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들이 돌아갈 공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고공농성과 노키아, 강주룡
일제강점기 조선, 평양 을밀대 지붕에서 농성을 벌인 여성 노동자가 있었다. 우연찮게 그 사연을 어느 신문 아카이브에서 읽곤, 언젠가 그 이야기를 기사로든 칼럼으로든 소재로 써야겠다고 마음에 두고 있었다. 2018년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 소설로 그 이야기가 나왔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평양고무공장 임금 삭감에 항의했던 직원 강주룡이다.
"1931년 5월 16일 평원고무공장 여공들의 단식 파업은 평양의 2300명 고무직공들의 임금 삭감에 대한 항의에서 비롯되었다. 강주룡은 1931년 5월 평원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하던 중 일경의 간섭으로 공장에서 쫓겨나자 을밀대 지붕으로 올라가 무산자의 단결과 노동생활의 참상을 호소하였다. 광목을 찢어 줄을 만들고 감아 올려 줄타기하듯 올라간 지상 12m 을밀대 지붕 위에 앉아 평양의 새벽을 가르고 “여성 해방, 노동 해방”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주룡(姜周龍)
YTN에서 제작한 영상을 보면서 다시 그 사연을 떠올린다. 2018년이니 벌써 9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은 아무런 길을 찾지 못하고 끝내 굴뚝과 철탑,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인다. 파인텍 노동자들은 이야기한다. "저희들이 돌아갈 공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YTN, 2018.11.10) 파인텍 강민표 사장도 말한다. "지금은 길이 없다. 공장도 비워줬다” (한국일보, 2018.9.1)
전 한국합섬이었던 회사가 스타케미칼, 파인텍으로 변했다. 파산과 인수, 매각으로 회사 주인이 바뀌는 동안 일하던 사람들은 고용을 보호받지 못했다. 파인텍 모기업은 스타플렉스라는 광고용 섬유 제조사다. 앞서 "길이 없다"고 말했던 파인텍 강민표 사장은 스타플렉스 전무이사다. 사측은 파인텍과 스타플렉스가 별개 회사라서 고용승계가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얼마 전 핀란드 노키아(Nokia) 모바일 사업부문 매각 및 인수 과정에서 실직한 사람들이 어떻게 새로 일을 시작했는지 들을 기회가 있었다. 요약하자면, 노동자들에게 두 가지 안전장치가 있었다. 하나는 정부 차원 실업자 급여, 그리고 회사 및 노조 차원에서 제공하는 지원금이었다. 어느 쪽을 받든 금액은 비슷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실직자들이 회사에서 나오는 지원금을 선택해 재교육과정을 통해 일자리를 찾거나 동료들과 창업했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가 노키아를 인수한 뒤 해고하기로 발표했던 인원만 만 8천 명이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핀란드는 인구 5백 만을 조금 웃도는 나라다. 노키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나온 사람들이 바로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정부는 소규모 창업자 지원금 및 교육 프로그램을 늘리는 한편, 노키아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예전 직원들에게 벤처 지원 및 특허 사용 혜택을 제공하라고 압박했다. (NYT, 2015.8.10) 이런 안전장치를 기반으로 이들 해직자 다수가 고용시장에 다시 들어가도록 한 노력이, '노키아 망했다'고 한국 여러 언론이 쓰는 사이에 핀란드 사회가 벌인 일들이다.
경영난을 이유로 사업을 매각, 철수하거나 쪼개는 일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준비도 없는 노동자를 내보내는 회사들의 악의를 우린 너무 많이 접한다. 기륭전자가 그랬고, 쌍용차가 그랬고, 이랜드, 한진 중공업, 콜텍, 삼성 SDI, 통신사 AS 기사들 문제가 모두 비슷하다. 비용 절감 차원이라며 선택하는 외주(outsourcing) 혹은 하도급에서 노동자보호는 빠져있다. 애초에 갓길을 만들어 두지 않고 일을 벌이므로, 극단적인 대립으로만 이어진다.
을밀대에 올랐던 강주룡의 사연이야 소설로 남으면 되지만, 광화문에 천막을 치고 고공농성을 이어가는 노동자들의 사연은 그래선 안된다. 고용노동법이든 노사협약이든 일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규정과 안전장치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언론이 노동자들의 '길 없는' 농성을 기록하고 소개하는 일과 함께 노동법 개정의 필요성을 정치권과 기업들에게 물어야 할 때다. 좋은 영상을 보니, 좋은 기사가 아쉽다.
https://www.ytn.co.kr/_ln/0103_201811102256438076#
(촬영 및 편집 시철우, 이상엽, 그래픽 이은선)