑한 인종이 없는 듯하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멍청한 구석이 있달까.. 

'금주의 꽃' 사진을 인스타에서 보고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역시! 한 주 배송을 건너뛰기를 참 잘했다!'며, 며칠을 설레며 기다렸는데.. 오후까지 기다리고 기다려봐도.. 내 꽃은 배송오지 않았어..


-저기.. 내 꽃이 오늘 배송 안왔는데..

-그래? 너 꽃 주문했어?

-아니.. 나 정기배송 받는 사람인데..

-아, 그렇구나!!! 그런데 너는 2주에 한 번 배송받기 때문에.. 이번 주는 네 꽃이 배송 나가는 날이 아니잖아~ 그래서 배송이 안 간거야.

-응.. 근데 우리 며칠 전에 이렇게 대화 나눴잖아 (배송일자 변경한 채팅을 캡처해서 보냄. 바로 위에 있는 채팅 내용인데.. 제발 한번 찾아보고 답변을 해라...)

-어머!! 정말정말 미안해. 우리의 불찰이야. 이번 주에 못 간 거.. 다음 주 꽃으로 보내줄게.


그리하여 나는 또.. 트로피컬한 알록달록 컬러의 꽃을 받게 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휴.. 내 배달을 빠뜨린 것도 사실.. 저 한 번이 아니었다구? ^^^  


어제는 이곳에서 은행 계좌를 열었어. 지난 달에 드디어 나도 이곳의 신분증이 나왔거든. 그래서 은행계좌를 열 수 있게 되었지. 왠지 '중남미에서 은행 계좌 개설하기'를 상상하면, 또 절차가 비상식적으로 오래 걸리고.. 그럴 것 같았는데, 과테말라는 신분증과 주소 증빙만 있으면 계좌를 쉽게 열어줘. 신분증이 다른 건 인정을 안해주고 무조건 과테말라 주민등록증만 인정을 해주기에.. 그걸 취득하느라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야. ㅎㅎ

주소 증빙은, 주로 전기세 영수증으로 해. 그건 과테말라 뿐 아니라, 파나마에서도 멕시코에서 그렇게 하는 걸 보면.. 중남미의 국가들은 대체로 '주민등록등본'을 대체할 것으로 '주소가 나와 있는' 전기세 영수증을 사용하는 것 같아.  주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파나마는 주소가 없다? 말이 되니? 코스타리카도 없다? 말이 되니?

주소가 없으면 어떻게 사는 곳을 나타낼까 싶지? 파나마에서는 그냥 어느 동네의 건물 이름. 이 정도로 사용하고.. 그건 코스타리카도 마찬가지야. 주택들은 이를 테면, '맥도날드 다음다음 골목에서 우회전해서 세번째 집 파란 대문!' 이런 식으로 집 주소를 설명한대.. 2022년에 말이야!!!! 


아무튼, 난 어제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하고 직원의 도움으로 스마트 뱅킹도 할 수 있게 가입을 해두었어. 난 이제 이곳에서 신분증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계좌번호도 있는 사람이 되었지!!! 이제서야 비로소, '여기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고루 갖춘 느낌이 들더라. 나 이제 정말 과테말라에 사는 사람이라구! 헤헤


전에 네가 소개해줬던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을 지난 달에 읽었어. 정말 이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싶었고, 나 또한 열 명의 어린이들의 바이올린 선생님으로서 아이들을 더 따뜻한 시선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얼마쯤의 시야가 더 생긴 것 같아. 퍽 좋은 책이었어 :) 요새는 다른 에세이를 읽고 있는데, 읽을 수록 내용에, 작가가 골라 모은 단어 하나하나들이 깊이가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들었어. 나름 요즘 소설도 흥하고 핫한 작가인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참에, 네가 전에 편지에 쓴 내용이 생각났어. 나보고 할머니가 쓴 책들을 좋아한다고 했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 취향은 아무래도 할머니 쪽인가 봐. 같은 주제를 두고 이야기해도,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는 어른이 해주는 말이 더 좋더라구. ㅎㅎ


우리가 직접 만나 얼굴을 맞대고서 읽은 책 이야기, 재밌게 본 드라마 이야기(아니, 요새 우영우가 그렇게 재밌다며??!! 나는 유튜브 클립 영상들로 보고 있어 ㅎㅎ), 세상 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족발을 거하게 (꼭 매운족발 기본 족발 반반으로 먹고 싶다) 차려두고서 소맥을 말아 먹으며(난 요새 소맥이 맛있더라 ㅋㅋㅋㅋ) 나눌 날이 머지 않았어. 나.. 한국행 비행기 티켓 샀다!!!! 얏호!!!!


11월 28일에 한국에 도착해~ 그리고 1월20일에 다시 출국이니까.. 거의 두달 가까이 한국에 있을 거야! 그땐 네가 부디 덜 바쁘면 좋겠구나!!!


내가 답장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선 깜짝 놀라서, 헐레벌떡 의식의 흐름대로 일단 주절주절 써서 보낸다. 


그럼, 안 바쁠 때 답장 좀.

과테말라에서 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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