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것.
난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고 믿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건 만물의 법칙이며 모두가 이해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들이다. 누군가는 이런 흐름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고파 발버둥 친다. 바닥에 떨어진 돌도 언젠가는 닳아 없어지고, 비가 와 고여있던 물도 결국 증발하여 사라진다. 영원할 듯 하지만 우리들 역시 모두가 늙고 결국엔 사라진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시간이다. 발버둥 쳐도 막을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게 늙음과 소멸뿐이라면 너무 섭섭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 속에서 어떤 보석을 찾는다. 나 역시도 그랬다. 몇 가지의 보석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특활반이라는 게 있었다. 당시 나는 영어반이었는데 그다지 재밌게 다니진 않았다. 그때는 학생들이 샤프보다는 연필을 더 많이 쓰던 시기였다. 다 비슷한 캐릭터가 그려져 있던 연필들. 하지만 내 연필은 조금 달랐다. 다른 친구들이 연필깎이로 깎아 말끔하던 것에 비해 난 엄마가 칼로 연필을 깎아줬다. 울퉁불퉁했던 연필들.
어느 날, 특활 수업을 지루하게 듣던 중 난 연필을 하나 잃어버렸다. 어딘가에 떨어트린 것 같지만 찾을 수 없었다. 쉬는 시간 내내 찾아봤지만 없었다. 쉬는 시간은 금방 끝났고, 선생님이 들어왔다.
"이거 누구 연필이지?"
교실에 들어온 선생님은 교탁 앞에서 어떤 연필을 주웠다. 울퉁불퉁하게 깎여있던 연필. 누가 봐도 내 연필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들려는 찰나,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연필로 깎은 것 같은데? 누구 거야?"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손을 들 수 없었다. 나만 다른 연필. 칼로 깎은 연필이 부끄러웠다. 왜 나는 연필깎이를 쓰지 못할까. 선생님은 몇 번이고 연필 주인을 찾다가 결국 포기했고, 앞에 앉아있던 어떤 친구에게 연필을 건넸다. 그 연필도 연필깎이 속으로 들어가 말끔해지겠지. 난 필통 속 울퉁불퉁한 연필 몇 개를 내려다보다 급히 필통을 닫았고, 짝꿍에게 연필을 빌렸다.
이 사소한 기억들이 왜 지금까지 내게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며 이 이야기는 나에게 다르게 남는다. 집에서 연필을 깎았을 엄마. 매일 필통을 확인하고 다 닳은 연필을 봤을 때, 새 연필을 샀을 때, 연필을 깎았을 엄마.
시간이 지나면 그때 그 사람들의 모든 게 다르게 보인다. 그때 그 말들과 행동들.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었다. 그때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는데. 지나간 기억 속에서 유통기한 지난 인연들이 다시 쓰인다. 필름도 그렇지 않을까. 어릴 때 매일 찍히고 보던 필름 사진들이 지금 보면 새롭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사진들 속에서 흐릿한 예전 필름 사진의 매력이 느껴진다면. 그게 우리가 시간 속에 살며 캐낸 소박한 보석일 수 있겠지. 지금 내가 찾은 보석이기도 하고.
Written By. 낭만피셔
Photo By. 낭만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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