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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 Jun 21. 2023

100번째 편지를 부치며

강원도에서 과테말라로

우리의 펜팔을 까맣게 잊은 나의 잔잔한 일상에 돌을 던진 채리에게


오랜만에 받은 네 답장 잘 받았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깜짝 등장한 게스트처럼 반갑기 짝이 없었다. ㅎㅎ 2023년 1월 1일 새해를 보내고 네가 강원도 집을 다녀갔으니 벌써 넉 달이나 지났다는 사실에 까무러칠 뻔하기도 했고. 네 말처럼 시간은 정말 화살 같다고 느끼기도 했어. 넌 그동안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그립던 네 침구와 침대에서 편히 자고 일어나 과테말라의 맑은 하늘을 보며 역시 집이 최고다라고 생각했을 테고, 사진첩을 보거나 문득 그리워지는 한국의 가성비 초밥이나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국을 얼마쯤은 그리워하고 있을 테지? 나는 그동안 아프리카를 다녀왔고, 집필실은 강서구로 이사를 했고, 강원도 집도 이사 준비를 마쳤어. 7월 말에 이사를 하는데 이번엔 경기도 고양시 아파트로 가게 되었어. 강원도 집을 떠나기 전에 네가 다녀가서 얼마나 다행인지! 통영 한옥 > 카페 호피폴라 > 성산동 감나무집 > 인제집은 나의 공간의 역사인데 네가 통영 말곤 다 와봤으니. 채리 넌 이도연의 역사를 함께 했다 할 수 있어.

 

지금 내가 쓰는 편지가 너와 나의 100번째 펜팔이야. 오랜만에 첫화보기를 눌러 너와 주고받은 3년 전 편지를 읽었어. 그땐 내가 꼭지를 강아지 별로 보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평생을 함께 해도 될까? 하는 고민을 하고, 첫 소설을 쓰면서 자괴감을 많이 느꼈더라. 그에 비하면 그때의 너는 여전히 어른스럽고 대체적으로 '그럴 수 있지' 하는 태도였던 것 같아. 나는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면서 '호들갑 떨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내가 너와 시절인연으로만 그치지 않고, 오래 만나는 친구가 된 데에는 호들갑을 떨지 않는 게 좋아서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는 닭발 앞에서, 순댓국 앞에서, 소맥 앞에서 가끔 이성을 잃고 흥분하긴 하지만 생각의 태도는 언제나 한 뼘쯤 여유를 남기는 사람 같달까. 개그맨 유세윤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소개글이 이렇게 적혀있어. "아 구럴수도 있겠당" 나는 아! 이것이야 말로 내가 추구하는 인생의 방향성이다. 싶더라. (별게 다. 호들갑) ㅋㅋㅋ 너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내 고민을 듣고 네가 해주는 말들이 대부분 아-구럴수도 있겠당-같은 느낌이라, 한편으론 편안했고 좋았고 계속 네 답장을 받고 싶고 그랬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네가 과테말라에서 일상을 회복하는 동안, 나는 연초에 드라마 방영을 마치고, 아프리카를 다녀온 이후로, 다시 새로운 작품을 쓰고 있어. 이번엔 '전체관람가' 느낌의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고, 30분짜리 웹드라마에서 60분짜리 12부작 미니시리즈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도전을 하는 셈이야. 다른 작가님이 말하기를 "시간이 2배 늘어났다고 해서 대본에 들어가는 힘이 2배가 늘어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200배가 힘들어지는 일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니 시리즈는 힘들다고 들었는데, 역시 옛 어른말 틀린 게 하나도 없다는 진리를 허리와 엉덩이가 부서지도록 깨닫는 중이란다. 하지만 도전과 노빠꾸로 점철된 내 인생, 가는 거지 뭐. ㅋㅋㅋ

6월이면 어느 정도 대본 기초작업을 마무리하고 과테말라행을 결정해보려 했는데, 자꾸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면서 결정이 늦어지고 있어. 종합 예술인으로서 다음 스텝을 밟기 위한 나의 중요한 시기이니만큼 조금만 기다려주길 바란다. 너무 늦지 않게 과테말라에서 호스트 채리의 대접을 받아볼 수 있기를! ㅎㅎ


오늘 한국은 비가 오고 있어, 사진을 보니 오늘 과테말라에도 비가 왔더라. 드디어 우기가 시작되었구나. 한국도 이상기온으로 6월 주제에 8월만큼 더워서 벌써 에어컨을 틀어야 하는 날씨가 되었어. 오늘은 오랜만에 엽떡이 너무 먹고 싶어서 포장을 해왔는데, 집에 씻어서 보관해 둔 배달용기를 매장에 가지고 가서, 이 용기에 담아달라고 부탁드려서 용기를 재활용했어. 집에서 쓰는 커피 빨대는 옥수수 생분해 제품으로 사용하고 있고, 음식은 되도록이면 배달이나 포장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 사람들이 모두 저마다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천으로 우리의 지구가 좀 덜 더웠으면 좋겠다. 전기세 많이 나오는 거 싫거든 ㅋㅋㅋㅋㅋ


지애가 과테말라로 가서 너는 지금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겠다. 넘 부럽다.. 증말.. 지애와 즐거운 시간 보내고, 다니엘 오빠와 시호에게도 강원도 이모의 안부를 전해주렴. 

그럼 20000.


ps. 언제든 시간 날 때 101번째 편지를 남겨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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