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서 과테말라로
채리에게
안녕-채리! 너한테 편지를 마지막으로 쓴 게 5월이니, 거의 5달 만에 편지를 쓰는 것 같아. 그런데 신기한 건 내가 쓴 저 답장이 마치 어제일 같다는 거야. 내 5달은 어디 갔을까?ㅎㅎ 그동안 네가 왜 답장을 하지 않는 걸까 궁금해하면서도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 올라오는 바쁜 인싸 채리의 삶을 보면서 '답장은 시간 날 때' 써주겠지. 하고 기다렸지. ㅋㅋ 그런데 웬걸 네 답장을 받고 나서도 한참을 바빠서 편지 쓸 틈이 안 났어.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벌써 두 달이 지났고 그 사이 하던 일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어서 드디어 답장을 쓴다. 늦게 답장을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참 장황하게 늘어놨지?
그동안 내 근황은 네가 아는 것처럼 '어딘가에 자발적으로 갇혀 주야장천 글을' 쓰는 시간을 보냈어. 정확히는 5월 18일부터 바로 지난주까지. 이번 주부터는 진짜로 여유가 조금 생겨서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책을 조금 읽었고 미뤄두었던 드라마도 조금씩 보기 시작했어.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직업은 십 년도 넘어서 글은 '엉덩이로 쓴다는' 점에선 까짓 껏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어. 그런데 내가 여태 알던 엉덩이로 글 쓴다는 건 빙산의 일각 이더라? 목, 어깨, 손목, 손가락, 눈, 그리고 뇌. 온몸의 장기와 근육 모두 풀가동을 해야 했어. 사람이 영혼이 모두 빠져나고 가죽만 남는다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를 실감한 몇 달이었다.... (앓는 소리 장전) 주 1회씩 목에 담이 와서 한의원을 다녔고, 눈을 뜨자마자 세수하고 자리에 앉아서 글 쓰고, 보조작가님과 기획 피디님들이 출근하면 같이 점심을 먹고, 바로 다시 글을 쓰고, 저녁 먹고 글 쓰고, 다들 퇴근하면 혼자 또 글 쓰고, 그러다 지쳐 양치만 하고 잠들었다가, 다시 일어나서 글 쓰고. 모든 극본 작가들이 이렇게 스케줄이 빡빡한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이 드라마가 연말에 론칭을 급하게 잡아서 대본 초안을 1주에 1회씩 뽑아냈어. 실무자들도 말이 안 되는 스케줄이라며 혀를 찼는데 내가 해낼 수 있다고 떵떵거렸지 뭐야. 이게 바로 '무식함의 용기'지. ㅋㅋ 처음엔 너무 큰 판을 벌린 것 같아서 두렵더라고. 잠도 안 오고. 망해도 나만 망하는 상황이 아니게 돼버린 게. 도망치고 싶기도 했고. 하지만 뭐 어째. 해야지. 내가 벌린 일인데, 마무리는 잘 하자하면서 꾸역꾸역 여기까지 왔어. 대본은 끝났지만 지금은 본 촬영이 시작됐어. 촬영이 시작됐다고 해서 나 몰라라 할 순 없지만.. 나도 살아야지. 다 뒷전으로 미루고 인제 집에 와서 며칠 쉬고 있어.
그동안 집을 제대로 관리해주지 못했더니 잡초가 너무 많이 자라서 집이 정글이야. 올해는 배추를 야무지게 심어서 (작년엔 배추랑 무 농사가 좀 아쉬웠는데) 맛깔난 김치를 담그려 했는데, 바빠서 아무것도 못했어. 그게 또 하나의 스트레스로 다가오더라. 시골에서 삶을 택한 게 스트레스받으려고 택한 게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이 집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평수를 넘었다 싶어서 이사를 생각하고 있어. (마당이 300평..) 물론 이사를 가더라도 주택으로 갈 거야 ㅎㅎ 평수만 줄여서. 채리 네가 오는 11월이면 이사를 갈 수도 있고 잘 모르겠다. 이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좋은 운 들어왔을 때 이사 가고 그러는 거 아니라고 하더라고. 알지? 나 샤머니즘 좋아하는 거 ㅋㅋㅋㅋ
그동안 너는 과테말라에서 신분증도 발급받고 은행 계좌도 트고, 진짜 그곳에 속한 사람이 되었네. 나는 그동안 한층 더 불안해진 느낌인데 말이야. 서울-강원도를 너무 왔다 갔다 했더니 ㅋㅋ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하는 지경이다. 하지만 이 또한 싫지 않아. 위에도 썼지만 강원도 집 2년 살았다고 이사 가고 싶다고 마음이 들썩이는 걸 보면, 난 불안함을 즐기는 게 확실하거든. ㅋㅋ 한국의 올해 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어. 여름에도 수영장 물에 몸 한번 담그지 못해서 많이 아쉬워. 물론 일도 글도 좋지만 내 개인적인 추억과 행복이 더 중요하니까. 그래서 드라마가 끝난 겨울엔 꼭 여름나라에 가서 수영장에서 마음껏 수영을 하리라 다짐했어. 너의 겨울은 몇 년 만에 보내는 한국에서의 시간들이 되겠군. 얼마 만에 널 만난다니 많이 설레는구나. 널 보러 가겠단 약속도 코로나 덕분에 지켜지지 못했지만, 슬슬 하늘길이 열리는 걸 보면 네가 사는 나라에 나도 가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난다.
오랜만에 편지, 그리고 많이 늦은 답장에 나도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썼더니 온통 징징대는 이야기뿐인 것 같지만, 네가 오는 날까지 나는 비워낸 영혼을 가득 채우고, 예전의 에너지 가득했던 나로 네 가족을 맞이할게. 만나는 그날까지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길.
그럼, 시간 날 때 답장 좀.
강원도에서 도연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